497화. 물건
레드울프 구역, 원로원.
의사당 앞으로 나아가 돌아선 가이우스는 알렉산더를 비롯한 원로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 변혁파의 수장이자 동쪽 군단 군단장은 그들이 완전히 회복한 후에야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와 그의 동료는 구세군, 반 지성교와 결탁해 집정관님을 통제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제거하려 했네. 그러나 달지기의 비호 아래, 그들은 이미 내 손에 제거됐다네!”
알렉산더는 가이우스가 말하는 도중 무턱대고 끼어들진 않았다. 대신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여러 보수파 원로의 시체를 확인했다.
고민에 잠긴 그가 망설이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던 그때, 가이우스는 전보다 더 커진 목소리로 말했다.
“일찍이 바로를 맹종한 이들이 회개만 하면 나도 더는 그 죄를 묻지 않을 거야. 상황은 이미 일단락됐어. 이젠 새로운 장을 열 때야. 우린 질서를 다시 세우고, 폐단을 바로잡고, 배신자들이 장악한 자원을 되찾아야 하네!”
그는 알렉산더로 대표되는 중간파 인사들에게 올리브 가지를 내밀었다.
알렉산더도 이제야 보수파가 꺾이고 변혁파가 우위를 차지한 상황을 확인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우리는 이제 새로운 집정관을 선출하고, 그자에게 밖에 있는 주민들과 대화를 통해 이번 위기를 해결하게 해야 하지.”
알렉산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변혁파 원로들이 목청을 높였다.
“가이우스!”
“가이우스!”
“가이우스!”
가이우스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돌아서서 원래 집정관의 자리인 높은 곳으로 다가간 그가 살아남은 여러 원로를 향해 말했다.
“최대한 빨리 정세를 안정시키도록 하겠네. 살릴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살리고, 살릴 수 없는 것은 바로와 함께 지옥으로 보낼 거야!”
동란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했다. 그저 어느 정도만 통제됐을 뿐, 그것은 아직도 퍼스트 시티의 구석구석을 불태우고 있었다.
* * *
“할아버지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어. 그 이후로도 이유를 알려주지는 않으셨고.”
아비아는 간단히 설명한 뒤 장목화와 성건우를 향해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미 너희한테 다 말했어.”
장목화는 베껴 쓴 신비한 번호를 챙긴 뒤 정색하고 물었다.
“저희에게 바라는 게 뭡니까?”
아비아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약간 히스테릭하게 말했다.
“내가 너희한테 알려준 걸 널리 퍼뜨려줘. 이 단서를 제거하고 싶어 하는 그 조직이 절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도록! 정말로 그걸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라면 이 세상을 다시 파괴해야겠지!”
“알겠습니다.”
성건우가 먼저 답했다.
장목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묻는 자가 있거든 바로 알려드리죠.”
아비아는 고개를 숙여 손에 있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사실 난 이것도 너희한테 넘기고 싶어. 근데 아직 그럴 용기까지는 안 나. 최후의 수단으로 쓸 수 있는 물건이라 미련을 못 버리겠어.”
아비아의 조용한 중얼거림에 성건우가 진지하게 대꾸했다.
“언젠가 어떤 누구도 그런 것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도 될 때가 오면, 모두 태양 아래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겁니다.”
아비아는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길 바라.”
장목화가 디지털시계를 한번 쳐다보았다.
“우린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구조팀은 동란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틈을 타 최대한 빨리 도시를 빠져나가야 했다. 다시 안정을 찾은 퍼스트 시티가 초봄 마을 사건을 떠올리기 전에 성동격서를 제대로 이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비아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이었던 건 더 이상 이 비밀을 지키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상대가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이 핸드폰을 써 보라고 협박할까 걱정이 돼서였다.
핸드폰을 쓰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아비아 역시도 알지 못했다. 그런 모험은 가능한 피하고 싶었다.
결국 시종일관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던 상대가 이렇게 조용히 물러나 주다니, 아비아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결말이었다.
* * *
장목화, 성건우는 목욕탕 응접실을 나오자마자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아비아 집에서 거리로 나오는 데까지 채 20초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 가상 세계의 주인 노부인은 칸나가 물리적으로 조치를 취한 덕에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대문의 경호원들은 곧 깨어날 듯 움찔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칸나의 친근한 아우라가 유지 중이라 큰 걱정은 없었다.
백새벽과 용여홍은 이미 위험한 적을 꽁꽁 묶어 지프에 쑤셔 넣었다.
용여홍이 그 적을 밀접하게 관찰하고 있고, 백새벽은 언제라도 라운드힐 스트리트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지프의 방향을 돌려놓았다.
쿵쿵쿵!
빠르게 달려 나온 장목화가 몸을 틀더니 칸나가 있는 방을 향해 외쳤다.
“임무 완수!”
가상 세계의 주인 옆에 있던 칸나가 밖을 돌아보았다.
“먼저 가.”
그녀가 도시를 빠져나갈 이유는 없었다. 현장을 정리하고 이곳을 떠나도 원로의 딸이 조사로 곤란해질 일이 있겠는가.
원로원 쪽에서 누가 승리했든 칸나의 아버지 마이어스의 안위에 문제가 있을 리도 없었다. 기껏해야 예정보다 일찍 실권을 잃는 정도에 그칠 터였다.
마이어스는 본래 오레이 사후 일어난 동란으로 얻은 교훈을 원칙처럼 지켜오고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든 집정관을 지지하라. 그게 누가 됐든!
너무 조그맣고 부드러운 음성에 장목화는 하마터면 칸나의 답을 듣지 못할 뻔했다. 그녀는 내내 지프로 달리면서도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부드럽기도 해라, 욕쟁이 앵무새 주인 아니었나요?’
장목화는 빠르게 보조석에 탑승했고, 성건우도 뒷좌석에 올랐다.
* * *
지프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장목화는 몸을 틀어 성건우에게 지시했다.
“넌 빨리 그 물건들에 무슨 부작용이 있나 확인해 봐.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빨리 이용해야 저 포로가 나중에 아무 수작도 못 부리지.”
물건은 성건우가 카오의 몸을 뒤져 찾아낸 염주, 목걸이, 라이터, 콘돔 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중 일부는 심령의 복도에서 기인한 것으로 특정 능력을 갖추고 있을 터였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었던지라 성건우는 아직 무엇도 확인하지 못했다.
뒤이어 용여홍이 성건우가 전에 차에 던져둔 물건을 건네주었다.
“자, 맹목의 고리.”
검은 머리카락으로 짜 만든 듯한 팔찌는 이미 색이 어두워져 있었다. 남은 사용 기회는 두세 번도 채 안 될 것 같았다.
성건우는 맹목의 고리를 왼 손목에 차고, 전술 배낭에서 몇 가지 물건을 꺼냈다. 모두 카오에게서 찾아낸 것들이었다.
제일 먼저 꺼낸 건 라이터와 콘돔이었다.
성건우는 눈을 반쯤 감고 몇 초간 그것들을 느껴보았다.
“아무 변화도 없네. 평범한 물건이야.”
이내 성건우가 콘돔만 용여홍에게 건넸다.
“가져.”
“뭐하러?”
용여홍의 얼굴에 민망한 기색이 어렸다. 그 방면으론 경험이 없는지라 아무래도 콘돔을 받기엔 좀 부끄러웠다.
“나중에 물 옮길 때라도 써.”
성건우가 진지하게 답한 뒤, 라이터는 본인 주머니에 넣었다.
뒤이어 그는 갈색 염주를 집었다. 총 여섯 개 알로 이뤄진 염주였다.
잔나가처럼 염주를 몇 번 굴려보던 성건우는 고개 숙여 자신의 다리 사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돌연 뭔가 깨달은 듯 옆쪽의 카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때때로 반응이 좀 느리고 멍청한 모습을 보인다 했다. 이 염주를 차면 피가 아래로 몰려서 그렇구나.”
딱히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용여홍, 장목화, 백새벽 모두가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염주의 부작용은 기계 승려 정법의 대가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색욕 증강. 그것도 심령의 복도 급 색욕 증강이었다.
“사고 속도에 영향을 미쳐 장기적으로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 외에는 심한 부작용이 없네요. 음, 버릇이 없어지기도 하고, 행동을 방해해 달리기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고요.”
성건우의 진지한 목소리를 들으며 용여홍은 흠칫 놀랐다. 저도 모르게 힐끔 쳐다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뒤이어 장목화가 과학 연구를 하는 듯한 투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평소에는 최대한 착용하지 않고 있다가 중요한 순간에만 차는 게 좋다는 거네?”
물론 그래서는 착용 시 걸리는 시간 때문에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두 가지 단점을 비교해 더 나은 쪽을 택해야 했다.
“네.”
순간 답하던 성건우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 용여홍을 쳐다보았다.
“이거 효과 하나를 발견했어.”
“뭔데?”
장목화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반면 용여홍은 틀림없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란 걸 직감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도구, 일반 사람은 못 쓰잖아요. 물건에 따르는 부작용에만 시달리지. 근데 이 염주의 부작용, 상당히 유용할 때가 있어요. 우리 여홍이가 결혼해서 첫날 밤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제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거잖아요! 그때 이걸 끼면 돼요!”
“…….”
용여홍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고, 장목화는 그의 체면을 생각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아서 차 안엔 급격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특정 질병을 치료하는 데 쓸 수 있는 거 아냐?”
백새벽만 무의식적으로 말을 보태다가,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부끄러움에 전방만 주시했다. 그녀를 진정으로 부끄럽게 한 건 자신이 던진 약간 빗나간 화두가 대화를 정상적인 토론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이었다.
“안 해봐서 모르겠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성건우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이 물건의 대가가 인격 분열인 줄 알았는데, 아쉽네⋯⋯.”
그는 카오가 청각 박탈 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에 기반해, 염주와 목걸이 중 하나가 보리 영역에 속해 있으리라 짐작했었다. 인격 분열은 보리 영역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대가 중 하나였다.
“아쉽다니?”
장목화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성건우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게 대가라면 제 증상은 심령의 복도 급으로 가중될 테니까요. 그 상태로 자아를 포용할 기회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거 좀 위험한 생각 같은데.’
하지만 장목화는 그런 방면으로 경험이 전무하기에 성건우의 방안이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실행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홉 성건우가 완전히 분열돼 각자의 특성을 갖는다면 연합했을 때는 정말 황금 엘리베이터 앞을 가로막은 성건우를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아홉 성건우가 완전히 분열된 후에도 여전히 서로에게 우호적으로 협조하며 외부의 적에 공동으로 맞서야 했다.
럭비공처럼 생각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건우는 다시 용여홍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 염주의 능력, 육식(六识)의 박탈일 가능성이 크긴 한데, 실험해보지 않고서는 장담할 수 없지.”
“왜, 뭐, 뭐! 너 뭘 하려는 건데?”
용여홍이 지레 겁을 먹었다.
“걱정하지 마, 빼앗은 다음엔 바로 다시 되돌려줄게.”
성건우의 말 같지도 않은 위로에 용여홍이 이를 악문 그때, 언제나처럼 팀장 장목화가 정의를 위해 나섰다.
“실험은 이따 돌아가서 해. 마침 대상으로 삼기 딱 좋은 포로도 있잖아.”
“네.”
성건우는 염주를 종이로 싸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이거는 부작용이 한참이 지난 후에야 사그라들 것 같네⋯⋯.”
중얼거리던 그가 이번엔 은제 천사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집었다.
뒤이어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좀 졸리네.”
“대가가 졸음인가?”
장목화가 반문했다.
“아마도요.”
성건우는 대답과 동시에 또 한 번 깨달음을 얻었다.
“염주의 부작용으로 이 목걸이에 따르는 부작용에 대처하면 되겠네요! 이 사람도 그랬을 거예요.”
그가 가리킨 건 마취된 포로 카오였다.
운전하던 백새벽은 졸리고 목마른 상태를 한번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사고와 반응, 집중력에 모두 문제가 생길 텐데.”
장목화가 웃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우리 포로가 된 거지. 그럼 능력은 뭔데?”
“굉장히 위험한 느낌이에요. 사명 영역인 듯한데 구체적인 능력이 뭔지는 실험을 해봐야 알 것 같네요.”
성건우가 다시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용여홍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야!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사명 영역의 물건이란 말을 듣고 어떻게 자원하겠는가!
성건우도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다른 물건을 찾았다.
지프는 계속 순행 중이었다. 다만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대신 가장 가까운 길을 통해 골든애플 구역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