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신비로운 번호
아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 정말 많이 알고 있구나. 하……. 근데 나도 승려 교단의 전신이 어느 연구원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는 장목화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잠깐 돌아서라는 신호를 보냈다. 비밀리에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비아는 순간 긴장했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행동이었다.
“뭐 묻고 싶은 거 있어?”
장목화가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성건우 역시 잔뜩 낮춘 목소리로 답했다.
“오레이가 왜 머신헤븐을 떠나야 했는지 물어봐요. 겐이 알고 싶어 했던 거잖아요.”
1초간 침묵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그건 네가 직접 물어도 되잖아.”
“안 돼요. 팀장님한테 말하면 팀장님이 물어본다고 약속했잖아요.”
이 단호한 성건우를 보며, 장목화도 그냥 살짝 고개를 돌리고 한숨만 토했다.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건 바로 자신인데 누굴 탓하겠는가.
장목화는 있는 힘껏 미소를 짜낸 채 뒤돌아섰다.
“구세계 파괴 후에도 제3 연구원은 별 피해가 없었을 텐데, 왜 부인의 할아버님께선 거길 떠나 레드리버 유역에 퍼스트 시티를 건립하신 걸까요?”
아비아는 본능적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왜냐면 할아버지는 당신의 가장 걸출한 작품, 직접 소스 브레인이라 명명한 최강의 인공지능에 정말로 인간과 비슷한 일정한 의식이 생성된 걸 발견하셨거든. 게다가 자신만의 생각을 갖게 된 소스 브레인은 비밀리에 모종의 꿍꿍이를 세우기도 했대.
할아버지는 이에 엄청난 위협을 느끼고, 소스 브레인의 계획이 완성되기 전에 황급히 제3 연구원을, 지금의 머신헤븐을 떠나셨어.
음, 별로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이 사실은 알고 있던 모양이네. 할아버지께선 도망쳐 나올 때 구세계 파괴에서 살아남은 제3 연구원 다른 연구자들한테 연락해보셨는데, 그중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으셨대.”
마지막 말에 장목화는 솜털이 쭈뼛 서는 듯했다.
그녀는 마침내 오레이가 왜 마커스와 그의 어머니에게 머신헤븐을 경계하고 소스 브레인을 믿지 말라고 당부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비아는 장목화, 성건우가 이 정보를 소화할 시간을 잠시 주었다.
“할아버지는 우리한테 머신헤븐에서 온 손님을 조심하라고 했어. 할아버지는 소스 브레인을 포맷할 방법을 알고 계셨거든. 설계하고 제작했을 당시 남겨둔 뒷구멍 같은 거라, 소스 브레인이 직접 그걸 바꿀 순 없다고 했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장목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방법을 알면서도 소스 브레인에 문제가 생긴 걸 발견하자마자 그걸 직접 포맷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뭐라고 말씀하시던가요?”
아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은 안 하셨어.”
장목화는 다시 화제를 바꿨다.
“그럼 혹시 제8 연구원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 있으신가요?”
아비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물론. 할아버지는 황제가 되려고 하시기 전에 소스 브레인 관련 기술 자료랑 정리한 일부 정보를 13호 유적 내의 그 위험한 실험실에 숨겨놓으셨대. 그중에는 제8 연구원과 관련된 내용도 있다고 하셨어.
그 외에 또 하신 말씀은 없어. 가끔 전부 그 녀석들 때문이라고 원망만 하셨지. 그중 일부는 아직 살아있을 테지만 이미 무시무시한 변화를 겪고 어둠의 앞잡이로 전락했을 거라고, 그러니 경계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제3 연구원 수석 과학자 오레이는 확실히 많은 걸 알고 있었구나.’
꽤 만족한 표정의 장목화는 잠시 고민하다 직접적으로 물었다.
“혹시 구세계 파괴 원인이나 무심병의 기원에 대해선 언급 없으셨나요?”
아비아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없어. 근데 언젠가 우리 가문의 집사 하나가 무심병에 걸린 이후, 할아버지께선 매우 이상한 모습을 보이셨어. 슬퍼하시지도, 당황하거나 무서워하시는 게 아니라 의혹이나 분노를 표출하셨어.”
지금은 그게 무슨 뜻일지 분석할 수 없어서, 장목화는 아비아가 들고 있는 낡은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바로 할아버님께서 부인께 주셨다는 그 위험한 물건인가요?”
아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때 성건우가 장목화의 소매를 다시 잡아당겼다.
장목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직접 물어.”
이미 다 우호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한마디 말실수로 상대와 척질 가능성은 손에 꼽혔다.
장목화의 허락이 떨어지자, 성건우가 아비아를 보며 호기심을 빛냈다.
“그 핸드폰으로 돌아가신 할아버님과 통화할 수 있습니까?”
아비아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건 귀신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말이잖아!”
약간 짜증을 낸 아비아가 갑자기 또 한마디를 던졌다.
“근데 이 핸드폰에 신비한 번호 하나가 저장돼 있긴 해.”
성건우가 캐물었다.
“얼마나 신비합니까?”
몇 초간 침묵 끝에 아비아가 답했다.
“처음엔 도시의 어느 거물의 번호거나 구세계 특정 지역과 연결되는 번호인 줄 알았어. 근데 나중에야 그게 숫자, 부호, 일련의 코드로 이뤄진 거란 걸 알았지. 표면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여.”
“암호화된 것일 수도 있죠.”
장목화가 냉정하게 지적했다.
아비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쨌든 구세계와 관련돼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어. 구세계 통신망은 일찍이 싹 다 파괴돼버렸잖아.”
그러자 성건우가 매우 음험한 투로 반박했다.
“어쩌면 특수하고 영적인 방식으로 연결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비아는 성건우의 무시무시한 가설에 놀라기보단 낯빛만 좀 바뀌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녀는 성건우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가능성도 있음을 인정했다. 오레이 같은 어마어마한 인물이 생각하기에도 비정상적으로 두렵고 위험한 물건이라면 특수한 데가 없을 리 없었다.
장목화와 성건우가 새로운 질문을 하기 전, 아비아는 자발적으로 한 가지 단서를 더 내놓았다.
“할아버지는 일찍이 이 핸드폰으로 누군가랑 통화하신 적이 있어.”
장목화가 곧장 캐물었다.
“언제요? 누구랑요?”
아비아는 재차 기억을 더듬었다.
“할아버지가 퍼스트 시티 황제가 되기 1년 전쯤, 아버지가 서재 창문 앞에서 할아버지가 이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랑 통화하는 걸 두 번이나 봤대. 아버지도 직접 여쭤보신 적 있는데, 그냥 다시는 묻지 말라고만 하셨다더라고.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각성하신 할아버지는 단 1년 만에 심령의 복도에 진입해서 신세계로 이어지는 대문을 찾으셨어.”
“예?”
장목화가 흠칫 놀랐다.
성건우 역시 자신의 의혹과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오레이 선생께선 원래부터 각성자였던 거 아닙니까?”
아비아가 빠르게 설명했다.
“구세계 파괴전까지 할아버지는 그냥 운동, 격투, 유전자 개량 받기를 좋아하는 과학자일 뿐이셨어. 구세계가 파괴되는 와중에도 이상을 보이거나 능력을 각성하지는 않았고.
할아버지가 퍼스트 시티 창립자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건 시내 로봇들을 고치고 그것들을 이용해 파괴된 공장들과 생산 라인을 회복시켜서야.
할아버지가 아니면 퍼스트 시티는 그렇게 빨리 안정을 찾고 외적으로 확장하지도 못했어. 당시엔 강한 각성자도 낼 수 없는 성과였던 거지.”
“과학 기술이야말로 최고의 생산력이죠.”
성건우가 동조했다.
아비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후 할아버지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셨어. 사실 이건 할아버지가 약소해서 카스나 드라세 등 강력한 세력을 이룬 인물한테 실질적인 위협이 안 되기 때문이었어. 말하자면 그들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면서 각 세력을 효과적으로 이어줄 수 있는 존재였던 거지.
게다가 할아버지는 각성자도 아니라 전쟁 때 전투에 참여할 필요도 없었어. 대부분 일반 병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을 지휘하고, 통솔하기만 하면 됐던 거야. 할아버지가 군에서 명망이 가장 높은 것도 그 때문이고.”
“당시만 해도 카스와 드라세 등 강력한 세력을 이룬 인물은 부인의 할아버님께서 퍼스트 시티를 통합하고 황제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겠네요.”
장목화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평가했다. 아비아로부터 더 많은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아비아는 복잡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할아버지도 그러셨어. 각성자가 되고 신세계의 대문을 찾기 전, 할아버지는 당신 위치를 매우 또렷하게 파악하고 계셨지. 당신은 그저 타협의 산물이라고, 언제라도 집정관 보좌에서 떠밀려 내려올 수 있다는 걸 아셨어.
그래서 그전에 가문을 위해 많은 토지와 인맥과 명성을 쌓아두려 하셨고, 동시에 최대한 각 방면과의 관계를 잘 맺어서 퍼스트 시티의 결합력을 공고히 하려 하시기도 하셨어. 이 도시와 이 세력에 진심이셨던 거야.
그러다 갑자기 각성하고, 심령의 복도에 진입하고, 신세계로 통하는 대문을 발견한 후에 황제가 되겠단 야심을 안고 다시 계획하고 행동에 나서셨지.”
장목화는 다시 아비아가 든 은백색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저걸로 누군가랑 통화한 뒤 자연스럽게 각성했다고? 거기다 1년 만에 기원의 바다를 건너 심령의 복도에서 신세계에 진입하는 대문을 찾았다?
저건 위험한 물건이 아니라 신물(神物)이잖아, 신물! 근데 오레이는 왜 후손들한테 그걸 못 쓰게 한 걸까? 위험한 물건이라고 강조하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까지 한 이유는 뭐지?’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장목화가 망설이다 물었다.
“단순히 그 핸드폰을 갖고 있기만 해선 아무 영향도 없는 겁니까?”
아비아가 스스로를 가리켰다.
“무슨 영향이 있었다면 나한테 바로 나타났겠지.”
그 순간, 성건우가 크게 외쳤다.
“목욕을 좋아하는 게 영향의 결과였나 봅니다!”
아마도 아비아는 성건우에게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내가 계속 핸드폰을 쥐고 있게만 해주면, 안에 든 데이터를 복사해도 돼.”
성건우는 겁먹었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야밤에 컴퓨터가 멋대로 연주회를 열까 걱정됩니다.”
아비아는 또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됐지만, 장목화는 이해했다.
구조팀은 오하명의 목소리를 녹음했다가 비밀스러운 영향을 받았었다. 수종이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미 한밤중에 멋대로 재생된 오하명의 목소리 속에서 상대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을지도 몰랐다.
퍼스트 시티에 의해 봉인된 오하명도 그렇게 기이하고 무시무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퍼스트 시티의 황제가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라고 평가한 핸드폰은 얼마나 더 끔찍하겠는가.
장목화는 저 핸드폰 데이터를 컴퓨터에 복사했다간 컴퓨터 역시 실리카계 서포트 버전 오하명으로 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민하던 그녀가 말했다.
“복사할 필요까지는 없고, 그 번호만 베껴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아비아는 핸드폰 화면을 켜 통화 목록을 불러왔다.
중요한 순간에 정확한 번호를 찾지 못할까 봐 그녀는 그 외의 모든 번호를 다 삭제했다. 덕분에 밝혀진 화면에는 딱 한 사람의 번호만 남아있었다.
「그 사람」
“이건 내가 설정한 이름이야.”
아비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녀가 ‘그 사람’을 친히 눌러주기까지 해서, 장목화는 아무 규칙도 없이 나열된 글자들을 볼 수 있었다.
전에 아비아가 했던 설명대로 이 번호에는 숫자와 부호뿐만 아니라 핸드폰의 일반적인 키보드로는 칠 수 없는 코드도 포함돼 있었다.
장목화는 신중하게 보조 칩에 기록하진 않았다. 혹여나 전기 뱀장어형 생체 의수에 영향이 끼칠까 걱정이 돼서였다. 대신 종이와 펜을 꺼내 일련의 글자들을 있는 그대로 베껴 적었다.
그 사이, 성건우가 새롭게 질문했다.
“할아버님이신 오레이 선생께서 이미 신세계의 대문을 찾았다고 하셨죠? 근데 왜 오레이 선생은 죽기 직전 그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랬다면 수명을 더 많이 연장할 수 있었을 텐데요.”
신세계에 진입한 여러 각성자는 모두 잠들어 있을 뿐,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꼭 신세계에 있으리라 확신할 수 없는 염호 역시 피골은 상접했어도 분명히 살아있는 상태였다.
몇 초간 침묵하던 아비아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몸이 갈수록 나빠지던 때에 몇몇 심복도 신세계로 진입을 권했어. 그때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하셨지. 죽을지언정 가지는 않겠다고.”
한창 번호를 베끼던 장목화가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