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수확
가이우스가 공포로 일그러진 채 쓰러졌거나 온몸의 근육이 풀려 온갖 오물을 흘린 보수파 원로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그때였다.
따르릉-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분명 번호를 누르지 않은 상태였는데도 또렷하게 들렸다.
가이우스는 화들짝 놀랐다. 이런 상태가 계속 이어지면 자신 역시 영향을 받게 될 것이었다.
그는 아직 남은 보수파 원로 십여 명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되찾은 이성과 함께 핸드폰 화면도 원상태로 돌아왔다. 화면에 떠올랐던 블랙홀도 못내 아쉽다는 듯 몇 초간 그 자리를 맴돌다 흩어졌다.
10초 정도 후, 갈라진 액정 화면은 더는 새카맣게 변하지도, 빛을 발하지도 않았다. 가이우스의 귓가를 맴돌던 따르릉 소리도 점차 사라졌다.
꼼짝도 못 하고 있던 감찰관 알렉산더를 비롯한 이들도 그제야 본인 육신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 * *
골든애플 구역, 라운드힐 스트리트 14호, 아비아의 저택.
앵무새의 끈질기고 매서운 입질에 칸나는 눈동자를 살짝 움직이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막았다.
“제기랄, 누구야?”
“네 아빠다!”
앵무새가 유창한 발음으로 대꾸했다.
눈을 번쩍 뜬 칸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겨우 제 처지를 떠올렸다.
“죽고 싶어 환장했지?”
그녀는 애쉬랜드어로 앵무새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친근한 아우라를 발휘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이든 일단 공격당하지 않는 게 제일 중요했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칸나는 이미 청력을 회복한 상태였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제로 잠들게 하는 능력이 있는 각성자 카오가 검은 세단 위에 쓰러져 있었다. 그를 본 칸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저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우리 다 강제로 잠들었었는데. 누가 대체 저 사람을 기절시킨 거지?’
앵무새가 입을 벌렸다.
“네가 나한테 물으면, 난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냐? 바보냐?”
칸나는 아무 욕도 하지 않았다. 국방색 지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엎어진 성건우가 슬슬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미 지나치게 많은 피를 잃어 쇼크 상태에 근접하지 않은 이상, 왼팔에 피가 줄줄 흐르는 상황에 계속 잠들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제적인 꿈의 주인이 이미 마취돼 더는 그 능력의 효과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다들 정상적인 수면 상태로 바뀌어 있었고, 그렇기에 더 쉽게 깨어날 수 있었다.
쿵! 쿵! 쿵!
성건우는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꿈에서 여러 차례 연습했던 것처럼 국방색 지프를 향해 돌진했다.
먼저 오른손을 뻗어 장목화의 왼팔을 잡은 그는 장목화를 여러 번 당겼다. 그런 뒤 허리와 복부에 힘을 줘 검은 세단의 보닛을 딛고 차 지붕 위로 뛰어올라 마취된 카오 옆에 쪼그려 앉았다.
성건우는 왼팔에 생긴 상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그곳에 꽂힌 다용도 군용 칼이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일부 막아주고 있어서였다.
이제 손을 뒤로 돌려 전술 배낭을 푼 그는 안에서 구급상자를 꺼내더니 민첩하게 마취 주사 하나를 만들어냈다. 통풍이 원활한 이 야외에서 마취 가스 효과가 약화되기 전에 적을 완전히 혼절시킬 작정이었다.
마취제가 지나치게 많이 들어갔는지, 혹시 이로 인해 상대의 목숨이 위태로워질지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때, 지프 안에서 깨어난 장목화는 조건 반사적으로 일어나느라 하마터면 핸들에 부딪힐 뻔했다. 그러다 검은 세단 위의 상황을 확인하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아직 재생 중인 스피커를 끄는 것이었다. 모든 상황을 다 장악했는데 갑자기 돌아온 청력에 급한 요의부터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실수를 하게 될지도 몰랐다.
* * *
건물 안의 칸나는 이 광경을 보고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인 후 방 안의 검은 털모자를 쓴 노부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일단 자신의 권총을 주워 옷 안쪽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상대가 느낄 친근함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칸나가 앵무새에게 말했다.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기면 그때 다시 나를 쪼아서 깨워.”
“빌어먹을 무식한 것.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강아지냐?”
앵무새는 거친 말을 내뱉으면서도 칸나의 지시에 성실하게 따랐다. 날개를 몇 번 퍼덕이던 새는 깨진 유리창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이윽고 칸나는 잠든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이 틈을 타 상대를 공격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녀가 자비롭고 착해서가 아니었다.
전에 구조팀과 나눈 대화에서 이번 소란의 배후에 달지기가 하나, 혹은 여럿 연루돼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칸나도 감히 그들의 신도를 멋대로 죽이거나 할 엄두를 내진 못했다.
만약 상대의 죽음이 대응하는 달지기의 시선을 끌어들인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질 것이었다.
이에 칸나는 노부인 옆쪽 팔걸이에 걸터앉아 상태를 면밀하게 살피는 한편 그녀를 물리적으로 잠재울 준비를 했다.
* * *
카오에게 마취제 주입을 마친 성건우는 구급상자 안의 붕대 등을 꺼내 왼팔 상처를 스스로 처치하기 시작했다.
찌직-
팔에 꽂힌 다용도 군용 칼도 뽑고 피에 젖은 옷 일부도 찢어냈다.
“자, 네 애인들.”
지프에서 내린 장목화가 스피커와 휴대용 녹음기를 검은색 세단 위에 올려주었다. 본인 청력이 거의 회복되었으니 성건우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장목화는 백새벽, 용여홍의 곁으로 달려가 그들도 깨워주었다.
두 사람이 깨어나자, 장목화가 상세한 설명 대신 빠르게 말을 뱉었다.
“너희는 포로 좀 보고 있어. 나랑 건우는 아비아 찾으러 갈게. 포로가 깨어나려고 하면 그냥 바로 쏴 죽여버려.”
‘포로라니⋯⋯.’
어리둥절한 용여홍은 검은 세단 위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카오를 본 후에야 자신들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를 사로잡았음을 깨달았다.
“네.”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백새벽은 즉각 검은 세단 옆으로 향했다.
이때 기본적인 상처 처치를 마친 성건우가 웃으며 백새벽을 쳐다보았다.
“너희를 위해서 보험을 좀 들어 둘게.”
성건우는 자신의 피에 물든 옷조각을 카오의 입에 쑤셔 넣었다. 카오는 깨어난 순간부터 강렬한 피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멍한 표정의 용여홍은 문득 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좀 불쌍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덜 모욕적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성건우가 이러한 조치를 취한 덕에 용여홍은 혼수상태에 빠진 적을 지키는 데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입꼬리에 이는 경련을 애써 억누르며 검은 세단을 지나친 장목화는 아비아의 고전적인 저택을 향해 달려갔다. 지금은 분초를 다투는 시기였다.
성건우도 스피커, 휴대용 녹음기, 적의 몸을 뒤져 찾아낸 염주, 목걸이, 금화 등을 전술 배낭에 챙겨 넣고 펄쩍 뛰어 장목화의 뒤를 바짝 따랐다.
* * *
장목화와 성건우는 실제적인 꿈속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집 안을 가로질러 목욕탕 응접실에 이르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직 잠든 아비아와 죽은 하인이 보였다.
급히 아비아를 훑은 장목화는 그녀가 손에 쥔 구식 핸드폰을 발견했다.
장목화는 잠시 망설이다 앞으로 다가가, 통화 버튼 위에 있던 아비아의 손가락을 옆으로 살짝 옮겨놓았다. 그 후에야 아비아를 흔들어 깨웠다.
아비아의 핸드폰을 바로 빼앗지 않은 건 신중한 처사였다. 혹시나 핸드폰이 주인과 분리되었다간 뭔가 좋지 않은 변화가 생길지도 몰랐다.
원래는 아비아가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으면 큰 문제는 없다고, 별로 개의치도 않았겠지만 이미 구세계 콘텐츠를 두루 섭렵해버린 장목화는 어느 것 하나도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각종 기괴한 사건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그녀는 그것이 실제든 허구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뭐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서서히 깨어나려는 아비아를 보고 장목화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나 상대와의 거리를 충분히 벌렸다. 아비아가 놀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무엇보다 제일 중요하게 고려할 것이 있었다.
“넌 이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듣기만 해.”
장목화가 성건우를 보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녀는 또 성건우가 해맑게 하는 농담에 아비아가 불쾌해져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 버릴까 걱정스러웠다.
“중요한 질문이 있으면요?”
성건우가 당당히 반문했다.
“일단 나한테만 조용히 알려줘. 내가 물어볼게.”
장목화는 조그만 빈틈까지도 완벽하게 차단했다.
“네.”
성건우도 얌전히 따랐다.
그때, 아비아가 천천히 눈을 떠 옅은 파란색 눈동자를 드러냈다.
장목화, 성건우를 보게 된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아 뒤로 몸을 웅크렸다. 손에 쥔 핸드폰으로 가슴팍을 막은 그녀는 짙은 경계심을 보였다.
장목화는 일단 선한 미소부터 지었다.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는 부인께 아무 악의도 없고, 부인을 제거하려는 조직 소속도 아닙니다.”
“그럼 당신들은?”
그래도 아비아는 경계를 낮추지 않고 핸드폰 통화 버튼에 손을 댔다.
장목화는 진지하게 얼굴을 굳혔다.
“흠흠, 저희는 반고 바이오에서 왔습니다.”
“반고 바이오⋯⋯?”
아비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래도 두려움이 더 커진 모양이었다.
“⋯⋯.”
장목화도 할 말을 잃었다. 성건우가 무슨 말이라도 해서 이 분위기를 깨줬으면 좋으련만, 역시 그는 언제나처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애써 정신을 차린 장목화가 다시 미소를 그렸다.
“저희는 부인과 대화하고 싶어 왔습니다. 부인의 할아버님 오레이 씨가 어떤 유언을 남겼는지, 부인께는 개인적으로 어떤 바람이 있는지 여쭤보고, 저희가 들어드릴 수 있는 소망이라면 최선을 다해 들어드리겠습니다.”
장목화는 매우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반고 바이오를 대신해 양측에게 모두 도움이 될 합작을 제안한다는 뜻이었다.
아비아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자, 장목화는 얼른 덧붙였다.
“부인께 손대는 건 저희한테도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마침내 아비아가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손으로 촉촉한 금발을 쓸어내리며 약간의 조소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날 퍼스트 시티에서 내보내 줄 수 있나?”
장목화가 웃으며 되물었다.
“원하시는 게 정말 그건가요?”
아비아는 침묵했다. 그녀는 퍼스트 시티에선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를 보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확신했지만, 반고 바이오가 그렇게까지 자원을 들여줄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가치가 없어지면 무정하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퍼스트 시티에서 나고 자라 어언 2, 30년을 살았다. 이미 이곳의 모든 것에 익숙해질 시간이었다. 또한 그녀는 사촌 동생 마커스처럼 야심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장목화는 아비아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빠르게 물었다.
“아시겠지만 외부의 정세는 시시때때로 바뀌고 있습니다.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어떠한 교류도 할 수가 없습니다.”
몇 초간 침묵하던 아비아가 말했다.
“뭘 알고 싶은 거지?”
장목화는 비교적 두루뭉술하게 질문했다.
“부인의 할아버님이신 오레이 씨, 그러니까 맥시미언 선생이 임종 직전에 부인께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아비아가 웃었다.
“아는 게 많네. 난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진짜 이름을 알았는데.”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은 너희한테 뭘 부탁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나서, 일단 말해야 할 것만 말해줄게. 너희가 한 약속은 꼭 지킬 거라 믿어. 하하, 의심할 필요는 없어. 난 일찍부터 다른 사람한테 이 얘기를 해주고 싶었거든. 줄곧 마음속에만 묻어둬봤자 힘들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해서.”
장목화가 신중하게 대꾸했다.
“힘이 닿는 범위라면, 설령 회사에서 부인께 응하지 않겠다 한들 제가 개인적으로라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비아는 죽은 시녀를 보며 잠시 할 말을 정리했다.
“할아버지께선 돌아가시기 직전에 우리한테 진짜 이름을 알려주셨어. 맥시미언 우비노스 브루투스. 그분은 구세계 제3 연구원 수석 과학자셨대.
인공지능, 로봇 전문가셨는데 구세계 파괴전에 한 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했어. 두 개로 나뉜 프로젝트인데, 그중 하나는 인공지능과 도시 운영을 결합하는 거, 또 하나는 실리카계 서포트 칩으로 인간 의식을 모사하여 인공지능을 심화하는 거야. 후자는 승려 교단의 영생인 프로젝트와는 정반대야.
하나는 인간 의식의 존재를 검증한 뒤 특수하게 디자인된 칩에 업로드한 의식을 싣는 거고, 다른 하나는 로봇 영역의 칩을 이용해 가장 좋은 배열 조합을 찾고 칩의 복잡한 전기 신호를 이용해 인간 의식에 가장 가까운 모듈을 모사해낼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거니까.”
“그런 각도에서 보면 승려 교단의 전신도 구세계 어느 연구원이겠네요?”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영생인을 담당하는 지부였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