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벨소리
귀가 웅웅 울리는 폭발음 속, 이미 시력을 회복한 카오는 이성을 찾았다.
뭔가 이상했다. 친한 사이라고 여겼던 친구가 적이 기습하려 하는데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제야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생각해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만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카오는 이 친한 친구의 이름이 뭔지도 알지 못했다.
‘뭔가 이상해.’
수많은 전투를 치러본 카오는 즉각 반응했다. 실제적인 꿈을 거두고, 다시 이 범위 내의 모든 인간 의식을 대상으로 강제 입면 능력을 발휘했다.
칸나는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친근한 아우라를 포기하려다 돌연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렇게 힘없이 두꺼운 카펫 위로 쓰러졌다.
방금 막 눈을 떠 구체적인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가상 세계의 주인, 그러니까 검은 털모자를 쓴 노부인도 재차 잠들었다.
낡은 핸드폰을 쥐고 이를 사용할지 말지 고민하던 아비아도 온몸에 힘이 풀린 듯 1인용 소파 팔걸이에 기댔다. 조금 전 겪었던 모든 게 한바탕 꿈인 양, 한 번 더 깊은 잠에 빠졌다.
개인용 바주카포 사신을 들고 있던 성건우 역시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묵직한 무기를 들고 있던 탓에 속도는 더 빨랐다. 거의 무기에 짓눌릴 듯했다. 이 통증이라면 금방 잠에서 깨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 방면에 빠삭한 카오는 물질 간섭 능력을 더해 얼른 성건우가 쓰러지는 속도를 늦췄다.
결국 거의 흔들림 없이 바닥으로 쓰러진 성건우는 쿨쿨 잠들었다.
또 카오는 잠든 장목화가 전처럼 기이한 방식으로 깨어나지 않게 서둘러 강제 입면을 실제적인 꿈으로 전환했다.
이 모든 작업을 마친 후에야 카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연달아 일어난 변화에 예정된 목표를 완수하지도 못하고 외려 큰일을 당할까 걱정했었다.
몇 번 저항을 거치는 동안 시종일관 선수를 장악한 덕에 약간의 외부적인 영향에 기대 마침내 성공의 희망을 엿볼 수 있게 됐다는 게 다행이었다.
‘아비아는 이미 제거했고, 이제는 출입 암호를 아는 녀석들을 처리해야지. 그 후엔 바로 저택에 들어가 그 위험한 물건을 찾아서 나오자.’
머리를 굴리던 카오는 구조팀의 국방색 지프로 눈길을 돌렸다.
카오의 다음 목표는 장목화, 그리고 성건우였다.
전에 발생한 일련의 뜻밖의 상황은 전부 그 둘이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그 둘을 먼저 제거해야 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카오는 가상 세계의 주인과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게 했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칸나보다, 그 둘이야말로 가장 큰 잠재된 위험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실제적인 꿈을 이용해 수종이라는 꼬마를 불러들일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오는 곧 지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성건우를 응시하며 심장 마비 능력을 가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갑작스럽게 극심한 현기증을 느낀 카오는 생각이 멈췄다.
쿵!
천천히 고꾸라지는가 싶던 그는 결국 검은 세단 지붕 위로 쓰러졌다. 그 충격으로 깨어나는 일도 없었다. 그대로 식물인간이 돼 버린 것만 같았다.
카오가 마지막으로 본 건 국방색 지프 운전석 창문에 걸쳐진 여자의 팔이었다. 밀색 피부로 덮인 왼팔.
* * *
장목화는 청력이 사라지자마자 즉각 카오를 향해 차를 몰았었다. 그리고 잠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차창을 열고 왼팔을 꺼내 전기 뱀장어형 생체 의수로 마취 가스를 방출한 것이었다.
그녀는 적이 청각 박탈을 쓰는 걸 보고, 후각 박탈 능력까지도 예상했다.
특정 냄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각성자라면 대량 학살에 나서거나 그와 비슷한 뜻밖의 상황을 피하려면 사전에 자신의 후각을 막아두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론 후각 박탈의 능력이 없더라도 장목화는 그가 사전에, 혹은 앞으로 자신의 후각을 반드시 둔화시키리라 믿었다. 무엇보다 상대는 지난번 용여홍의 감각 기관 강도를 통제한 적도 있었다.
혹시 상대가 이미 후각을 잃었거나 둔화된 후라면 마취 가스의 냄새도 맡지 못할 것이었다.
장목화는 지프로 세단을 들이받을 때, 바로 직전에 일부러 브레이크를 밟았다. 적은 이미 위로 날아오른 상태라 충돌로 폭발을 일으키려면 어마어마한 운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상황이었다.
또 장목화는 의도적으로 적을 방심하게 했다. 카오가 겁을 먹지 않아야만 이 마취 가스의 영향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는 약간만 떨어져 있어도 마취 가스는 아무 효과도 발휘할 수 없었다.
결국 장목화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카오는 분명 제때 본인 후각을 박탈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각종 조작에 바빠 물질 간섭에 신경 쓸 여력도 없어서 세단 위에 착지한 뒤에야 본인 후각을 박탈했다.
그냥 카오는 각종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계속 마취 가스를 흡입하고 있던 것이다. 본인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성건우가 방금 카오에게 바주카포를 날리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 주위의 가스를 날려버리지 않았다면 카오는 더 일찍 마취되었을 것이다.
이제 아비아의 고전적인 저택 안팎에 자리한 모두는 순간 잠들어 버렸다. 피습격자, 습격자 할 것 없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지금부터는 먼저 깨어나는 자가 제일 큰 주도권을 갖게 될 터였다.
* * *
약간 뜨거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오전, 사방이 극도로 고요한 가운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초록색 앵무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앵무새는 날갯짓하며 욕설을 지껄였다.
“망할 것, 왜 원로원 놈들처럼 바보 같이 굴어? 어째서 앵무새를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이렇게 위험한데⋯⋯.
앵무새의 도덕관념을 믿는 건 괜찮지만 그 입과 머리를 믿어선 안 된다고⋯⋯. 난 내가 하는 모든 더러운 말에 동의하지 않아. 이건 그저 단순한 모방일 뿐이야⋯⋯. 너무 위험해, 너무나⋯⋯.”
욕을 지껄이며 아비아의 저택 3층으로 날아간 앵무새는 주인 칸나의 몸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곤 자신에게 그 수많은 더러운 말을 알려준 주인을 쪼기 시작했다.
카오의 강제 입면은 인간에게만 영향을 미칠 뿐, 동물에겐 효력이 없었다.
* * *
레드울프 구역, 원로원.
창문 밖에 떠오른 갈루란은 초록 눈동자로 아래에 시위 중인 주민들을 응시했다. 그녀는 다른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로부터 시위대의 인파 규모를 줄이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그들을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몰래 숨어있는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했다는 걸 알아챘다. 언제든 습격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하늘이 캄캄해졌다. 눈으로 보이는 범위의 하늘이 어두워졌다.
뒤이어 폭발하듯 나타난 빛이 이 구역을 휩쓸었다.
구세계가 파괴되었을 당시 폭발한 핵폭탄들, 혹은 까만 방에 갑자기 밝혀진 등불의 빛 같달까.
갈루란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건 모든 인간의 본능이었다.
한편, 이 변화로 인해 갈루란의 뒤쪽 원로원 내부에선 베울리스 때문에 울고 웃던 이들이 원상태를 회복했다.
빛은 금세 사그라지면서 의사당 정중앙에 한 인영으로 응집되었다.
장군 제복 차림에 음험한 느낌을 풍기는 매부리코의 소유자, 조금 전 사라진 동쪽 군단 군단장 가이우스였다.
가이우스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약간의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방금의 기이한 변화로 인해 충분한 자신을 얻은 모양이었다.
그의 왼손엔 핸드폰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액정에 금이 간, 아주 낡은 검은색 핸드폰이었다.
가이우스는 그 어떤 이들에게도 반응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듯 민첩하게 번호를 눌렀다.
밝혀진 액정 화면에 번호가 떠오른다거나 이름이 나타나진 않았다. ‘발신 중’이란 단어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내는 건 그 핸드폰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위의 모든 사람과 동물의 귓가에는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벨소리는 곧 멈췄다. 그리고 낡은 핸드폰의 갈라진 액정에 떠올랐던 ‘발신 중’이란 글자는 ‘통화 중’으로 바뀌었다.
그 단어는 마치 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안쪽으로 빨려들었다.
액정 화면은 블랙홀로 변한 듯 화면에 나타난 내용과 주위의 빛을 끊임없이 흡수하기 시작했다.
단 1초 만에 원로원 의사당은 비정상적으로 어두워졌다. 황혼 지나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완전히 떠나간 뒤의 어둠이었다.
그와 동시에 방금 막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던 감찰관 알렉산더를 비롯한 원로들과 하인, 경호원들은 조각상으로 변한 듯, 혹은 꼼짝도 할 수 없는 마법에 걸린 듯 굳어버렸다.
그들의 머릿속에선 멈춘 벨소리가 메아리처럼 계속 울리고 있었다.
무심병에 걸려 모든 이성을 잃었던 베울리스는 고개를 돌려 가이우스를,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잔뜩 충혈된 혼탁한 눈동자 안에서는 두려움의 빛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핸드폰 액정 화면의 블랙홀이 굳었다. 그 안에선 구체적인 모양은 보이지 않지만 묵직한 짝 문이 어렴풋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낡고 망가진 핸드폰은 누가 봐도 매우 가벼운 물건이었다. 하지만 가이우스는 엄청 무거운 것을 든 것처럼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어둑한 환경 아래, 가이우스가 블랙홀 같은 핸드폰 액정 화면으로 베울리스를 겨눴다.
이미 무심병에 걸린 강자는 위험의 냄새를 맡은 듯했다.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그의 몸이 안에서 밖으로 경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충혈되고 혼탁한 그 눈동자는 순식간에 모든 빛을 잃었다.
마지막 두려움의 빛만 그대로 남아 굳어졌을 뿐이었다.
콰당!
앞으로 쓰러지며 바닥에 얼굴을 부딪친 베울리스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생을 말하던 심장도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 그에게 남은 생명의 기운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가이우스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정관 겸 총사령관 베울리스는 무심병에 걸려 위험한 괴물로 변하면서 더는 강력한 정계 영향력을 가질 수 없게 됐지만, 그래도 가이우스는 감히 멋대로 굴 수 없었다.
이 막강한 인물은 무심병에 걸려도 보통 무심자가 아니었다. 현재의 정세를 바꿀 수 있고 심각한 파괴를 일으킬 수 있는 고등 무심자였다.
가이우스는 솔직히 새로운 고등 무심자가 베울리스가 아니었다면 조금 전 원로원 내의 모든 귀족과 하인, 경호원들이 그렇게까지 순순히 그에게 휘말리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 중에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도 여럿 포함돼 있었다. 그들이 제때 전투에 가담했다면 원로원 밖의 상황은 절대 지금과 같지 않았을 터였다.
정말 그랬다면 가이우스도 몰래 이곳에 잠입해 핸드폰으로 국면을 통제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가이우스는 이미 신세계에 진입한 몇몇 거물이 깨어나 승부를 가르기 전, 상황을 더 확실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야 그들을 달랠 충분한 밑천을 마련할 수 있을 터였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가이우스는 핸드폰 화면으로 다른 보수파 원로를 겨눴다.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블랙홀을 마주한 그 원로 역시 소리소문없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가이우스는 보수파 원로들을 하나하나 처리했다. 특히 강한 힘을 가졌거나 영향력 있는 이들을 위주로 노렸다.
보수파 중 심령의 복도 급에 이른 소수의 각성자도 봐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우선 제거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가이우스는 이로 인해 동란 이후 퍼스트 시티의 고위층 실력이 대폭 줄어들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퍼스트 시티의 전체적인 실력보다는 앞으로 자신이 정계에서 안정적으로 버틸 수 있는 게 더 중요했다.
게다가 이번에 가이우스는 여러 교파와 연합하기도 해서, 때가 되면 그들에게 이익을 분배하면서 이 연합을 계속해서 이어가야 했다.
해당 교파 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도 어떻게 보면 퍼스트 시티의 고위층 전력이었다. 적어도 대외의 적에 맞설 때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