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후회하지 않습니다
한편, 한쪽 팔 전체가 붉은 피로 물든 성건우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아비아의 고전적인 저택으로 다가갔다. 적이 주위 상황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카오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생명 천사 목걸이가 빛을 발했다.
카오는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주요 목표 해결. 음, 이제 내 시력도 곧 회복될 거야.”
칸나는 그의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도구를 사용한 것을 보고 아비아가 이미 습격을 받았다는 걸 직감했다.
안색이 어두워진 칸나는 성건우를 향해 카오를 가리켜 보였다. 자신에게 협조해 최대한 빨리 눈앞의 적을 처리하고 아비아를 구하자는 뜻이었다.
성건우도 말뜻을 알아들은 듯 곧장 돌아서 사신 바주카포를 높이 들었다.
동시에 칸나 역시 카오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그 손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지연’이라고 불리는 이 반지는 시선이나 습격에 대한 목표의 본능적인 반응을 지연시키고 상응하는 예감까지 늦출 수 있었다.
주위에 대한 감응력이 둔해진 데다 이 능력까지 더해지면 카오는 바주카포가 제 몸에 떨어진 후에야 그 사실을 감지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물질 간섭 능력을 발휘할 틈이 없었다. 너무 늦었다. 게다가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의 육신은 아직 인간의 한계에 갇혀 있어 기계 승려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약했다.
바주카포는 카오에게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 * *
라운드힐 스트리트 14호, 아비아 저택, 목욕탕 응접실 안.
흰 목욕가운 차림에 금빛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은 아비아는 아까 전 저택의 벽을 강타한 바주카포로 인한 진동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 곁에는 마찬가지로 목욕가운을 입은 시녀 한 명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바들바들 경련 중인 시녀는 숨을 거칠게 헐떡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아비아는 목욕가운 주머니에 꽂아놓았던 왼손을 거뒀다.
그녀의 왼손에는 핸드폰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액정 유리에 이미 또렷한 금이 간, 오래된 은백색 핸드폰이었다.
* * *
레드울프 구역, 원로원.
새카만 오토바이에 앉은 회색 가운 차림의 승려 잔나가는 육도윤회에 빠져 고통에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을 보며 또 한 번 낮게 염불을 외웠다.
이들을 벌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보단 육도윤회를 통해 고통을 느끼고 냉정해지길, 더는 이런 소란에 참여할 힘을 내지 못하길 바랄 뿐이었다.
잔나가는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신 이 세상이 피와 시신으로 덮이지 않길 바라고 있었다. 그가 차별하지 않고 뒤쪽의 아류인 호위대까지 육도윤회에 빠뜨린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다.
잔나가는 자신 역시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흩어질 것을 예견했지만, 여태껏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는 눈앞에 주민 대부분이 육도윤회에 빠져 쓰러지거나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 것을 보고, 이젠 도시 방위군 진영 쪽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더 멀리 있는 시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잔나가 옆쪽에서 돌연 인영 하나가 떠올랐다. 양손에 연합 202를 쥔 인영은 잔나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잔나가가 뭔가를 느끼고 감지한 것은 총성이 울렸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반응에 나서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라 그는 장벽을 만들어 단 하나의 총알만 막았다. 나머지 한 발은 그의 육신을 파고들었다.
순간 허공으로 붕 떠오른 잔나가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영광의 저울 역시 이 소란에 참여한 것인가?’
영광의 저울은 6월의 달지기 황금 저울을 믿는 조직이었다. 그중 모습을 숨기고 예측을 차단하는 능력이 있는 일부 각성자는 애쉬랜드에서 그 누구보다 암살자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곧이어 잔나가는 허공에 피어난 꽃처럼 흩뿌려진 자신의 피를 목격했다.
뒤이어 저도 모르게 어젯밤 시카라 사원으로 돌아간 후 사형 잔제로와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 원각자는 친절한 어투로 거센 노여움을 보였다.
‘자네가 데려온 그들, 도망쳤네! 7층에서 혼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퍼스트 시티의 정세에도 불을 붙이려는 것 같아. 어쩌면 정말로 동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이네!
불필요한 자비를 베푸는 대신 그들을 곧장 질서의 손에 넘겼어야지. 그랬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나? 지난 몇 해 동안 자비를 베풀었다가 고생한 경우가 한두 번이야? 그걸로도 부족한가? 이제 다 후회되지 않나?’
잔나가는 몇 초간의 침묵 후 이렇게 답했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극심한 고통 속, 땅에 굴러떨어지기 직전 잔나가는 저 멀리 몰려드는 주민들을 쳐다보았다. 대충 헤아려보니 잔나가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었다. 잘못 센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것에 대해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눈을 감은 잔나가는 재차 육도윤회를 발휘했다.
쿵!
이내 그는 땅에 처박혔다.
바닥엔 잔나가의 붉은 피가 빠르게 번져나갔다.
* * *
골든애플 구역, 라운드힐 스트리트 14호, 아비아 저택 밖.
성건우는 개인용 바주카포로 검은 세단 위의 적을 겨냥하고 있었다.
칸나 역시 상대가 앞을 보지 못하는 틈에 왼손을 들어 지연 반지를 사용할 준비를 마쳤다.
같은 시각, 목욕탕 응접실의 아비아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
그녀는 카오의 심장 마비 능력에 당하지 않았다.
대신 습격당한 건 그녀의 하인이었다.
어떤 능력이나 물건을 통한 결과가 아니었다. 오늘 아비아의 보호를 맡은 가상 세계의 주인이 사전에 준비한 결과였다.
그녀와 아비아는 둘 다 퍼스트 시티에 동란이 일어나 강자 대부분이 그곳으로 몰려가면 여기가 습격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았다.
구세계 파괴 단서를 없애려는 조직에겐 놓칠 수 없는 기회가 아니던가.
이에 가상 세계의 주인 아네바는 아비아에게 30분 정도 유지될 수 있는 인식 불능 상태를 부여했었다.
이 능력은 깨진 거울 영역으로, 안면 인식 장애, 길치 등의 능력이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이후 변화하며 형성되는 일종의 특수한 효과였다.
적에게 이 능력을 쓰면 목표의 생김새, 특징 등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상응하는 위치와 의식 파동 역시 잊어버리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면 적은 전혀 없는 상대를 목표라 오인하게 되었다.
이 능력은 보호가 필요한 대상에게도 사용 가능했다.
적은 처음으로 목표를 목격하거나 감지할 때는 이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공격하려 할 때는 단절이 되고 방해받게 돼 있었다.
인식 불능으로 목표를 제대로 특정하지 못하니, 적의 공격은 목표 대신 목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향하게 되는 원리였다.
그리하여 아비아의 하인이 아비아 대신 심장마비에 걸린 것이다.
이 가련한 소녀가 꿈에서 내지른 비명은 아비아를 미리 깨우는 데 간접적인 도움도 주었다. 깨진 거울 영역에서 안면 인식 장애와 길치 등은 대가이기도 했지만, 능력이기도 했다.
이는 다른 여러 각성자 영역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한 각성자의 대가 표현 형식은 다른 이들에게는 일종의 능력이 될 수 있었다.
아비아는 쓰러진 하인을 보고 예상한 습격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곧이어 고개를 틀어 손에 쥔 낡은 구식 핸드폰을 바라보던 그녀는 화면을 밝혀 통화 기록을 연 뒤 미등록 번호를 찾아냈다.
그 후로 그녀는 그 번호를 누를지 말지 한참을 망설였다.
아비아는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이 번호에 전화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게 자신한테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할아버지, 퍼스트 시티의 황제 오레이가 죽기 직전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에게 했던 말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더 이상 수리가 불가할 때까지는 절대 이 핸드폰을 포기하지 마라. 다른 방법이 없을 때까지는 절대 그 번호를 누르지 마.’
갖가지 생각이 오가는 와중 아비아의 시야가 돌연 캄캄해졌다. 그러나 의식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저 깊은 밤이 미리 찾아온 듯 방 안의 각종 가구도 어렴풋하게 보였다.
적어도 시각을 잃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순간 아비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아니, 목욕탕 응접실은 원래 창이 없잖아. 항상 불을 켜놓는데.’
절대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밤이 미리 찾아온 듯한 느낌은 성건우와 칸나를 비롯한 모두가 그랬다. 전부 시야의 방해를 받고 있었고, 주위 사물의 윤곽 정도만 보일 뿐이었다.
카오에게 영향을 미칠 준비를 하던 칸나는 사방을 한번 둘러보며 변화의 근원을 찾았다.
다음 순간, 허공에서 돌연 순수하고 찬란한 빛이 폭발하면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 어둠을 몰아냈다.
자극적인 빛에 칸나와 성건우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시각을 박탈당한 카오의 시야 역시 새하얗게 밝아졌다.
이렇게 찬란한 빛이 사라졌을 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앞을 보지 못했던 카오는 그 자극으로 인해 예상보다 일찍 시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비로소 바주카포로 자신을 겨눈 성건우를 발견했다.
성건우와 카오의 시선이 부딪힌 순간, 성건우는 방아쇠로 인사를 건넸다.
칸나와 협조할 때를 기다릴 순 없었다. 카오는 이미 주위 광경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콰릉!
근거리에서 쏘아진 바주카포는 아주 살짝 빗겨나간 상태로 폭발했다.
그러나 카오 주위로 보이지 않는 장벽이 세워져 격렬한 여파를 막았다.
카오는 휘청이면서도 때맞춰 깨어나 대응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바주카포에 어떠한 대처도 하지 못하고 적중당했을 때의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 * *
북안 불모지.
한명호, 정도연, 게네바는 레드리버 다리 쪽 상황을 면밀하게 관찰하며 주위의 퍼스트 시티 강자들과 정규군이 얼마나 돌아왔는지 가늠했다.
그때, 그곳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 대량의 도시 방위군이 보였다.
격렬한 춤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멍한 표정을 드러냈겠지만, 이 셋은 방관자로서 초봄 마을에서의 그 기이한 전투를 경험했던지라 무덤덤했다.
“초봄 마을을 지키던 그 강자도 온 건가?”
한명호가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그런 능력을 가진 강자가 딱 한 명뿐이리라는 법은 없었다.
망원경 없이 한동안 그곳을 진지하게 살피던 게네바가 말했다.
“춤의 박자로 멜로디를 그려보면 초봄 마을의 그 사람이 사용한 것과 같은 곡이다. 공교로운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아. 일단은 그때랑 같은 사람일 거라 판단한다.”
조용히 게네바의 분석을 듣던 정도연이 물었다.
“그럼 초봄 마을 방어력은 최저 수준으로 낮아졌다는 거지?”
“응.”
게네바가 단호하게 답했다.
역시 고개를 끄덕이던 한명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기회야.”
게네바가 이의를 제기했다.
“큰 흰둥이 팀을 기다리지 않겠다고?”
“언제쯤 도시에서 나와 우리랑 합류할 수 있겠어?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는데.”
한명호가 이유를 댔다.
사실 게네바의 분석 결과도 그랬다. 지능 로봇으로서 지나치게 프로그래밍화 된,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융통성 없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 전의 계획을 강조했을 뿐이었다.
망설이던 정도연이 말했다.
“나도 동의해. 음, 한명호한테.”
사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초봄 마을에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과연 구조팀 없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실력이 부족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때, 게네바가 눈에 붉은빛을 번득이며 대꾸했다.
“좋아, 그럼 지금 바로 초봄 마을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