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화. 깨어나다
같은 시각, 개인용 바주카포를 멘 성건우는 조용히 검은색 세단 위에 선 카오를 향해 다가갔다.
동시에 성건우는 바주카포로 아비아의 저택 3층과 활짝 열린 어느 창문, 그 안에 잠든 칸나와 노부인을 겨눴다.
마이어스의 집에서 한담을 나눌 때 구조팀은 칸나에게 전에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공유했었다. 또한 그 비밀 조직이 이 기회를 틈타 아비아를 제거하려 할 수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양측이 강제 입면과 실제적인 꿈에 어떻게 대항할지 토론하는데, 칸나가 자신이 가진 물건으로 치명적인 위험을 감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걸 이용하면 비슷한 습격을 받아도 우렁찬 경보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성건우는 그 말대로 칸나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하려 했다.
바주카포 포구가 칸나에게 향하고 성건우가 방아쇠에 손가락을 얹음과 동시에 칸나의 옷 아래 있던 목걸이가 빨갛게 달아오르며 뜨겁게 타올랐다.
그러자 칸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목걸이를 통한 감지 능력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성건우의 모습이, 당장이라도 포탄을 뿜어내려는 바주카포와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보였다.
“제기랄!”
칸나의 입에서 애쉬랜드어 욕설이 튀어나왔다. 매우 유창한 발음이었다.
그녀는 성건우가 치명적인 위협을 하며 자신을 깨웠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까지 선을 넘으려 할 줄은 몰랐다.
의식을 잃고 잠들어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던 칸나에게는 권총만 해도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근데 돌격 소총도 아니고, 무려 개인용 바주카포를 든다고? 진짜 날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욕설을 뱉음과 동시에 칸나의 옅은 파란색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칸나의 눈이 반짝이자마자 정말 포탄을 날릴 준비를 하던 성건우는 순간적으로 칸나가 좋은 친구란 사실을 자각했다.
우호적인 사람에게 무력을 쓸 이유가 없었다. 서로 잘 지내야 했다.
‘아니야, 좋은 친구니까 바주카포로 깨워야 하는 거지.’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성건우가 방아쇠를 당겼다.
눈빛이 그대로 굳은 칸나가 다시 속으로 걸쭉한 욕을 내뱉었다.
‘저런 씨……!’
지금 장목화가 이 말을 들었다면 구조팀을 안내한 앵무새가 왜 그렇게 입이 걸었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앵무새의 비밀이 풀린 순간이었다.
이때 이미 아비아에 집중하고 있던 카오 역시 몸을 틀어 칸나와 가상 세계의 주인이 자리한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는 각성자 능력과 관련된 일종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는 지금 아무것도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눈은 목표 구역에 정확히 닿아있었다.
그 후 창문 쪽으로 한 손을 뻗은 카오가 발사된 로켓포의 방향을 틀어 저택 벽으로 날렸다.
콰르릉!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순간 카오는 그곳에 있는 이들이 자신의 친구라고, 그 친구들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 * *
레드울프 구역, 원로원.
갈루란은 아래쪽에서 죽거나, 크게 다치거나, 육도윤회에 진입한 사람들을, 또 각기 다른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과 아류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로원 안에서 울리는 웃음과 울음소리 속에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일종의 충동이 일어났다.
눈 깜짝할 사이, 그녀의 머릿속에 하나둘 생각이 피어올랐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를 고등 생물이라 칭하지만 세상과 운명 앞에는 거친 바람 속 낙엽처럼 이리저리 나부낄 뿐, 떨어질 곳 하나 결정할 수 없어. 난 이렇게나 약해서 운명의 계획에도 저항할 수 없고.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야. 집정관이 이미 아무 지능도 없는 무심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내 능력으로는 저 사람한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했겠지.
저 사람이 내 존재를 무시하게 만들고, 나한테 능력을 쓰지 못하게 막지도 못하고 원래 같았으면 나도 지금 웃고, 또 울고 있었겠지.
밖에서 싸우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들은 다 나보다 강해. 내가 무턱대고 이 상황에 끼어들어봤자 사람을 구하긴커녕 나까지도 위태로워지겠지.’
넘쳐흐르는 생각 속, 몇 초간 멍하게 있던 갈루란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그녀의 얼굴 위로 자조적인 웃음이 번졌다.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어떠한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만족해야지⋯⋯.”
눈을 감은 갈루란이 창문을 열기 위해 앞으로 손을 뻗었다.
이 순간의 그녀는 맞은편의 앳되고 순수한 얼굴의 소녀를 만난 듯, 뻗은 손 역시 창문이 아닌 자신에게 맞서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 * *
골든애플 구역, 카스가 잠든 밀실 안.
백발의 노인은 느릿하게 흰 셔츠를 입고 소매 단추를 잠갔다. 무슨 시기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사방에 드리워진 커튼은 어느새 한 줄기 틈을 내듯 걷혀서, 그 틈 사이로 밝은 빛이 스며들었다.
뒤쪽 벽 위, 노인의 검은 그림자 역시 셔츠의 소매 단추를 채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너무나 커서 위로는 천장에 닿아있고 아래로는 카펫을 다 덮을 지경이었다.
셔츠의 소매 단추 정리를 마친 검은 인영은 햇빛이 스미는 커튼 틈새로 고개를 돌렸다. 시간을 가늠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던 그때, 그는 짙은 갈색 눈동자 한 쌍을 목격했다.
다음 순간, 이 눈동자의 주인은 벽난로와 유리창을 그대로 관통하며 매우 기이하게 밀실로 들어왔다.
180센티미터에 약간 못 미치는 키, 품이 낙낙한 검은색 가운, 길게 기른 검은색 머리와 우아한 수염. 그리고 나이가 대략 마흔 살 정도 된 듯한 남자였다. 다름 아닌 자칭 골동품 학자 이두형이었다.
“너⋯⋯.”
백발노인과 그 뒤에 딸린 검은색 그림자가 동시에 소리를 냈다.
이두형은 허리를 살짝 굽히고 기침을 한번 하더니 웃으며 호응했다.
“난 많은 것들을 잊었지만 너희들의 애쉬랜드 진입을 막고, 이미 온 자는 돌려보내는 것이 내 책임이라는 것만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약간의 빛만 새어 들어오던 이 밀실에 작열하는 태양이 떠오르는 듯했다.
* * *
골든애플 구역, 라운드힐 스트리트 14호, 아비아 저택.
바주카포 포탄이 어느 정도 떠밀려 나가며, 마찬가지로 물질 간섭을 준비 중이던 칸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방면에서 그녀의 능력은 사실 카오와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칸나도 각성자 능력을 발휘하는 중이라 물질 간섭 능력을 완전히 발휘할 순 없었다. 혹여 바주카포를 제대로 떠밀지 못해 여파에 휩쓸릴까 매우 걱정했었다.
칸나가 지금 유지 중인 능력의 이름은 ‘친근한 아우라’였다.
어떤 동작이나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일정 범위에 진입하기만 하면, 칸나는 지능이 낮지 않은 모든 생물에게 호감을 살 수 있었다.
이 능력은 칼날을 세우고 맞서야 하는 상대와도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눌 수 있게 했다. 너무 강력한 능력이라 칸나는 가상 세계에 진입한 후에도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더는 상대를 경계할 필요도, 대비할 필요도 없이 가상 세계를 해제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다 이 능력 덕분이었다.
만약 카오가 멀찍이서 강제 입면을 발휘하고 실제적인 꿈으로 전환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칸나의 친근한 아우라를 무력화하지 않았다면, 카오는 이 근처에 이르자마자 칸나에게 일정 정도 호의를 느꼈을 것이다.
성건우의 치명적인 위협으로 꿈에서 깨어난 칸나는 가장 먼저 친근한 아우라를 발휘했다. 물질 간섭으로 바주카포에 대응하는 건 나중 문제였다.
친근한 아우라를 이용한 적대심 해제, 이건 이 같은 상황에 언제나 효과를 발휘했던 만병통치제나 다름없었다.
다만 머리에 문제가 있는 성건우는 분명히 호감을 느꼈는데도 방아쇠를 당겼고, 이에 칸나는 하마터면 욕설을 내뱉을 뻔했었다. 마침 이제야 친근한 아우라에 영향을 받은 카오가 그녀를 도왔기에 망정이었다.
친근한 아우라, 이 능력은 에이돌른 영역에 속했다. 경계심과는 정반대인 매우 강력하고 유용한 이 능력은 수많은 문제를 해결해주지만 모든 능력이 그렇듯 만능은 아니었다.
이 능력에는 아주 또렷한 결함이 하나 있었다. 능력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었다.
즉, 칸나는 다른 사람을 우호적으로 만든 뒤에 곧장 능력을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는 가까스로 만든 친근감만 없애는 꼴이었다.
친근한 아우라는 각성자가 해당 능력을 유지하지 않아도 일정 시간 효력을 발휘하는, 심지어 반드시 상반되는 조건을 마주했을 때나 해제되는 추리 광대나 강제 입면 등의 능력과는 달랐다.
능력이 중단되는 순간, 목표는 원상태로 돌아왔다.
그 때문에 칸나는 친근한 아우라를 쓸 땐 다른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 방면의 효과를 포기하려는 게 아니면 계속 친근한 아우라에만 집중해야 했다. 이런 상태엔 발휘할 수 있는 물질 간섭 능력은 3분의 2 수준으로 약화됐고, 가진 도구나 휴대한 권총을 사용하기도 불편해졌다.
콰릉!
멀지 않은 벽에 떨어진 바주카포로 인한 충격에 유리창은 여러 장이나 깨져버렸고 온 건물 전체가 몇 번 진동했다.
칸나는 고개를 돌려 검은 털모자를 쓴 노부인을 바라보았다. 속눈썹이 움찔거리는 걸 보니, 그녀 역시 머잖아 깨어날 것 같았다.
칸나는 계속 친근한 아우라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그녀가 창문 너머의 카오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오래된 친구처럼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나한테 아비아랑 얘기할 시간 좀 줄래?”
눈의 초점을 잃은 카오는 인간 의식에 대한 감응을 따라 아비아의 고전적인 저택을 향해 다시 돌아섰다.
지금 그는 칸나에게 호감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임무와 직책을 잊은 건 아니었다.
“안 돼. 네가 아비아랑 접촉하고 뭔가를 묻는다면 난 너 역시 죽여야 해. 친구라면 날 곤란하게 만들지 마.”
개인용 바주카포 사신을 든 성건우는 그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청력을 박탈당한 상태로, 아무것도 들리는 게 없어서였다.
그저 그는 상대가 얘기하는 모습에 예의 바르게 호응한 것뿐이었다.
칸나 역시 카오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듣지 못했다. 그저 상대의 태도와 반응을 통해 자신의 요구를 거절했으리라 추측했을 뿐이었다.
이미 아비아를 겨냥한 적이 그녀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직감한 칸나는 황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아비아가 가진 위험한 물건이 뭔지 알아? 위험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질문을 하며 창가로 다가간 칸나는 성건우를 향해 손동작을 취했다. 자신이 적을 잡아끄는 사이 저택에 잠입해 아비아를 구조하라는 뜻이었다.
물론 단순한 손동작으로 이렇게 구체적인 의미까지 전달하긴 어려웠다. 성건우와 칸나는 오래도록 팀워크를 맞춰온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칸나는 손으로 저택 쪽을 가리키며 성건우가 제 뜻을 알아듣길 바랐다.
칸나는 외부로 파견돼 많은 경험을 한 반고 바이오 직원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도는 충분히 알 거라 여겼다.
다만 그녀는 잠에서 깨어난 성건우의 머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서, 자신의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할 가능성까지도 생각했다.
만일을 위해 칸나는 적을 이용해 적을 치는 방법도 실행에 옮겼다.
옷 안쪽에 숨겨둔 권총 한 자루를 뽑아, 바로 노부인에게 던졌다.
탁!
권총에 맞은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몸을 바르르 한 번 떨었다.
그와 동시에 카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잘은 몰라. 아비아에게 절대 그 물건을 사용할 기회를 주면 안 된다는 것만 알 뿐이야. 이야기는 그만하고, 아비아랑 마커스에게 출입 암호를 알아낸 놈들 빨리 해치우고 같이 애프터눈 티나 마시자. 아, 아직 오전이지? 그럼 점심이나 같이 할까?”
“그래, 그래.”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칸나는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