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91화 (491/649)

491화. 육식주(六識珠)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도 없고, 상대가 뭐라고 외쳤는지 듣지도 못했지만 장목화는 이것이 각성자 능력의 영향이리라 직감했다.

그녀는 가장 먼저 감각 기관을 통제할 수 있는 여명 영역을 떠올렸다. 여명 영역 각성자는 촉감을 예민하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청각을 감퇴시켜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그 추측을 바로 부정했다. 카오는 전에 자신들을 습격했을 때 수종이의 쉬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한 적이 없었다.

그럼 이는 카오의 능력이 아닌 도구로 발휘한 능력이란 결론이 나왔다.

여태 그 도구를 쓰지 않은 건 안전을 위해 멀리 숨어있느라 그 도구의 영향 범위까지 거리를 좁히지 못한 것일 테고, 또 특정 조직에 속한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라면 본인 능력과 중복되는 도구를 사용하진 않을 것이었다.

이로써 장목화는 깔끔히 판단을 내렸다.

적은 보리 영역의 청각 박탈을 발휘한 것이었다.

물론 확신할 순 없었다. 장목화가 지금껏 경험한 각성자 능력과 아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알 수 있는 건 여명과 보리 영역이 청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뿐이었다. 후자도 성건우가 말해준 것에 불과했다.

‘만약 청각 박탈이라면 앞으로 시각 박탈과 후각 박탈 능력이 이어질 가능성이 커. 나한테 후각 박탈 능력을 발휘한 저 사람에겐 아무 약점도 없나?’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장목화는 아직 잠들기 전의 틈을 타 오른손으로 핸들을 확 꺾어 검은 세단을 비스듬히 추격했다.

동시에 왼손으로 주먹을 쥔 그녀가 차창 버튼을 눌렀다.

순간 뒷좌석의 성건우가 눈을 번득였다.

뒤이어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내려놓은 그는 다용도 군용 칼을 꺼냈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 피비린내를 풍기려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작은 스피커도 챙기고, 사신 개인용 바주카포를 어깨에 멨다.

더불어 지프가 원래 자리해 있던 곳에선 청력은 잃었어도 이미 깨어있던 백새벽, 용여홍은 동시에 군용 외골격 장치의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방향을 튼 지프는 검은 세단 옆으로 질주했다.

카오는 상대와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진 것을 보고 다시 차를 틀어 피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빠르게 결단을 내린 그는 차 문 안쪽 문고리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휙~

바람 소리와 함께 차 문은 보이지 않는 힘에 열려버렸다.

따라 몸을 날린 카오는 마치 헬륨 풍선처럼 허공에 기이하게 떠올랐다.

쾅!

두꺼운 장갑을 덧댄 지프는 세단 측면을 들이받으며 길가로 몰아붙였다.

이 충격은 카오의 예상보단 훨씬 덜했다. 장목화가 마지막 순간에 브레이크를 밟았기 때문이었다.

허공에 떠오른 카오는 몰래 웃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모질진 못하네. 함께 죽을 각오까지는 없었나 봐.’

그가 두려워한 건 충돌로 차가 폭발해 피할 틈조차 사라지는 것이었다.

* * *

요란한 충돌음 속, 고전적인 저택 목욕탕 응접실에는 목욕가운을 입은 아비아가 1인용 소파에 앉아있었다.

전의 경보음에 놀라 깨어난 그녀는 마침내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 후 그녀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아비아는 아까 전 원로원에서 총성과 폭발음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자신 역시 습격을 당할까 걱정했지만, 지금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저 그녀는 목욕가운 주머니에 왼손을 넣고 다시 잠들어 버렸다.

* * *

허공에서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어 다시 검은 세단 위로 착지한 카오는 또 한 번 주위의 모든 이들을 잠재웠다.

주위 사람들 청각을 박탈한 덕에 한결 더 편하게 잠재울 수 있었다.

원래 그의 목표는 구조팀, 칸나를 비롯한 이들을 재움과 동시에 청각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에 거슬리는 경보음이 그치지 않는 통에 청각을 완전히 박탈하기 전까진 목표들을 재우기가 쉽지 않았다.

어차피 거슬리는 소리에 계속 깨어날 텐데, 괜한 힘만 들이느니 일단은 외재적인 영향을 제거한 뒤 강제 입면을 발휘하는 것이 나았다. 그래야 힘도 아끼고 뜻밖의 상황도 미리 방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허공에 떠 있으려면 물질 간섭에 집중해야 했는데, 카오도 두 능력을 동시에 발휘하는 건 어려웠다.

이런 선택에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었다. 가장 큰 단점은 장목화가 지프로 세단을 칠 시간을 주었다는 점이었다.

카오는 이번 역시 한순간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강제 입면 능력을 실제적인 꿈으로 전환했다. 이미 백새벽과 용여홍이 요란한 금속음을 내며 다시 쓰러지는 걸, 칸나와 노부인이 눈을 뜨지 못한 걸 다 확인한 상태였다.

또한 그는 조금 전 강제 입면 상태에서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벗어났던 장목화가 실제적인 꿈에선 스스로 깨어나지 못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한 잠재된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선 실제적인 꿈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

뒤이어 카오가 왼손으로 또 하나의 구슬을 굴리며 낮게 외쳤다.

“후각 박탈!”

청록빛이 번득이는 가운데 카오는 어떠한 냄새도 맡을 수 없게 됐다.

이번 후각 박탈 대상은 자신이었다. 이어질 대량 살육을 위한 준비였다.

꿈에서의 배설물과 피에 대해선 고려하지 않았다. 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상 카오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알지 못했고, 그로 인한 생물적인 반응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육식주라는 이름이 붙은 이 도구는 카오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평소에는 최대한 사용을 아꼈다.

육식주는 강제 입면과 실제적인 꿈의 교란을 방지하는 능력을 높이고, 대가는 최대한 없애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물건이었다. 본래 여명 영역의 능력으론 감각의 증폭과 약화만 가능할 뿐, 제거는 불가능했다.

이 육식주는 심령의 복도에 있는 어느 방에서 직접 찾은 게 아닌, 카오가 조직 내 어느 동료와 교환한 물건이었다. 또 이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한데 결탁하거나 조직에 가입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탐색을 통해 얻은 도구가 꼭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란 법은 없었다. 때로는 본인의 대가와 충돌하는 관계로 사용하는 게 오히려 위태로워져서 애초에 쓸 수 없는 물건도 있었다.

하지만 같은 조직에 비슷한 급의 각성자가 많다면, 서로 얻은 물건을 교환하는 식으로 도구 활용의 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카오는 이 육식주의 진짜 주인이 이미 신세계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그만큼 육식주는 지나치리만큼 강력했다.

영향 범위 방면에선 다른 물건들처럼 최대 80미터를 넘진 못했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일반적인 물건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카오가 알기론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뒤, 각성자의 세 능력은 서로 다른 단계에서 어느 정도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 다들 각기 다른 선택을 했다.

예를 들어 청각 박탈로 보자면 어떤 이의 경우에는 영향 범위 내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고, 어떤 이의 경우에는 시각 박탈이나 후각 박탈 등의 능력과 융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육식주는 두 방면을 모두 다 겸비했다. 고체화된 기운으로 만들어진 물건의 효과는 원래 능력보다 훨씬 떨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육식주의 원주인이 얼마나 대단했을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다시 스스로를 단단히 보호한 카오는 라운드힐 스트리트 14호, 그 고전적인 저택에 재차 집중했다. 오른손으로 생명 천사 펜던트를 움켜쥐고, 아비아를 특정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아비아가 아직 원래 자리에 잠들어 있는 이때, 그녀의 의식을 특정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카오는 약간의 판별 끝에 준비 작업을 완료했다.

그런데 갑자기 카오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시야가 온통 새카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각을 잃은 것이었다.

* * *

지프 안.

잠들어 있어야 할 성건우는 어느새 눈을 번쩍 뜨고 있었다.

그는 왼 손목에 했던 맹목의 고리를 빼 뒷좌석 가운데에 던져뒀고, 지금 왼팔엔 다용도 군용 칼 하나가 꽂혀 있었다.

칼이 꽂힌 성건우의 왼팔에선 피가 마구 흘러내렸다.

성건우가 완벽하게 의도했던 상황이었다. 그는 혹시 자신이 잠들게 되면 기울어질 쪽에 일부러 칼을 거꾸로 놓아두었다.

카오가 또 한 번 강제 입면을 발휘해 실제적인 꿈에 들게 되면, 힘이 풀린 성건우의 몸은 거꾸로 꽂아둔 군용 칼에 찔리게 될 것이었다.

역시 성건우가 예상했던 대로 왼팔을 다쳤고, 이 자극에 성건우는 순간적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난 성건우는 즉각 997번 방안을 실행에 옮겼다. 그가 이번에 세운 방안은 996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성건우는 일단 맹목의 고리로 카오의 눈을 멀게 한 뒤, 맹목의 고리를 풀고 자신의 의식을 거두었다. 상대에게 감지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각성자들은 보거나 듣는 등 현실적으로 접촉한 적이 있거나 서로에게 능력을 발휘한 적이 있다면, 상대에게 본인 의식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성건우는 맹목의 고리로 적의 시각에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맹목의 고리를 멀리 떼어놓기만 하면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럴 경우 시력 상실 효과가 유지되는 시간은 대폭 줄어들었다. 그래도 곧장 사라지는 것까진 아니었다.

성건우는 현재 실제적인 꿈에선 벗어났지만, 청력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곧 카오가 시종일관 육식주를 쥐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가 앞으로 또 시각 박탈 능력을 발휘하더라도, 성건우에게 의식을 감출 순 없을 것이었다.

뒤이어 성건우는 용여홍이 뒷좌석 가운데 자리에 놓아둔 전술 배낭을 반대편으로 차고 그쪽 문을 열어 밖으로 굴러서 나갔다.

그 사이 그는 다친 왼손으로 스피커 전원 버튼을 눌렀다.

이로 인해 카오는 구조팀의 차 안에서 일련의 움직임이 발생했음을 느꼈다. 양쪽 문을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도 들렸지만, 앞이 보이지 않아 누가 어떻게 깨어나 어떤 쪽 문으로 내렸는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오로지 청각과 기억력에 의지해 목표를 찾느라 그는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 순간에도 성건우의 왼팔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왔다. 옅은 파란색 캔버스 옷이 암적색으로 물들고 있지만, 카오는 지금 본인 후각을 박탈한 덕에 이 짙은 피비린내를 맡지 못했다.

그라면 차오르는 구역감에 곧장 자리를 뜰 수밖에 없는 냄새였다.

다음 순간, 휴대용 녹음기와 연결된 스피커에서 수종이의 쉬 소리와 합성된 음악이 흘러나왔다.

물론 성건우는 그것을 듣지 못했다. 그가 스피커를 켠 건 더 많은 소리를 내서 자신의 동정을 숨기기 위한 것이지, 쉬 소리가 적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는 아예 관심 밖이었다.

음악이 흐르는 와중, 성건우는 다친 왼팔을 보조로 삼아 오른손의 힘만으로 사신 개인용 바주카포를 들어 올렸다.

앞을 볼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음악 소리에 들리는 소리도 온전치 못한 상황에 카오는 점점 초조해졌다. 구조팀이 꼭 바퀴벌레 같았다. 분명 작고 약한데도 쉽게 처리도 안 되고 수시로 나타나 혐오감까지 유발했다.

그래도 마음을 다스린 카오는 차 안에 깨어난 자가 누구든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빨리 심장마비 능력을 이용해 목표를 하나씩 처리하자고 다짐했다.

카오는 상대가 자신을 방해하거나 공격할 것을 충분히 예상했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걸 지켜보던 자가, 자신이라고 그냥 내버려 둘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둘 사이의 연계가 생기니 상대는 절대 의식을 숨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카오는 짧은 초조함을 겪으며 시력도 머지않아 돌아올 테니 그렇게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가 이 틈을 타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 한들 크게 걱정할 것도 없었다. 생명 천사 목걸이를 사용하는 와중에도 물질 간섭 능력은 아무런 문제 없이 한계치까지 발휘할 수 있었다.

약간 조정을 거친 카오는 재차 주요 목표인 아비아에 집중했다. 그는 분노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과 뒤로 미룰 수 있는 일을 정확히 구분해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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