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모든 것을 털어놓다
창가에서 벌어진 이 상황을 목격하고, 아래쪽 주민들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중요한 순간, 가이우스는 마이크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집정관이 다른 원로를 습격했습니다! 집정관이 구세군에 통제됐습니다! 주민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이 모든 것을 막아야 합니다!”
폭발 직전의 상태였던 주민들의 감정이 순간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밀물처럼 도시 방위군을 향해 몰려들었다.
도시 방위군은 원로원을 등지고 있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몰랐지만, 그 안의 동정을 느끼고, 가이우스의 외침을 들을 수는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망설이기 시작했다.
결국 방폭 방패들로 이루어진 장벽이 뚫려버렸다.
현장을 지휘하던 듀카스는 이 광경을 보고 허겁지겁 핸드폰을 들어 포카스에게 지시를 부탁했다.
몇 초간 침묵하던 포카스가 말했다.
“중립을 유지하도록.”
원로원 곳곳에서 무너져 내린 도시 방위군을 목격하고, 아류인 호위대 구성원들은 몹시 긴장했다. 두려움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공포는 곧 동기로 작용해, 분분히 방아쇠를 당기게 됐다.
탕! 탕! 탕!
콰릉! 콰릉! 콰릉!
주민 수십 명이 피를 뿜거나 초연에 휩싸인 채 쓰러져갔다.
하지만 다른 주민들은 이에 놀라기는커녕 더욱 과격하게 달려들었다.
이미 발포까지 시작한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몰을 비롯한 사람들은 곧장 대규모 살육을 준비했다.
이때, 인파 속 가이우스가 오른손을 들어 코와 입 사이에 댔다.
그와 동시에 아류인들은 발포할 수가 없어졌다. 후천적으로 학습해 얻은 기술을 한순간 다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 * *
골든애플 구역, 엠퍼러 스트리트 15호.
한동안 구조팀과 한담하던 칸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총성과 폭발음을 듣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아비아를 찾으러 가도 되겠네.”
장목화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더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요?”
그녀는 충돌이 더 격렬해지기를, 그래서 모든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원로원 쪽으로 몰려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칸나가 미소를 지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아비아와 감히 접촉할 엄두를 못 내는 건, 그 사람이 가상 세계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가 아니야. 가상 세계의 주인과 얽히면 퍼스트 시티의 다른 강자들이 단숨에 몰려들기 때문이지.
근데 지금 그 사람들 신경은 원로원에 쏠려 있어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진 못할 거야. 가상 세계의 주인은, 내가 맡을게.”
가상 세계 주인을 어떻게 맡을 것인지는 칸나도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으며, 장목화도 굳이 따로 묻지 않았다. 상대의 비밀과 관련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장목화는 그냥 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를, 구조팀을 칸나에게 보낸 반고 바이오를 믿어보기로 했다.
‘적어도 회사는 칸나가 가상 세계 주인한테 대항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마도 가상 세계 주인과 상극인 능력이 있는 건지도 몰라.’
아비아, 마커스의 보호를 맡은 것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단 한 사람일 가능성은 희박했다. 분명 여럿이 공통으로 가상 세계란 능력을 장악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아비아와 마커스의 일정을 혼자 매일 감당할 순 없었다. 정신력 문제 때문이기도 했고, 능력의 영향 범위에 따르는 한계 때문이기도 했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단 한 사람이 온 도시에 영향을 끼칠 순 없었다. 심지어 한 구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장목화 자신이 거울 교파 고위층이라도 가상 세계 능력을 장악한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네다섯 명에게 교대로 마커스, 아비아 보호를 맡길 것 같았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혼자 매일 쉬지 않고 24시간 내내 아비아, 마커스를 보호하는 건 현실성이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일주일, 한 달 정도야 아무 문제 없이 지낼 수도 있겠지만, 이 임무의 기한은 10년 단위로 이루어졌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달지기가 아닌 이상에는 이렇게 고강도의 작업을 이어갈 순 없었다.
게다가 이미 심령의 복도에 진입했고 가상 세계 능력을 장악한 자라면, 애쉬랜드의 어디를 가더라도 강자 취급을 받으며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휴일도 없이 죽을 때까지 굴려지기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죽을 때까지의 주어는 가상 세계의 주인이 될 수도 있지만, 아비아나 마커스가 될 수도 있었다.
장목화는 아비아의 보호자가 치른 대가가 폐소 공포증이라 단정 짓진 않았다. 보호자가 정말 한 명이 아닌 여럿이라면, 각성자 능력이 하나 혹은 두 가지쯤은 비슷할 수 있어도 대가까지 같진 않을 터였다.
구조팀의 운이 끝내주게 좋다면, 그래서 마침 오늘 아비아의 보호를 맡은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전의 그자라면, 맹목의 고리를 이용해 그를 기겁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니면 결국 믿을 곳은 칸나뿐이었다.
짝짝짝!
성건우의 박수 세례에, 칸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 거지?”
성건우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말씀을 정말 잘하시네요. 그리고 우린 이미 친구가 됐다고 생각하는데.”
칸나는 웃으며 문으로 향했다.
“얼른 가자. 원로원의 소란이 끝났는데도 라운드힐 스트리트에 도착하지 못하면 우린 웃음거리가 될 거야.”
라운드힐 스트리트 14호는 아비아가 사는 곳이었다.
장목화는 얼른 일어나 걸음을 옮기며 세심하게 물었다.
“알아서 가시겠어요, 아니면 저희 차에 함께 타시겠어요?”
칸나가 웃으며 반문했다.
“설마 내가 알아서 그곳까지 뛰어가기를 바라는 거야? 사실 억지로나마 떠오를 수는 있는데, 날 수 있는 정도까진 아니야.”
칸나는 아주 겸손하고 친근했다.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라기보단 그냥 구조팀원들보다 몇 살 많은 언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장목화는 예리하게도 칸나의 말을 그냥 허투루 듣지 않았다.
‘물질 간섭 능력에 기반해 공기랑 자기 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단 걸까?’
무엇보다 장목화가 놀랐던 건, 칸나가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양측이 모두 반고 바이오의 직원이라 한들 굳이 할 필요는 없는 설명이었다.
장목화는 이것이 단순히 칸나의 성격인지, 아니면 그녀가 치른 대가의 표현인지 의아해졌다.
“하하, 이렇게 즐거운 대화는 정말 오랜만이네. 퍼스트 시티에서는 주위 사람들과 공유할 수 없는 일들이 많거든. 너무 위험하니까.”
칸나의 사족에, 순진한 용여홍도 약간 이상한 기류를 느꼈다.
‘그렇게 설명할 필요 없어요. 설명은 곧 감추려는 행위잖아요.’
하지만 성건우는 동조를 표했다.
“그렇죠, 사람들에게 공유할 수 없는 건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 * *
다섯 명은 곧 엠퍼러 스트리트 15호 저택을 나와 지프에 올랐다.
장목화는 존중의 의미로 보조석을 칸나에게 넘긴 뒤, 성건우는 뒷좌석 가운데 자리로 떠밀고선 그의 자리를 차지했다.
서서히 라운드힐 스트리트로 향하던 그때, 장목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칸나 씨, 아버님이 퍼스트 시티 의료, 생물 영역에서 굉장히 큰 발언권을 가지고 계시는 모양이죠?”
그 영역을 대표하는 군관인 칸나의 부친 마이어스는 일찍이 원로가 됐다.
“맞아.”
칸나도 부정하지 않았다.
다시금 장목화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혹시 노스 앙헤포드 구역 초……, 아니, 어느 마을에서 이루어지는 생화학 실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아시는 거 있으세요?”
칸나는 웃었다.
“회사에서도 나한테 물어보던데, 나도 잘 몰라. 아버지가 언급한 한두 마디만 들은 거지. 변이의 방향 유도와 관련된 것 같긴 했어.”
‘그건 분명 생물 영역에서 가장 중시되는 첨단 프로젝트 중에 하나지.’
질문은 이쯤에서 그치기로 한 장목화는 주위 건물과 더는 그렇게 경계가 삼엄하진 않아도 여전히 매우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는 각 검문소에 주의하며 운을 뗐다.
“칸나 씨, 당신은 어쩌다 자연스럽게 각성하게 됐나요?”
“말 그대로야. 어느 날 갑자기 자다가 뭇별 홀로 들어갔어. 근데 나도 정말 자연스럽게 각성 된 건지는 잘 모르겠네. 아마도 회사에서 일상생활 하는 도중에 어느 정도 실험 요소를 가한 건지도 모르지. 이상한 눈 체조나 라디오 체조처럼.”
칸나가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성건우도 평소 그런 체조들을 정말 이상하게 여겼던지라 바로 동조했다.
“어떤 종교에서는 그것들을 자기들 의식으로 삼더라고요.”
‘그 논리대로면 구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은 모두 각성자가 됐게? 휴, 설령 눈 체조나 라디오 체조가 정말 각성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된대도 난 그 적용 대상이 아닌가 보네. 그렇게 오랜 시간 해왔는데도 각성이 안 됐잖아.’
장목화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용여홍 역시 눈 체조와 라디오 체조가 각성에 어떤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각성은커녕 그건 본래 목적에도 별 효과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내내 했는데도 내 키는 고작 평균치밖에 안 됐잖아! 유전자 개량을 받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작았을걸?’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 칸나가 대화하는 동안 운전 중인 백새벽은 골똘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의심을 사지 않으려 내내 전방만 주시하며 그리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를 유지 중이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라운드힐 스트리트에 도착한 차는 고풍스러운 14호 건물 근처로 다가갔다.
돌기둥들로 떠받쳐진 이 건물은 담쟁이덩굴에 뒤덮여 있었다. 대문은 이상하리만치 과장된 듯한 크기였다.
다들 엄숙하게 건물을 보고 있는데, 칸나가 입을 열었다.
“일단 차 세워.”
백새벽은 이유도 묻지 않고 속도를 낮췄다.
지프가 길 한쪽에 정차하자, 칸나는 차에서 내려 구조팀원들을 돌아봤다.
“이따 내 손동작 잘 봐. 오른손 엄지를 들면 들어가서 아비아를 찾아도 좋다는 뜻, 왼손 검지랑 중지를 들면 나한테 협조해 가상 세계 주인한테 대처할 방법을 생각하라는 뜻이야.”
“알겠어요.”
장목화는 꾸물대지 않고 곧장 답했다.
그 후, 칸나는 당당히 아비아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일대일로 붙으려는 걸까요?”
성건우가 약간 흥분한 듯 중얼거렸다.
“지금 신경 쓸 건 그게 아니야. 작은 빨강이랑 작은 흰둥이는 군용 외골격 장치 착용해.”
장목화의 말이 떨어진 그때, 아비아의 고풍스러운 저택 3층 창이 열렸다.
창문 뒤에 선 건 한여름인데도 검은 털모자를 쓰고 짙은 색 가운을 걸친 노부인이었다. 파란 눈동자의 노부인은 옅은 화장을 하고 있었고, 몸에 걸친 옷과 장신구는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칸나를 발견한 노부인이 웃으며 오른손을 흔들었다.
칸나 역시 웃으며 인사한 뒤, 바람에 휩싸인 듯 가볍게 떠올라 그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커피? 아니면 차?”
노부인이 돌아서 친절하게 물었다.
“차가 좋겠네요. 레몬 조각이나 시럽 같은 이상한 건 넣지 말고요.”
일단 창틀에 착지한 뒤 방으로 날아간 칸나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
곧장 하인에게 차와 디저트를 준비시킨 노부인은 칸나 맞은편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눴다. 두 사람은 오랜 친구 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