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83화 (483/649)

483화. 강연

북안 불모지, 매일 대량의 차와 사람이 오가는 레드리버 다리 부근.

한명호, 정도연, 게네바는 비교적 멀찍이 자리한 무너진 건물 꼭대기에 숨어 망원경이나 두 눈으로 목표 구역을 감시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다리 끝에 도착한 완전 무장 한 군대를 발견했다. 그러나 다리를 지키는 도시 방위군은 그들을 막고 보내주지 않았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수백 명으로 이루어진 군대는 결국 일찍이 비워진 강가에 주둔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 뒤로도 사람들과 차량 행렬이 속속들이 도착했지만 누구도 다리 통과를 허락받진 못했다.

퍼스트 시티에 속한 공식 세력도 마찬가지고, 유적 사냥꾼도 마찬가지였다. 특별 대우를 받는 이는 없었다.

이를 보고 한명호가 입을 열었다.

“도시 경계가 삼엄하네. 나오는 건 가능한데 들어갈 순 없는 건가?”

게네바는 수집한 도시 방위군 장교의 입 모양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들의 말을 복원했다.

“상부의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혹은 오후 3시까지 기다려라.”

한명호가 중얼거렸다.

“퍼스트 시티 고위층들은 동란 발생을 엄청나게 경계하는 모양이야.”

정도연은 약간 걱정된다는 듯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란이 날 수 있을까?”

게네바가 생각을 밝혔다.

“만약 다른 뜻밖의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동란은 92.1퍼센트의 확률로 발생하지 않을 거다. 뜻밖의 사건 발생 여부로 말할 것 같으면 충분한 정보가 없는 관계로 추측이 안 된다.”

게네바가 말한 데이터는 성건우처럼 멋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모델링을 통해 추산한 결과였다.

잠시 침묵하던 정도연이 말했다.

“초봄 마을 방어력도 지금쯤 많이 줄어들었을 거야.”

“하지만 동란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소환된 강자와 군대가 그에 휘말리지 않으면 그들은 언제든 초봄 마을을 지원하러 올 거다.”

게네바가 정도연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뒤이어 한명호가 정도연을 돌아보며 그녀를 위로했다.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한테 오는 법이야.”

* * *

퍼스트 시티, 골든애플 구역, 엠퍼러 스트리트 9호, 집정관 저택.

옷을 입고 홀로 돌아온 아수스는 집정관 겸 총사령관인 아버지 베울리스가 올리브색 군복으로 갈아입은 것을 발견했다.

이 거두는 포카스보다 나이가 더 많긴 하지만, 그처럼 2선으로 물러나지 않았다. 다만 베울리스는 직접 전선에 나갈 필요도, 실제로 군대를 지휘할 필요도 없어서, 원로로서의 자리와 퍼스트 시티 도시 방위군의 일부 지휘권을 갖고 있기만 했다.

그는 여전히 퍼스트 시티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

“아버지.”

바람둥이 도련님 같기만 했던 아수스는 베울리스를 보자마자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베울리스는 뒤로 말끔하게 빗어넘긴, 흰머리 몇 가닥이 섞인 검은 머리를 정리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나갔다 오마. 넌 오늘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

“어디 가시는데요?”

아수스가 놀랐다. 아버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가이우스의 주민 집회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뺨이 홀쭉하고 얼굴선이 또렷한 베울리스가 주위 경호원들을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카스님을 찾아뵌 뒤 원로원으로 갈 생각이다.”

* * *

희망 광장.

수많은 주민이 이곳에 모인 상태였다. 오지 못한 이들도 퍼스트 시티 공식 라디오 채널에 귀를 기울이며 이번 집회 내용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곧 오전 9시가 되었다.

매부리코와 움푹 팬 뺨을 가진 가이우스는 올리브색 장군 제복을 입고, 엄숙한 얼굴로 희망 광장 중앙 연단에 올랐다.

당시 오레이가 퍼스트 시티의 건립을 선포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가이우스는 자신의 특별한 점을 굳이 드러내지 않고, 새카맣게 모인 사람들을 보며 마이크를 들었다.

“주민 여러분, 여러분들이라면 이미 저를 알고 계실 겁니다. 저는 동쪽 군대의 군단장이자 작년에야 원로가 된 가이우스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다르지 않습니다. 제 아버지는 퍼스트 시티 주민이셨고, 제 어머니도 퍼스트 시티의 주민이셨습니다. 저 역시 평생을 퍼스트 시티의 주민으로 살았습니다.

과거의 저는 귀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위 주민들이 퍼스트 시티의 생존, 발전, 성장을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봐왔습니다.

저 역시 그런 주민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저보다 주민이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가이우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평범한 주민 계급 출신으로 군공을 세워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원로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는 당연히 이곳에 자리한 주민들의 호감을 살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뼉을 치는 동안, 가이우스의 말이 이어졌다.

“여러분들의 조상과 여러분들이 대를 거듭해 가며, 해를 거듭해 가며 바쳐온 것들 때문에 퍼스트 시티는 애쉬랜드 위 최대 세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대량의 토지를 소유하고, 수많은 광산을 점거하고, 크고 작은 공장을 건립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기본적인 굶주림에서 벗어나 보다 더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이우스의 말투가 돌연 묵직해졌다.

“이 모든 것은 천천히 부패하고, 또 파괴되고 있습니다!”

지난 몇 해 동안 이득을 보긴커녕 상당한 고통만 받았던 주민들은 가이우스의 말에 감정적으로 어마어마하게 동요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질서 유지를 담당하는 치안관들과 도시 방어군들의 심장은 저 아래로 추락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밀려들었다.

광장에 새카맣게 모인 주민들을 보던 그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밀려드는 긴장감에 입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소란을 일으킨다면, 원로원이나 정무청 등으로 몰려들어 폭력적인 경향을 보인다면, 저들을 막아야 할까, 막지 말아야 할까. 총은 쏴야 할까, 쏘지 말아야 할까.

상부에서는 절대 약한 마음은 먹지 말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들 역시 이곳에 나오기 전 자신의 가족과 친척, 친구들에게 이번 주민 집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퍼스트 시티는 결코 작은 곳이 아니었다. 애쉬랜드 최대 도시인 이곳은 단순히 크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외부 유랑자와 어마어마한 규모의 노예, 군대 및 황무지 개간팀에 속해 다른 거점이나 산하 도시에 머무는 사람들을 제하더라도 그 수는 수십만에 달했다. 그중엔 몇 다리만 건너도 아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지인을 향해 총을 들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어느 누가 망설이지 않을까. 무엇보다 가이우스의 말이 거짓이던가?

아니었다. 치안관, 도시 방위군 이전에 퍼스트 시티 주민인 그들이 보기에도 연단에 선 장군의 말은 절절히 와닿았다. 그것은 평소 그들이 늘 보고 들어온 현실이었다.

뒤이어 가이우스는 그 좋은 퍼스트 시티가 어쩌다 이렇게 서서히 망가지게 됐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향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여러분 중에는 이미 토지를 잃은 사람이 아주 많을 겁니다.”

이 말은 끓는 기름에 튄 물방울처럼 단숨에 분위기를 폭발시켰다. 광장 곳곳에 자리한 사람들이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땅을 원한다! 우리는 땅을 원한다!”

가이우스는 왼손을 뻗어 아래로 살짝 흔들었다. 일단 진정하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는 의미였다.

“여러분들이 토지를 잃게 된 원인은 아주 다양합니다. 누군가는 극단적인 날씨에 생산량이 대대적으로 떨어지니 어쩔 수 없이 특정 사람, 혹은 특정 기구에서 돈을 빌려야 했을 겁니다.

이자는 하루하루 불어나고,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계속 반복되니 갖고 있던 건 다 팔아서 갚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죠. 그렇게 결국 땅까지 다 팔아야 했던 겁니다.

누군가는 풍성한 수확을 얻었지만, 대량의 토지를 점거한 이가 의도적으로 떨어뜨린 생산물 가격에 다 피해가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자기 배만 겨우 불렸지, 다른 부분에선 손해를 봤겠죠.

거기다 세금도 꼬박꼬박 내야지, 그런 일이 한 해, 한 해 거듭되다 보면 끝내는 빚을 내야 하는 상황이 됐을 겁니다.

또 가족 중에 누군가 병이 난 사람도 있고, 강도에게 당한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누군가의 보증을 섰다가 문제가 생겨버린 사람도, 갑작스러운 재난을 맞닥뜨린 사람도 있었겠죠. 그러한 갖가지 이유로 끝끝내 빚을 지게 되면 그 길로 악순환에 빠지는 겁니다.

하지만 원로원은, 정무청 사람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그건 개인의 사정이고 개인의 문제다, 정상적인 경쟁으로 인한 결과다, 상황은 딱하지만, 법률적으로는 아무 도움도 제공할 수 없는 불행일 뿐이다, 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상당수가 본인 혹은 본인의 아버지가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 모든 예시는 그들이나 그들의 가족에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상부의 반복적인 세뇌에 정말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게 된 이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퍼스트 시티가 계속해서 외부로 확장하기를, 이 들끓는 분노로 새로운 땅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몇 초간 의도적으로 공백을 둔 가이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보다 훨씬 커진 그의 목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현장에 자리한 모든 이들의 귓가를 두드리며 마음에 거친 파도를 일으켰다.

가이우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분명 개중엔 알코올 중독, 또 게으르고 방종해서 본인 가정을 망치고 어쩔 수 없이 땅을 판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소수일 뿐이지, 주민 대부분은 생산량 감소 때문에 땅을 팔았습니다. 풍성한 수확을 거뒀던 사람들도 겨우 몇 년 더 버텼을 뿐, 결국에는 땅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에선 여러분이 뭘 하든, 여러분의 토지는 결국 특정인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극단적인 날씨로 생산량이 감소해 구제가 절실했을 때, 원로원과 정무청은 어딨었습니까? 풍성한 수확으로 생산물 가격이 떨어져서 정부의 수매를 통해 가격을 안정시켜야 했을 때, 원로원과 정무청은 어딨었죠?

불합리한 이자가 조금씩 늘어나다 못해 넘쳐흐르는 지경이 됐을 때, 원로원과 정무청은 어딨었습니까? 여러분이 한번 도움만 받아도 난관을 넘고 선순환이 될 수 있는데, 원로원과 정무청은 대체 뭘 했지요?

그중 더러는 값싼 토지를 사느라 바빴고, 더러는 대리인을 통해 여러분에게 대출해주느라 바빴고, 더러는 신문, 라디오, TV로 경영에 형편이 없고, 학습 능력이 없으며, 농사에 뛰어나지 않은 여러분을 힐난하느라 바빴죠!”

가이우스가 잠깐 말을 멈춘 이때, 희망 광장은 고요했다.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한편 치안관 월을 비롯한 귀족 후예들은 거대한 회오리가 서서히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 그들은 주위에 있는 치안관과 도시 방위군들의 눈에서도 빛이 번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태 아무 표정 없이 있던 가이우스의 얼굴에도 흥분한 기색이 번졌다.

“그들은 때마다 소 한 마리와 양도 여러 마리는 잡아야 열 수 있는 연회에 참석하느라 바빴습니다. 넘치는 오레이를 세고,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를 사느라 바빴습니다. 사악한 신을 숭배하고, 자신의 욕망을 방출하고, 벌거벗은 채 서로에게 뒤엉키느라 바빴지요!

그들은 사이비 종교 조직과 결탁하느라, 우리의 최대 적과 결탁하느라 바빴습니다. 안팎으로 내통해 본인 권세만 공고히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퍼스트 시티의 모든 건 우리 주민들의 정신과 피로 얻어낸 겁니다. 원로원의 권세 또한 주민들이 부여한 것인데, 그자들은 우리를 어떻게 대했습니까?

여러분, 우리야말로 퍼스트 시티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그 기생충 같은 자들을 척결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강한 대표가 필요합니다!”

사력을 다한 가이우스의 외침에 집회에 참석한 모든 주민이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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