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화. 접근
한편 골든애플 엠퍼러 스트리트를 듣자마자 급변한 안색을 보인 백새벽은 15호라는 나머지 주소까지 듣고 나서야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내 성건우가 턱을 쓰다듬으며 상상력을 발휘해보았다.
“회사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퍼스트 시티 귀족들 사이에 섞여 있었던 걸까요?”
“암암리에 우리한테 협조한 어느 귀족의 집에 숨어있는 것일 수도 있지.”
주세페가 답했다.
그도 정보원이라 이런 방면에서 확실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럴지도. 지금 당장 거기로 가보자.”
장목화는 희망 광장을 오가는 인파를 바라보며 결단을 내렸다.
“근데 지금 같은 때에 골든애플 구역에는 대여섯 걸음마다 검문소가 하나씩 설치돼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몰래 들어가죠?”
이어진 용여홍의 물음에,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일단 레드울프랑 골든애플 구역 경계에 머물면서 기회를 살펴야지. 사실 지금 가장 시선이 집중된 곳은 이곳 희망 광장 일대야. 골든애플 구역의 경계는 아직 그렇게까지 삼엄하지 않을지도 몰라.
정 안 되겠으면 회사에 보고하자. 지시된 임무 중 80퍼센트만 마무리하고, 나머지 20퍼센트는 상대에게 넘기는 거지.”
말을 마친 그녀가 씩 웃었다.
골든애플 구역 엠퍼러 스트리트 15호를 고집하지 말고, 만나기로 한 상대더러 이쪽으로 좀 오게 하면 된다는 말이었다.
“그렇네요.”
용여홍도 장목화가 상황을 전면적으로 고려했단 걸 이해했다.
이때 백새벽이 미간을 찌푸렸다.
“회사에서 골든애플 구역 상황을 짐작하지 못했을 리 없어요. 그런데도 굳이 레드울프 구역 어딘가가 아니라 엠퍼러 거리 15호란 장소를 지정한 이유는 뭘까요? 가기도 어려운 곳을.”
장목화가 입을 뗐다.
“음, 아무래도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거야. 첫째는 접선 상대의 신분이 특수한 까닭에, 지금 엠퍼러 스트리트를 떠나기 어려운 상태일 수 있어.
둘째론 만약 우리가 동란이 발생하기 전에 골든애플 구역에 진입한다면. 그 후에 아비아와 접촉할 기회를 찾기가 훨씬 쉬워질지도 몰라. 좋아, 일단 회사에 우리가 곤란한 것도 보고하고 겐한테 전보를 보내자. 아…….”
한창 조리 있게 잘 이야기하던 장목화가 짧은 탄식을 뱉었다.
“왜 그러세요?”
뭔가 안 좋은 일일까 하는 생각에 용여홍이 살짝 몸서리를 쳤다.
장목화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잔나가 대사한테 부탁한, 명호랑 정도연의 검사 결과를 못 받았네. 퍼스트 시티 상태가 좀 잠잠해진 후에 시카라 사원을 다시 찾아간다면 잔나가가 과연 우리를 받아줄까?”
“음, 우리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 같은데요.”
성건우가 매우 정확한 답을 내놓았다.
* * *
북안 불모지.
끊임없이 달리던 한명호, 정도연, 게네바는 레드리버 강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게네바가 매우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큰 흰둥이가 전보를 보냈어!”
게네바는 언제든 연락을 취할 수 있게, 배터리도 아끼지 않았다.
문득 정도연은 참 뜻밖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뻐하고 놀라워하는 게네바는 금속 같지도, 플라스틱 같지도 않네.’
“무슨 일이 있었대?”
한명호가 곧장 물었다.
“음, 습격을 받았고⋯⋯. 꿈을 조심하라는 주의를 주기도 했어.”
지능 로봇 게네바는 전보 수신과 동시에 내용을 해독할 수 있었다.
“역시 꿈에 문제가 있었네.”
한명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게네바는 금속 목을 끄덕였다.
“우리 쪽 상황도 알릴게. 목표가 피비린내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추측도 알려줘야지. 큰 흰둥이는 퍼스트 시티에 언제라도 동란이 일어날 것 같다고, 북안 불모지에 있는 퍼스트 시티 정규군 동향을 잘 관찰하면서 초봄 마을 상황을 잘 확인하라고 했어.”
순간 정도연은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레드리버를 가리키며 말했다.
“북안 불모지에서 퍼스트 시티로 소환된 강자와 군대는 레드리버의 저 다리를 지날 수밖에 없어. 우린 멀리서 망원경으로 저기를 감시하기만 해도 직접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어!”
“좋아.”
게네바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득였다.
* * *
퍼스트 시티 골든애플 구역, 엠퍼러 스트리트 9호.
이곳은 퍼스트 시티의 양대 거두 중 하나인 집정관 겸 총사령관 베울리스의 저택이었다.
상의를 벗은 아수스는 파란 수영장에서 두 팔을 편안하게 벌렸다.
방금 막 집에서 사우나를 하고 나와 몸을 식히는 중이었다.
촤악-
검은 머리칼, 파란 눈동자를 가진 이 잘생기고 젊은 귀족은 잠시 몸을 식힌 후에 곧 수영장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물방울들이 늘씬하고 탄탄한 그의 몸을 따라 흘러내렸다.
멋진 몸매 덕분인지, 그 물방울들마저 장식처럼 근사해 보였다.
“가이우스의 주민 집회, 곧 시작이지?”
아수스가 큰 수건을 가져온 하인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15분 정도 남았습니다. 걱정 안 되십니까?”
하인이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매력적인 깊은 눈동자를 가진 아수스가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웃었다.
“걱정할 게 뭐 있어? 멍청이가 아닌 이상, 가이우스도 그 주민들한테 의탁해봤자 아무 승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아수스가 이렇게나 자신만만한 건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집정관 겸 총사령관인 베울리스는 퍼스트 시티에서 가장 강한 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미 심령의 복도 안에서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도 찾은 상태였다. 스스로를 애써 억누르며 그것을 열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베울리스는 몸이 쇠약해질 때까지, 수명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절차를 마무리하고 싶어 했다.
그뿐만 아니라 아수스가 아는 바에 따르면 퍼스트 시티에서 강자라고 칭할 수 있는 이들 대부분은 그의 아버지를 지지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수시로 잠들어 있는 자들 역시 그랬다.
카스가 그 예였다.
그랬다. 퍼스트 시티를 건립했던 거두 중 한 명, 오레이의 친한 전우, 이미 화폐 단위가 된 그 카스는 여태 살아있었다.
이미 아흔 살을 넘긴 그는 대부분은 그 밀실에 잠들어 있고, 원할 때면 언제든 새로운 세계로부터 짧게나마 돌아올 수 있었다.
반면 가이우스가 소집한 주민들은 아수스가 보기엔 그저 생산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아, 생산 수단이란 단어는 구세계 어느 책에서 배운 것이었다.
도시 시가전에서는 군대보다 각성자가 훨씬 유용했다. 가이우스가 동귀어진할 각오로 퍼스트 시티를 완전히 폭발시켜버리지 않는 이상에는 그랬다.
* * *
희망 광장.
이미 수많은 주민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치안관 2, 30명을 데려온 월도 빽빽하게 자리한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으면 좋겠는데.’
이 치안관이 무엇보다 바라는 건 바로 안정이었다.
* * *
구조팀은 곧 반고 바이오의 회신을 받았다.
전보에선 접선 장소를 변경할 수는 없다고, 어떻게든 골든애플 구역에 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목화가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상대가 엠퍼러 스트리트를 떠나기 어려운 상황인가 본데⋯⋯.”
“그럼 이제 어쩌죠?”
용여홍은 한 블록 너머에 있는 골든애플 구역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이미 도시 방위군이 임시 검문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당장은 비밀 경호원이 보이진 않지만, 분명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포카스 장군에게 연락해 임시 통행증을 만들어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지. 이것도 우리가 부탁한 도움의 일부니까.”
포카스 장군은 이미 저택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리고 그는 구조팀에게 그의 서재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었다.
“그러는 수밖에 없겠네요.”
백새벽 역시 다른 방도가 없다는 뜻을 표했다.
성건우는 도시 방위군이 설립한 임시 검문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를 사귀어도 돼요. 아, 이러다 결국엔 친구가 몇 명이나 되려나?”
“도시 방위군 자체가 성건우 형제회 퍼스트 시티 지부가 되는 거 아냐?”
장목화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분명한 농담이었다. 도시 방위군 시스템에 속한 각성자는 적지 않았으니,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한 경계심과 저항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성건우가 친구를 사귀는 건 질서의 손에게 자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다시 핸들을 돌린 백새벽은 주위에 전화를 걸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그리고 성건우는 등받이에 기대 손을 들어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 * *
기원의 바다, 황금 엘리베이터가 자리한 섬 위.
이곳에 오르자마자 아홉으로 나뉜 성건우는 재차 회색 제복을 입은 채 황금 엘리베이터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성건우를 포위했다.
아홉 성건우 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우린 드디어 네 논리의 허점을 찾아냈어.”
또 다른 성건우가 턱을 매만지며 덧붙였다.
“동료를 죽이고 기억에만 살아가게 하고, 각기 다른 인격을 분열시켜 그들로 살아가게 할 사람이라면 애초에 동료를 잃는 걸 고통스러워하지도, 그로 인해 어마어마한 고통을 받지도 않을 거야. 그런 행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족에 불과하니까.”
황금 엘리베이터 문 앞에 앉은 성건우는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아홉 성건우가 한 마디씩 보태며 이야기를 마친 후에야 옆쪽에 휴대용 녹음기를 한 대 구현해 조금 전 내용을 재생시켰다.
아홉 성건우가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이 성건우는 저도 모르는 사이 추리 광대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귀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었다.
아직 심령의 복도에 이르지 못한 성건우는 오하명처럼 추리 광대 능력을 전자파 신호로 고체화할 수 없어 녹음한 내용으로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다. 이에 원활히 소통하고자 양측 모두 휴대용 녹음기를 준비한 상태였다.
이제 아홉 성건우의 이야기를 다 듣고, 황금 엘리베이터 앞의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너희들 결정을 돕기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어. 내 제안의 중점은 사실 동료를 죽이는 그 행위 자체지, 그들을 기억 속에서 살아가게 하거나 분열시킨 인격으로 그들을 연기하란 말이 아니야.
동료를 죽이는 일을 행위로 옮기는 순간, 너희는 이미 그들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다고. 상실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은 관심이야. 너희들 목표는 스스로를 더 냉랭하고, 더 냉혹하게 만드는 거고.”
빌런 성건우가 말을 마치자 아홉 성건우 역시 휴대용 녹음기에 녹음된 그의 음성을 들었다.
한 성건우가 코웃음을 쳤다.
“냉혹하게 변한 상태에서 어떻게 전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이상을 유지할 수 있어? 그들이 죽든 말든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겠냐고?”
또 다른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알겠다. 저 녀석의 본질은 우리 마음속의 약한 부분인 거야. 책임을, 이상을, 스스로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모든 걸 피하려는 마음인 거지.”
소형 스피커를 든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빈정대 봤자 저 녀석한테는 소용없어. 저 녀석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이에 빈정댔던 성건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저 녀석을 포용하려면 함께 죽으려는 마음을 먹어야 하나 봐.”
“그러지 마!”
“안 돼!”
“진정해!”
다른 성건우들이 분분히 일어나 그 위험한 녀석을 저지했다.
성건우들의 간담회는 이번에도 실패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