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81화 (481/649)

481화. 진아

“저는 당신들이 꿈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줄 알았습니다.”

성건우가 말했다.

이건 용여홍도 같은 생각이었다. 달지기 여명은 본래 꿈 영역을 관장하는 것으로 가장 유명했다.

포카스는 스스로를 향한 채찍질을 마친 뒤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채찍은 한쪽에 던져놓고 축축한 수건을 들어 몸에 흐르는 피를 닦기 시작했다.

“그건 세상 사람들 오해고, 이단과 이교도들이 따르는 잘못된 길이야. 우리 의식은 분명 악몽에 집어 삼켜질 수 있어. 그럼 현실에선 무심자로 변하게 되지. 근데 우리가 이야기하는 꿈은 단순히 꿈 자체가 아니야. 우리 교파에서 꿈은 진아를 속이는 갖가지 문제를 가리키는, 더 넓은 개념이거든.”

‘이게 차이점이네. 달지기 여명의 신도는 무심병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어.’

장목화는 상대의 이론을 무턱대고 비웃거나 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결론을 알아내기 전까진 세상 사람이 말하는 그 어떤 진상이라도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때로는 황당무계하고 얼토당토않은 이야기 배후에도 가장 심층적이고 가장 잔혹한 원인이 숨겨져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타산지석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됐다.

포카스는 몸을 닦은 뒤 채찍 자국이 가득한 몸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거울교와 미몽교단은 이 세상 자체가 하나의 꿈이라고 믿어.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러지 않고서야 악몽에 의식을 집어삼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이 있진 않았을 테니까.”

다른 달지기 신도를 이야기하는 동안 퍼스트 시티의 장군은 아무렇지 않게 두 비밀 조직을 언급하기도 했다.

“신룡교도 그렇고요.”

성건우가 주 관주를 위해 그들의 존재를 상기시켜주었다.

포카스는 그런 그를 힐긋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달지기 힘을 빌려 꿈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려고 하잖아. 멍청한 짓이지.

달지기는 일찍이 우리한테 방법과 힘을 줬어. 꿈에 속은 우리가 그걸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모든 사람의 체내에 진아가 있어. 진아는 곧 여명이야. 스스로를 파고 들어 자기 진아를 찾기만 하면, 꿈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있어.”

이 대목에서 사자 같은 장군은 오른손을 올려 주먹을 쥐더니 본인 옆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진아는 영구히 존재하리!”

“오오.”

성건우는 그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았다. 포카스의 일거수일투족을 머릿속에 꼼꼼히 새기려는 것 같았다.

포카스가 옷을 다 입자, 장목화는 그제야 웃으며 물었다.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게 진아를 찾는 방법인가요?”

포카스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미사를 드릴 때마다 우린 스스로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을 공유해. 촛농을 떨어뜨리는 방식을 더 좋아하는 이도 있고, 바늘로 찌르는 걸 좋아하는 쪽도 있어.

또 스스로 묶고, 매달고, 채찍질하는 각종 기술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힘이 아니라 외재적인 힘으로 괴롭혀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어.

물론 중요한 건 고통이 아닌 괴로움이지. 괴로움은 고통을 포함해. 고통과 모욕 외에 정신적인 괴로움도 있어. 가장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

어떤 사람은 반려자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고통을 통해 힘을 얻으려고. 자발적으로 그런 기회를 만들어 상대를 시험했어.”

‘당신 교파는 정말 정상이 아니네요.’

갖가지 경험을 한 용여홍도 참 신선할 정도의 기이함이었다.

반면 지금 장목화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 맴돌았다.

‘사람에게는 각자마다 뜻하는 바가 있는 법.’

백새벽은 마음 같아선 정말 그런 괴로움을 감당할 수 있는지, 정말로 그것들을 통해 만족감을 느끼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포카스가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게 고통과 괴로움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상대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는 셈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은 가족, 동료, 친구의 죽음 아닌가요?”

성건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포카스는 드물게 몇 차례 표정 변화를 보였다.

“그렇지.”

그의 목소리는 매우 묵직했다.

성건우는 다시 한발 더 나아간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런 고통을 느끼려고 의도적으로 가족이나 동료, 친구를 죽게 하려는 사람도 있을까요?”

포카스는 저도 모르게 성건우를 위아래로 몇 차례 훑어보았다. 흡사 변태를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뒤이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도적으로 가족, 동료, 친구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그들의 죽음에 고통을 느끼겠나?”

“그러니까요!”

성건우는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신바람이 난 듯했다. 포카스의 답으로 마음에 맺혀있던 어떤 매듭이 풀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포카스는 고개를 틀어 장목화를 바라보았다.

“그래, 나한테서 어떤 도움을 받길 원하는 거지?”

장목화는 웃으며 일찍이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시내에 동란이 일어나면 아비아의 보호 임무는 도시 방위군에 넘어가거나 공백 상태로 남게 될 거예요. 장군님께서 저희가 아비아와 접촉하는 과정에 일정한 편의를 제공해주셨으면 합니다.”

“동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포카스가 답 대신 반문을 했다.

장목화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따로 해주실 일은 없습니다. 나중에 다른 부탁을 드릴게요.”

포카스는 가타부타하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만약 자네들에게 아비아와의 접촉으로 얻은 수확을 공유할 마음이 있다면 제안에 응하겠네.”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장목화가 농담하듯 말했다.

“그런 종교적 이념을 가지신 분께 오레이가 남긴 비밀을 알아야 할 이유가 있으신가요? 진아를 찾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포카스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대꾸했다.

“진아를 찾기 전까지는 무시무시한 악몽에 대항해야 하니까. 자아의식이 그것에 삼켜지지 않도록 해야 하니까. 오레이가 남긴 비밀은 악몽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장목화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는 대신 웃었다.

“합작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포카스는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을 돌아보더니 여유롭게 중얼거렸다.

“난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 곧 주민 집회에 참석한 가이우스의 연설이 시작될 거야.”

* * *

휴고에게 무선 통신기를 얻은 구조팀은 곧장 차에 올라 일차적 성능시험을 한 뒤 반고 바이오에 전보를 보냈다.

내용은 장목화가 어젯밤 만들어둔 초안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오늘 주민 집회가 열릴 거라는 사실과 어쩌면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추측만 더해졌을 뿐이었다. 이를 통해 아비아와 접촉할 거라는 계획도 알렸다.

장목화가 바라는 건 회사의 도움이었다.

그녀는 대형 세력 중 하나인 회사라면 퍼스트 시티에 정보망도, 구조팀도 딱 하나만 배치하진 않았으리라 믿었다.

전보 발송을 마친 장목화가 주세페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회사에서 여기 배치한 사람 중에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있어?”

주세페는 고개를 느릿하게 저었다.

“잘 몰라. 난 그저 관련 정보 제공만 맡았지, 접촉자와 심층적으로 만나진 않았어. 지금까진 너희가 이렇게 강한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그의 말은 반고 바이오에서 퍼스트 시티에 파견한 이들이 분명 적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주세페는 그들 중 대부분과 접촉해 지정된 정보를 전달하긴 했어도, 그중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있는지까진 알지 못했다.

뒤이어 주세페가 덧붙였다.

“근데 임무 수행을 위해 퍼스트 시티에 온 팀과 개인이 많기는 해. 그중 강자가 있을 가능성도 매우 크고.”

“개인?”

장목화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독행 사냥꾼이 일반적인 유적 사냥꾼보다 강하듯, 팀이 아닌 개인으로 움직이면서 임무를 수행하는 이가 약할 리는 없었다.

주세페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세 명이야, 근데 이미 정체가 폭로된 나랑은 더 이상 연락하려 하지 않을 거야.”

뭔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이던 장목화가 백새벽에게 말했다.

“레드울프 구역과 그린올리브 구역의 경계로 가자.”

그곳에서는 퍼스트 시티 정부의 라디오를 들을 수도 있고, 주민 집회의 향방을 파악하기도 쉬웠다. 그리고 동란이 일어났다 싶으면 때맞춰 그린올리브 구역으로 물러날 수도 있었다.

하층민과 외부 유랑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구역인 만큼,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그곳이 쟁탈의 중심이 될 리는 없었다. 일정 정도 무질서와 혼란은 초래되겠지만 그런 상황이 구조팀에 위협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네.”

백새벽이 지프의 속도를 살짝 높였다.

* * *

지프가 레드울프와 그린올리브 구역 경계에 도착했을 무렵, 남루한 차림에 안색이 좋지 못한 하류층 주민들이 나무 팻말과 종이 등을 쥔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토지를 원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원한다! 우리는 삶을 원한다!”

무리의 외침은 딱딱 맞아떨어지며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구조팀이 전에 몇 차례 마주쳤을 때와 달리, 지금 그들은 모종의 희망을 확인한 듯 상당히 흥분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구호는 하나가 더 늘어났다.

“내부의 적을 처단하자! 사악한 것에 대항하자!”

장목화는 오른팔을 차창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구세군이야 어쨌든 세계를 구원하려고 노력했다지만, 퍼스트 시티는 건립부터 지금까지 그런 방면으로 생각은 한 번도 안 하지 않았나⋯⋯.”

그녀는 이 구호가 구세군과 반 지성교, 그리고 그 두 세력과 결탁한 바로 원로를 노린 것임을 알고 있었다.

구세군은 성립 초기만 해도 굉장히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적극적인 자세로 퍼스트 시티 접양 지역을 줄곧 공격했었다.

이 때문에 퍼스트 시티도 그들을 매우 꺼렸다.

퍼스트 시티는 자신들의 노예를 구조하려는 강적에 대항하고자 오랜 시간 내내 구세군을 요괴나 악마처럼 여겨왔다. 그들에게 구세군은 편향적이고, 극단적이고, 과격한, 무엇에 비유도 불가한 미치광이나 다름없었다.

구세군이 집단의 이름으로 모든 이들이 축적해온 논밭과 재물을 갈취하려 한다고 했고, 명목상으론 요구에 따라 물자를 균등하게 분배한다고 해도 실제론 일반인들의 모든 걸 뺏어 통치자를 만족시키려 할 뿐이라고 했다.

또 매우 사악한 힘을 가진 구세군이 언제 목표와 생각을 바꿔 퍼스트 시티 주민들을 꼭두각시로 삼을지는 모르는 일이고, 주민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과 전혀 다른 일들을 시킬지도 모른다고 선동했다.

이렇게 세뇌가 반복되자, 퍼스트 시티 주민들도 점차 구세군을 적대시하고 두려워하며 구세군을 퍼스트 시티의 가장 큰 적으로 여겼다.

그러니 귀족 중 구세군과 결탁한 사실이 드러난 자는 그 정치적 생명이 기본적으로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맞아요, 맞아요.”

성건우는 용여홍의 말투를 흉내 내며 장목화의 말에 동조했다.

* * *

잠시 후 백새벽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차를 세우자, 장목화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겐 쪽과 약속된 시간까지 기다리지는 않는 게 좋겠어. 퍼스트 시티 정세가 혼란스러워졌으니 초봄 마을 상황에도 영향이 갈 확률이 높아. 최대한 빨리 이 사실을 알리는 게 나을 것 같아.

겐이 계속 통신 모듈을 켜둔 상태라면 좋겠는데. 안 그럼 당장 연락해도 저녁이나 돼야 소식을 접할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한명호가 가지고 있는 무선 통신기를 켤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게네바에게 바로 연락하자고 했다.

현재 구조팀 무선 통신기는 언제라도 회사의 회신을 받을 수 있게 내내 켜져 있었다. 보낸 전보에도 이 사실이 언급돼 있었다.

장목화가 막 게네바에게 연락을 취하려고 준비하던 그때였다. 마침 반고 바이오의 회신이 도착했다. 내용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동란이 일어나기 전 최대한 골든애플 구역 엠퍼러 스트리트 15호 옆문으로 가 한 사람을 만날 것.

접선 암호 : 당귀.」

‘골든애플 구역 엠퍼러 스트리트 15호?’

장목화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주소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의 수석 과학자 황인휘와 관계가 막역한 퍼스트 시티의 원로 마이어스가 그곳에 산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바로 그의 집이었다.

그리고 퍼스트 시티의 집정관 겸 총사령관 베울리스도 그 거리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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