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화. 수학의 중요성
한동안 침묵에 빠져있던 라이너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수준의 불면증을 일으키는 게 세 번째 능력이냐?”
포카스가 웃으며 말했다.
“맞아. 너희가 점점 잠을 잃어 가는 동안 난 너희들 육체적 잠재 능력도 각성시켰다. 불면증을 앓으면서도 양호한 몸 상태를 유지해 일상적인 생활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한 거지. 덕분에 너도 계속 사람들의 기억을 대대적으로, 조금씩 살필 수 있었던 거고.
나는 차례대로 한 걸음씩 일을 진행해나갔다. 그래서 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네가 뒤져본 기억은 상대의 생활 상태가 아니라 나와 관련된 각종 세부 사항에 집중돼 있었으니까.”
재차 침묵에 빠진 라이너가 한참 뒤에야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포카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상대를 힐긋 바라보았다.
“당연히 의미 있지. 퍼스트 시티 정보 체계는 여전히 강하다. 너희 말인 영역의 각성자들이 치르는 대가 중 일부는 일찍이 파악된 상태야. 그리고 난 그중 육체적이고 생리적인 대가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지. 수면 장애, 고혈압, 신체 소질 저하 등등.
네가 치른 대가 역시 이 중에 포함돼 있을 진 모르겠군. 어쨌든 시도할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실패한대도 잃은 건 없지만 성공한다면, 하하⋯⋯.
장기적으로 불면증에 대항해왔는데 더는 육체적 잠재능력이 각성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가벼운 병은 커지고, 큰 병은 죽음을 초래할지도 모르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진 라이너가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주위에도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끼칠 영향은 조금도 걱정이 안 되나?”
포카스가 턱을 쳐들며 아낌없이 권위적인 자세를 드러냈다.
“애쉬랜드에 이런 속담도 있어. 마음이 무르면 장군이 되기 부적합하다고. 내가 주위 구역을 조사하며 의심스러운 인물을 찾지 않은 건 널 놀라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너한테 교훈을 줄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하, 너한테 이렇게 많은 말을 한들 다 무슨 소용일까, 넌 꼭두각시에 불과한데⋯⋯.”
포카스가 라이너를 보며 옅은 웃음을 흘리던 사이, 라이너는 포카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펫 위로 쓰러졌다.
문밖의 경호원들과 저택 안의 다른 이들 역시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포카스는 이제 어른이 된 아이들의 방으로 갔다.
두 아이를 챙긴 포카스는 황급히 차고로 가 방탄 SUV에 올랐다.
방탄 SUV는 북쪽 그린올리브 구역으로 향했다.
그동안 포카스는 원로원이나 정무청에 전화를 걸지도, 도시 방위군에 속한 그의 수하들에게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다.
* * *
골든애플을 빠져나온 포카스는 레드울프를 관통해 그린올리브 구역, 평범해 보이는 5층짜리 아파트에 도착했다.
이 아파트로부터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휴고 여관이 있었다.
부근 골목길에 정차한 포카스는 두 아이를 데리고 지극히 안정적인 걸음으로 아파트 안에 들어갔다. 방향은 위층이 아닌 지하실 입구였다.
이곳 그늘 안에 평범한 옷차림의 남자 두 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포카스를 보고 곧장 주먹을 쥐더니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치기만 할 뿐, 그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포카스는 고개를 까닥한 뒤, 팔꿈치로 살짝 닫혀있기만 한 문을 밀었다.
협소한 복도를 지나, 포카스는 큼직한 홀에 도착했다.
홀 끝에는 석제 조각상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석상 앞으로는 간소한 매트와 이불 세트가 한 줄씩 놓여 있었다.
이미 여기엔 적잖은 사람이 누워있었다. 다들 눈도 꼭 감고 있었다.
포카스는 석상 앞으로 다가가며, 아이들을 빈 매트에 눕혔다.
사실 이건 매트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고, 타일 위에 한 겹씩 겹쳐 놓은 흰 시트에 불과했다. 그냥 바닥에 눕는 것과 별 차이도 없어서, 이렇게 딱딱한 잠자리에서 자는 건 일종의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포카스는 석제 조각상 앞에 당도했다.
일반적인 조각상과 달리 이 석상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없었다. 평범한 거울이 하나 끼워져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들어 석상 머리를 올려본 포카스는 자연히 그 자신을 마주했다.
그는 곧 주먹 쥔 손으로 머리를 가볍게 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아(眞我)는 영구히 존재하리.”
예를 취한 뒤 돌아선 포카스는 두 아이 곁으로 돌아와 간이 매트에 누웠다. 허리에 닿는 딱딱한 바닥의 느낌이 절로 과거를 불러일으켰다.
아내가 무심병에 걸렸는데도 귀족이고, 장군이고,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인 포카스도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날 이후 포카스는 여명을 숭배하는 진아교(眞我敎)에 가입해 꿈 파괴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15분이 지났을 무렵, 눈을 감은 포카스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렇게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 * *
골든애플 구역, 감찰관 알렉산더의 저택.
알렉산더의 집사가 방문자 신시아를 거실로 안내했다.
27, 8살 정도로 보이는 신시아는 늘씬한 체형에, 반짝이는 긴 머리카락도, 말을 하는 듯한 눈동자도 모두 린넨색을 띠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어깨가 드러나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착용하고 있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팔찌, 브로치까지 매우 우아해 보였지만,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감찰관님.”
신시아는 알렉산더를 보며 공손하게 예를 갖췄다.
뒤이어 거실을 한 번 슥 훑어본 그녀는 이 안에 사람이 몇 명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알렉산더부터 시작해, 갈루란의 얼굴을 한번, 그 곁의 집사와 알렉산더를 보호 중인 두 경호원을 쳐다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총 네 명이네.’
그녀가 마음속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인가?”
알렉산더가 목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신시아는 주위를 둘러본 뒤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한테 문밖에서 기다려달라고 할 수 없을까요?”
그녀는 감찰관 저택에 수시로 방문해 알렉산더와 개인적인 만남을 갖곤 해서, 이는 그리 과한 요구도 아니었다.
퍼스트 시티의 양대 거두 중 하나인 알렉산더에게도 스스로를 보호할 힘 정도는 충분히 있었다.
알렉산더는 남몰래 살짝 미간을 구기며 약간 망설이다 말했다.
“다들 나가 있어.”
분명 집사와 경호원들을 향한 분부였지만 그의 시선은 딸 갈루란에게 닿아있었다. 하지만 갈루란은 아버지의 눈빛은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침착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동시에 집사와 두 경호원은 한마디도 없이 조용히 거실 밖으로 나갔다.
집사는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뒤 두 경호원과 함께 문밖에 서서, 누구도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켰다.
신시아는 두 걸음 앞으로 나서며 약간의 공황과 두려움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감찰관님. 질서의 손이 잡은 주민 집회 폭발 사건 범인이 바로 원로를 배후 조종자로 지목했습니다. 가이우스 장군은 이 기회를 틈타 도시 내 모든 주민을 소집해 내일 오전에 집회를 열려고 해요.
이 때문에 좋지 않은 각종 소문이 떠올랐어요. 감찰관님, 감찰관님이 나서서 저지하지 않는다면 퍼스트 시티에는 동란이 일어날 겁니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 신시아는 알렉산더에게 접근하더니 그의 팔뚝에 매달리며 두려운 마음을 위로하려 했다.
알렉산더는 고개를 틀어 딸 갈루란을 힐긋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약간 난감하다는 듯 팔을 거뒀다.
“이러면 안 돼, 진정하게. 일단 차라도 마시는 게 어떻겠나?”
신시아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 알렉산더는 티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곳엔 차 두 잔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알렉산더, 하나는 갈루란의 것이었다.
알렉산더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신시아는 본능적으로 찻잔의 개수를 헤아렸다.
‘한 잔, 세 잔⋯⋯. 그래, 총 세 잔이네. 감찰관께서는 전에 어떤 두 사람이랑 이야기를 나눴던 걸까?’
속으로 중얼거리던 신시아가 입술을 오므리며 답했다.
“조, 좋아요.”
분홍색으로 반짝거리는 그녀의 입술은 매우 유혹적이었다.
알렉산더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무의식적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고는 집사를 불러 차를 한 잔 더 내오게 했다.
갈루란은 이미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은 상태였다. 태도도 매우 여유롭고, 이곳을 떠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곧 집사는 홍차 한 잔을 가져다준 뒤 조용히 방에서 물러났다.
신시아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려 했다. 그러나 아직도 떨치지 못한 공황과 두려움에 계속 손을 떨다가 결국 찻잔을 놓쳐버렸다.
“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녀의 가슴팍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신사인 알렉산더는 곧장 곤경에 처한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다. 하지만 젖은 곳이 아무래도 손을 대기 어려운 부위인데다 옆에서 지켜보는 딸까지 있어서 결국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신시아는 한참을 허둥댔는데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자 결국 혼자 휴지를 뽑아 흘린 차를 닦았다.
“감찰관님, 보세요⋯⋯.”
그녀는 젖은 가슴팍을 닦으며 아무래도 화장실에 가서 처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보세요’란 말에 신시아의 가슴팍을 바라본 알렉산더는 그 아름다운 곡선과 출렁이는 움직임에 감탄했다.
그는 순간 자신이 화르륵 타오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의 마음속에서 빠르게 무르익은 무언가가 끓어 넘치려는 듯했다.
고개를 돌려 옆쪽에 앉아있는 막내딸 갈루란을 바라본 알렉산더는 저도 모르게 신시아를 향해 속으로 원망을 표했다.
‘상황을 좀 보지 그래? 왜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구는 거야?’
잠시 후 정색한 알렉산더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미 다 알고 있어. 난 최선을 다해 퍼스트 시티의 안정을 수호할 거야. 그러니 이만 돌아가 봐. 젖은 옷 그대로 있으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야.”
뜻밖의 반응에 멍한 표정을 드러낸 신시아는 분부를 받은 집사가 다가와 떠날 것을 청할 때까지도 표정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렇게 차가운 알렉산더는 처음이었다.
결국 신시아의 뒷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 알렉산더는 돌아서 막내딸 갈루란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구겼다.
“이게 네가 가진 능력 중 하나냐?”
갈루란은 매우 평온하게 답했다.
“예.”
알렉산더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의 너는 전과는 완전히 다르구나.”
갈루란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제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모르시는 것 같네요.”
“뭐?”
알렉산더가 의문을 표했다.
치른 대가라는 것이 그렇게 쉬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던가?
겨냥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 이상에야 그럴 리가 없었다.
이윽고 갈루란이 낮은 목소리로 ‘행복은 무량한 천존으로부터 오나니’하고 중얼거린 뒤, 여유롭게 말했다.
“성격입니다.”
그녀가 치른 대가는 성격이었다.
* * *
레드울프 구역, 구조팀이 준비해둔 안전 가옥 안.
용여홍은 점차 밝아지는 하늘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에 동란이 일어나는 줄 알았는데.”
수종이란 무시무시한 존재까지 나섰으니 과민한 반응이 일어나기 쉬웠고, 구조팀이 일으킨 폭발까지 시내 여러 사람의 신경을 건드렸을 게 분명했다.
장목화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퍼스트 시티 실력과 안정성은 우리 생각보다 더 강한가 봐. 그 덩치, 어젯밤 상당히 바빴겠는데. 이런 마천루의 경우 내부 구조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 이상, 외부적인 힘만으로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어려워.”
진지하게 고민하던 성건우가 용여홍에게 말했다.
“다시 뭐라고 말 좀 해봐. 난 유전자 개량을 했는데도 175센티미터밖에 안 되고, 성적도 좋은 편은 아니라든가, 이번에는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동란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든가.”
“야이⋯⋯.”
용여홍이 바로 짜증을 냈다.
장목화는 성건우를 힐긋 보고 한숨을 쉬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제 무선 통신기 구하러 나가보자.”
동시에 이번 주민 집회의 발전 양상을 살펴보기도 할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