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78화 (478/649)

478화. 어두운 밤의 살기

골든애플 구역 또 다른 거리, 감찰관 알렉산더의 저택.

퍼스트 시티 양대 거물 중 하나인, 거구의 원로가 집안에 서 있었다.

검은 사복 차림에, 이미 얼룩덜룩해진 금발의 알렉산더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제 막내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렉산더의 막내딸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미인 갈루란이었다.

그녀는 오늘 남회색 옷이 아닌 와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구석구석 공들이지 않은 부분이 없는 데다, 극도로 사치스러운 재료로 만들어진 이 드레스는 척 봐도 대량생산 되는 옷은 아니었다.

“네가 더는 그런 옷을 입지 않을 줄 알았다.”

알렉산더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흐뭇한 마음과 관심, 그리고 약간의 비웃음마저 숨기려 들지 않았다.

갈루란은 침착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드레스일 뿐인데요.”

그 표정과 태도로 보건대, 이건 포자(袍子)와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도 없다고, 그저 인간의 나체를 가리고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상대적으로 고요한 밤중이라 소리는 더 또렷하게 들렸다.

게다가 한 번으로 그치지도 않았다. 더러는 컸고, 더러는 작았다.

곧장 통창 앞으로 다가간 알렉산더는 폭발이 일어난 쪽을 바라보며 이 틈에 딸을 교육했다.

“네가 원하는 그것들은 철과 피를 필요로 한다. 수많은 생명과 바꿔야하는 것들이야. 네가 저들을 가련하게 여긴다고, 집에 돌아와 소란을 피운다고 해서 실현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애쉬랜드를 돌아다닌 게 벌써 몇 년이냐? 그때처럼 유치하게 굴 때는 지나지 않았든?”

갈루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래서 전 모두가 운명에 저항할 순 없다는 장생의 교리를 따랐으면 좋겠어요. 모두가 도의 존재를 깨닫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는 걸 알았으면 해요. 때가 되어 진실과 허상을 구분할 수 있기를, 그래서 족쇄와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 영원히 살 수 있길 바라요.”

알렉산더는 말문이 막힌 듯 가만히 있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그런다면 인류 사회가 존재하지 않게 될 거다.”

갈루란이 다시 막 말을 하려는데, 누군가 거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누군가?”

알렉산더가 목소리를 높였다.

문밖에 선 건 그의 집사였다.

“주인님, 신시아 아가씨가 찾아왔습니다.”

* * *

서재에 들어온 건 포카스를 몇 년 동안 모신 집사였다.

이름은 라이너, 나이는 거의 예순 살이 다 되었다. 애쉬랜드의 상류층 인사가 아닌 이들 가운데에선 꽤 고령인 축에 들었다.

라이너의 머리는 일찍이 하얗게 변해버렸고, 눈가와 입가, 이마에 난 주름도 선명히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몸은 상당히 정정했고 정신도 또렷했다. 짙은 파란색 눈동자에는 지나온 세월이 남긴 침착함만 비칠 뿐, 기력이 쇠한 듯한 빛 따윈 찾을 수도 없었다.

“장군, 목욕물 준비됐습니다.”

포카스는 노란 눈동자로 깍듯이 예를 갖추는 라이너를 한번 훑어보았다.

“좋아.”

고개를 끄덕이며 느릿하게 일어난 포카스가 문 앞을 지키던 몇몇 경호원을 대동한 채 난간의 조각을 어루만지며 2층으로 올라갔다.

경호원들은 침실 입구까지만 포카스를 호위했다. 포카스의 제복을 벗기고 목욕 시중을 드는 건 여성 하인 두 명의 몫이었다.

이는 장군의 습관이었다. 밤이 되면 목욕을 마친 뒤 바로 잠자리에 들고, 알아서 깨어날 때까지 누구도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됐다.

언제나처럼 와인 한 잔을 마시며 편안히 목욕한 포카스는 하인들이 욕실을 간단히 정리하길 기다렸다가, 바로 넓은 침대에 누워 벨벳 이불을 덮었다.

세월이 남긴 허리 통증 탓에, 포카스는 고통을 좀 완화하고자 침대 매트리스를 딱딱한 것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척추를 단단히 받쳐주는 매트리스의 탄성이 느껴질 때마다 포카스는 젊은 시절이 그리워졌다.

당시 그의 침대는 온몸이 푹 빠져들 정도로 매우 푹신했었고, 그땐 아내도 그의 곁에 살아있었다.

커튼이 닫히고 침대 머리맡의 등이 꺼지자 방은 캄캄한 어둠에 잠겼다.

포카스의 호흡도 점차 느릿하고 길어졌다.

* * *

그렇게 15분 정도 지났을 무렵, 침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장군의 취침을 방해하려는 이를 막아야 할 경호원들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침입자를 보고도 못 본 척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침실에 들어온 것은 중간 정도의 체격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빛이 거의 없는 방에서 천천히 포카스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이후 그가 옷 주머니 안에서 주사기를 하나 꺼냈다.

어둠 속 인물은 주사기를 눌러 약간의 액체를 빼낸 뒤 몸을 숙여 주삿바늘로 포카스의 정맥을 겨눴다.

탁!

그때였다. 갑자기 침대 머리맡의 등이 켜졌다.

노르스름한 빛은 아주 부드러웠지만, 이미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에게는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포카스에게 독약을 주사하려던 그 사람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급히 일어나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빛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한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야에 이미 일어나 앉아있는 포카스가 들어왔다. 노란 눈동자로 그를 냉랭하게 응시하고 있는 포카스에게선 당당한 위엄이 넘쳤다.

침입자는 지난 몇 년간 이런 상황에 봉착했을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성성한 백발과 또렷한 주름을 가진 침입자, 그는 포카스가 가장 신뢰하는 집사 라이너였다.

“왜지?”

포카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대해서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눈치였다.

두려움을 억누른 라이너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기이한 웃음을 보였다.

“난 목자 부이용이니까.”

“네가?”

코웃음을 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던 포카스가 침착하게 물었다.

“기회 같지도 않은 기회를 틈타 나를 습격하려 한 이유는 뭐지? 설마 너도 지능을 잃은 거냐?”

라이너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그런 질문을 했다는 건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뜻이지. 경험 있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고, 온 도시 방위군을 지휘할 수 있는 장군에 대적하려면 성급하게 굴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거든.

인내심을 가지고 모든 것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정보를 수집하고 네 약점을 찾아내야 해. 오늘 밤처럼 도시 방위군이 사방 곳곳을 엄격하게 경계하지만, 이곳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기회를 기다려야지.

넌 모든 사람을 잠시는, 또 몇몇은 영원히 속일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이진 못해. 이건 내가 한 말은 아니고, 구세계 인사가 남긴 명언이야. 지금 너한테 쓰기 딱 좋지.

내가 네 저택에 잠입해 이렇게 오랜 시간을 들인 건 너한테 영향을 미칠 기회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네 주위 사람들의 기억을 조금씩 살펴보며 그 안에서 실낱같은 단서들을 찾기 위해서였어.”

포카스는 화를 내기는커녕 웃었다.

“그래서, 뭘 발견했지?”

라이너가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몇 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는 습관을 하나 발견했지. 외부에서 군대를 지휘하든, 퍼스트 시티 혼란을 직면하든, 넌 저녁 10시가 되기 전에 잠들어. 절대 이 시간을 넘기지 않아.

게다가 넌 잠을 잘 때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하지. 한 번은 급한 군사적 사건 때문에 전화로 보고한 자가 있었는데 넌 그 전화를 안 받았어. 밤 열한 시에 있던 일이었거든. 그러다 새벽 2시가 돼서야 전화를 받았지.

또 난 여명 영역에 속한 여러 각성자를 쫓다가 기회를 틈타 그들 기억을 뒤져서, 그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몇 가지 대가도 알아냈어. 그중에는 일정 시간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다는 대가도 있었지.

이런 정보를 종합한 결과, 넌 밤 10시 30분부터 새벽 1시 30분 사이에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사의 갈림길에 여러 번 이른 군인 포카스에게 능력적인 특징은 여태 큰 비밀이 아니었다. 의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쉬이 조사해낼 수 있었다.

목자 부이용이 아는 또렷한 두 가지는 혼수상태 제조와 육체적 잠재능력 각성이었다. 다만 세 번째 능력은 비밀스러운 유형이라 거의 아는 자가 없었다.

그와 같은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인 부이용은 포카스의 두 가지 능력이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후 확장됐으리란 걸 잘 알았다. 더는 좁은 식견으로 생각해선 안 됐다.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후 포카스가 공격에 나선 횟수는 확연히 줄었다. 그는 일반적일 땐 혼수상태 제조와 육체적 잠재능력 각성만 발휘했다.

포카스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냉랭한 눈으로 라이너를 응시했다.

이내 라이너가 웃었다.

“그리고 방금 네가 한 질문으로 확실해졌어. 특정 시간대에 혼수상태에 빠지는 게 네 대가야. 난 그 구체적인 시간을 알아내는 데만 실패한 거지.

이렇게 계속 많은 말을 나불나불 늘어놓고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난 네가 정말로 혼수상태에 빠지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어.

궁금하네, 당황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이 오히려 나와 대화하려 하다니. 애써 침착한 모습을 보여서 날 놀라게 하려고? 그렇게 습격을 피하려고?

걱정하지 마. 15분이 지날 때마다 네 자식 두 명을 제외하고 이 저택 사람들 모두가 한 무리씩 여기로 모여서 널 죽이려 할 거야. 그중 누군가는 네가 혼수상태에 빠진 시간에 맞춰 도착하겠지.

저항해봤자 소용없어. 지금 당장 저택에 있는 모두를 혼수상태에 빠지게 해도 주위에서 또 계속 암살자들이 몰려들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지금 당장 전화해서 집정관이나 원로원에 도움을 청하는 건데, 또 모르지? 네 요청을 듣고 이곳으로 달려온 사람들 가운데 또 내 꼭두각시가 포함돼 있을지?”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포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인내심이 대단하네. 일반적인 반 지성교 구성원과는 달라. 그래, 난 확실히 시간을 가지고 장난을 쳤어. 긴급한 전화를 몇 번 받지 않았던 것도 사실 다 의도한 거야. 매일 10시 전에 반드시 잠자리에 든 것도 너 같은 비밀스러운 관찰자를 오도하기 위해서였지.

난 장군으로서 모든 행동을 신중히 해야 했어. 구세계 초기에도 이미 예비군이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오늘날을 사는 내가 어떻게 그런 준비를 해두지 않을 수 있겠어? 하하!

밤 10시부터 새벽 2시? 내가 혼수상태에 빠질 때는 그때가 아니야. 그리고 자네는 못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 황제는 일찍이 이런 말도 했었어. 각성자는 자기 눈을 보호하듯 자신의 대가를 비밀에 부쳐 보호해야 한다고.

하하, 사실 내 대가는 특정 시간에 깊은 혼수상태에 빠지는 게 아니야. 난 일정한 힘이 생겼을 때부터 하나의 허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해왔지.

혼수상태에 빠지는 게 대가인 것처럼 보이는 허상을 만들어내서, 그걸로 내 진정한 대가를 가려왔다고.

아, 참 애쉬랜드인은 속담도 잘 만들어내. 군대를 부릴 땐, 거짓이나 사기 전술도 배제할 순 없다고. 각성자 전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이야기지. 안 그럼 내가 너랑 어떻게 이렇게 침착하게 대화할 수 있겠어?”

라이너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이내 느릿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포카스가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혹시 최근에 불면증이 점점 심해지지 않던가?”

라이너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지만, 미간은 이미 구겨져 있었다.

“여길 떠난 서시월 팀이 가짜 신부한테 추적당한 후, 난 목자 부이용이 이미 내 근처에 잠입해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날 노린 계략을 세웠으리라 의심하고 있었지. 그때부터 난 우리 두 아이를 제외한 이 구역에 있는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노렸다.”

포카스가 머리카락이 거의 없는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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