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77화 (477/649)

477화. 일시적 소강상태

아파트 3층.

카오는 약간 사고가 회복되자마자 본인 구명에 나섰다.

그는 이제야 수종이라는 꼬마를 얕잡아 봤던 걸 후회했다. 상대의 실력이 이 정도로 무시무시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그가 속한 조직에도 그렇게 대단한 인물은 다섯이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 모두가 가끔만 활동할 수 있는 곤경에 빠져있었다.

그때, 갑자기 가벼워진 카오의 몸이 투명한 손에 이끌리듯 뒤로 둥실 떠오르더니 소파 옆에 착지했다.

‘조용히’ 해야 하는 상태가 절반 이상 사그라들자마자, 그는 황급히 아파트 출구로 향했다.

소파에 누워 잠든 사람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상대는 애초에 그를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오가 진짜 주인을 따로 처리하지 않은 건 선해서가 아니었다. 총을 쓰든, 손을 쓰든, 실제적인 꿈을 쓰든 누군가를 죽여야 할 때 지척에 자리한 상대에게서 나는 냄새가 끔찍했을 뿐이었다.

또한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진 상황에서 따로 시간을 들여 해결할 필요도 없는 사람에게 손을 대는 건, 그의 미학적인 관점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이내 코를 막고 문을 연 카오는 계단 속 어둑한 불빛 너머로 사라졌다.

당분간 구조팀을 계속 쫓을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철수할 계획이었다.

조금 전 요란한 기척이 퍼스트 시티 강자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거니와 수종이의 실력에 상당히 놀란 것도 있었다.

아파트 건물을 빠져나온 카오는 검은 마스크를 꺼내 착용했다. 이후 그는 빠르게 교통수단을 세워놓은 곳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그는 전방의 사거리를 지나는 누군가를 목격했다. 긴 머리, 검은 가운 차림에 시원시원하고, 멋스럽고, 상당히 출중한 분위기를 지닌 자였다.

‘저 사람은⋯⋯.’

카오의 눈이 커다래졌다.

다음 순간, 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마치 가파른 홍수와 맹수를 피하려는 것처럼 몸을 웅크렸다.

* * *

사파이어색 지프는 수종이가 머물던 곳에서 멀어져 그린올리브 구역에 진입했다. 이곳에 익숙한 백새벽은 어둡고 구석진 뒷골목으로 차를 몰았다.

장목화는 주위를 둘러보며 부근에 감시 카메라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위쪽도 적잖은 뭔가로 막혀 있었다. 그녀는 곧 차에서 내렸다.

“움직여.”

성건우는 트렁크에서 전에 지프를 칠할 때 썼던 도구와 재료를 꺼낸 뒤 몹시 상기된 눈빛으로 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색으로 할까요?”

“카키색.”

장목화가 고른 건 가장 흔한 색이었다.

지금 당장 위장하지 않으면 언제 또 질서의 손을 만날지 몰랐다.

이때, 용여홍이 다리를 배배 꼬며 말했다.

“머, 먼저 일 좀 봐도 될까요?”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장목화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래. 얼른 갔다 와. 다들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해결하자. 일단 너희들부터 먼저 가.”

성건우는 도구와 재료를 내려놓고 용여홍과 골목길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용여홍을 놀릴 시간이 찾아왔다.

“방광이 너무 작은 거 아냐?”

“너, 방광 크기에 자신 있으면 어디 싸지 말고 버텨 봐.”

생리적인 한계에 봉착한 용여홍도 이젠 짜증을 냈다.

성건우는 가볍게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오늘 굉장히 용감하네?”

두 친구는 더 이상 티격태격하는 대신 각자 축축한 곳을 찾았다.

용여홍은 바르르 몸을 한번 떨며 온몸에 맴도는 편안한 감각을 느꼈다.

급한 용무를 마친 그는 그제야 약간 좀 이상하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우린 어쩌다 이렇게 길바닥에서 오줌을 싸는 신세가 된 걸까? 구세계 콘텐츠 속 구세주들은 이러지 않던데.”

성건우가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표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일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지.”

* * *

장목화와 백새벽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성건우과 용여홍은 서둘러 지프로 돌아갔다. 그들도 바로 각자 맡은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래커 칠을, 누군가는 움푹 파인 부분에 기본 처치를 했다.

곧이어 돌아온 장목화가 주세페를 보고 온화하게 웃으며 물었다.

“우리가 방금 누굴 만나고 왔는지 기억해?”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인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있어?’

주세페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답하려다 순간 몸서리를 쳤다.

이후, 성건우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곧 어깨동무한 주세페와 성건우는 지프 외관 개조 작업에 동참했다.

장목화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추리 광대 능력 덕에 주세페는 회사로 돌아가 보고할 때 수종이에 관한 그 어떤 일도 유출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말인 영역 각성자를 마주치지 않는 한, 확실했다.

추리 성립에 필요한 전제 조건 두 가지는 ‘우린 모두 생사를 함께했다는 것’, 또 하나는 ‘우린 모두 회사의 직원’이라는 것이었다.

이 조건들로 도출되는 ‘우린 같은 팀이니 서로의 비밀을 지켜줘야 한다’란 결론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굉장히 견고한 것이라 쉬이 깰 수가 없었다.

물론 추리 광대로 인해 유도된 결론이니만큼 절대로 뚫리지 않으리라 보장할 수는 없었다. 장목화도 주세페가 반고 바이오에 들어간 뒤 주위에서 각종 이야기를 듣고도 추리 광대 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긴급 보수도 끝났다. 세련된 사파이어색을 자랑하던 지프는 이제는 평범한 차로 보였다.

운전대는 백새벽이 잡고, 구조팀은 전에 레드울프 구역에 준비해둔 안전 가옥으로 향했다.

그곳은 시카라 사원을 나와 잔나가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그래서 당시 구조팀마저 생각도 하지 못한 안전 가옥이었다.

잔나가의 타심통도 결코 그곳을 파악할 수도, 추적할 수도 없었다.

* * *

안전 가옥으로 들어온 용여홍은 그제야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았다.

이내 장목화가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이따가 위장 더 하는 거 잊지 말자. 그리고 내일 오전에는 반드시 외출해야 해. 희망 광장 주민 집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찰하고, 앞으로의 방안도 마련해야 하고, 무선 통신기도 한 대 더 마련해야 하잖아.

정 안 되겠으면 부품이라도 구해서 조립하자. 어떻게든 근무 시간에 오늘 밤일을 회사에 보고하고 약속된 시간에 겐 쪽이랑 연락해야 해. 주의도 시키고, 퍼스트 시티의 사람만 경계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줘야지.”

구조팀이 당장 이 일을 하지 않는 건, 이미 연락 시간을 놓쳐서였다.

반고 바이오에는 야간 당직 전보원도 있지만, 장목화는 내일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보고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의 수하에게서 벗어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강조하며 수종이의 존재도 숨길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 밤 발생한 일이 너무 많았다. 장목화 역시 각성자 능력을 몇 차례나 경험한 상태였다. 평소만큼 또렷하지 않은 머리를 억지로 굴리느니 한숨 자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면서 보고해야 하고, 보고하지 말아야 할 게 무엇인지 정리하는 게 더 나았다.

일단 지금 그녀가 생각한 건, 수종이의 쉬 소리를 오하명의 쉬 소리로, 중요한 순간 모두를 일시 정지시킨 걸 이두형의 능력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시 정지 현장에 접근했으니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죠.”

백새벽은 팀장의 계획에 아무런 이의도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여홍은 약간 겁을 냈다.

“팀장님, 우리가 굳이 주민 집회의 향방을 근거리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을까요? 정말로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해당 사건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요. 우린 그냥 혼란을 이용하기만 하면 되잖아요. 어떻게 할지는 혼란이 이미 어느 정도 커진 후에 고민해도 되고요.”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어. 근데 내가 말한 관찰은 근거리 관찰을 말하는 게 아니라 무선 통신기를 구하는 동안 라디오, TV, 행인들 반응을 살피면서 정보도 수집하고, 가능한 발전 방향을 추측하자는 거지.”

용여홍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거 좋네요. 하……. 전 이번에야말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말을 생생하게 실감했어요. 그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사전에 지나치게 신중하게 굴지 않았다면, 우리한테 비장의 카드가 없었다면 우린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게다가 수종이는 그보다 몇 배는 더 강한 것 같더라고요. 어쩐지, 이두형이 그랬잖아요. 수종이는 도시 하나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라고요.”

이내 백새벽이 냉랭하게 대꾸했다.

“우리가 계속해서 구세계 파괴 원인과 무심병의 기원에 대한 조사를 이어간다면 언젠가는 그런 강적을 맞닥뜨리게 될 거야. 게다가 상대는 점점 더 강해지고 점점 더 무시무시해지겠지.”

용여홍도 다시금 구세계 파괴 원인 및 무심병 기원 조사란 목표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깨달았다. 그에 비하면 구조팀은 너무도 작고 미약했다.

‘인류를 구원한다……. 건우의 습관 같은 말을 듣는 사람마다 말도 안 되는 거라고 그냥 농담으로 넘기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야.’

용여홍이 속으로 탄식하는 동안, 장목화 역시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때,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도 더 강해지기 위해 노력해야지. 난 당장이라도 심령의 복도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고!”

이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감과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장목화는 과거를 떠올렸다.

‘건우가 그랬지. 모두가 낙담하고 의기소침해져도 언제나 열정적으로, 갖가지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늘 즐겁게 해줄 거라고. 건우는 정말로 그 말을 지키고 있어. 근데 너한테는 너 자신을 강화할 방향과 가능성이 있지만 우리는⋯⋯. 정말로 강화할 방향도, 가능성도 없는 걸까?’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장목화도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쨌건 일단 버텨야 해. 안 그럼 우린 퍼스트 시티에서 죽게 될 거야. 자기 실력이나 후속 임무의 위험도, 그런 이성적인 결단은 나중에 회사로 돌아가서 내리자.”

* * *

골든애플 구역, 시티즌 스트리트 18호, 포카스 저택.

늙은 사자 같은 장군은 깊은 밤 달빛만 스미는 서재에 앉아, 전화기로 끊임없이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사흘간 각 출입구 경계를 강화한다. 어느 군대든, 누구의 친서를 갖고 있든, 원로원의 일치된 허락을 받기 전까진 도시로 들어올 수 없다.

오늘 밤부터 온 도시에 비행을 금한다. 질서의 손의 드론과 헬기라도 반드시 이 명에 따라야 한다. 한 번은 경고로 끝나겠지만 두 번째는 격추다.

내일 오전에 열릴 주민 집회 질서를 잘 유지하도록.

누구든, 어떤 명분으로든 원로원, 정무청, 총사령관 저택, 감찰원에 모이는 자는 바로 체포다. 저항을 시도한다면 일단 최루탄을 사용하고 그 이후로는 사살까지 고려할 것이다.

모든 군용 외골격 장치와 인공지능 갑옷을 모아 일괄적으로 분배한다.

각성자는 무작위로 안배해 뜻밖의 상황에 대비하게 하도록.”

명령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도시 방위군의 각 부서로 전달되었다. 어찌나 말을 많이 했는지, 포카스는 입술이 다 바짝 마를 지경이었다.

마침내 전화기를 내려놓은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야 할 일은 이미 다 해둔 상태였다. 정말로 대규모의 혼란이 발생한다면 세워둔 방안에 따라 절차를 하나씩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똑똑똑-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장군복 차림의 포카스는 의자 등받이에 편히 기대며 말했다.

“들어오게.”

끼익-

나무 문이 열리고 복도의 노르스름한 불빛이 어둑한 서재로 밀려들었다.

밖은 고요했다. 저택 안 인원 대부분은 이미 다 잠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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