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75화 (475/649)

475화. 일시 정지

이내 조금 전 백새벽을 데리고 달아나는 데 실패한 용여홍은 몸을 꼿꼿이 세웠다. 멀찍이 자리한 습격자를 제압하려는 동료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피부가 굉장히 예민해진 걸 깨달았다.

주위 공기가 조그만 손이 되어 군용 외골격 장치로 덮이지 않은 몸 부위를 간질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부드럽고 상쾌한 바람 같은 이 정도 자극에 격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용여홍의 피부는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는 마치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간질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몸을 배배 꼬며,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표정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잔인한 형벌이었다. 용여홍은 더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조종할 수가 없었다.

백새벽도 용여홍이 뭔가 이상하단 걸 알아차렸지만 그 까닭은 몰랐다.

그러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용여홍을 지금의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백새벽은 고통으로 상대를 자극해보기로 했다. 원래는 잠이나 환각에 빠진 상대를 깨울 때 쓰는 방법인데, 용여홍에게도 효과적일지는 미지수였다.

한편 장목화는 성건우의 기침 소리를 듣고, 곁눈으론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얼굴로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용여홍을 확인했다.

‘그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 물질 간섭을 아주 다양한 형태로 하고 있네. 계속 이대로 갈 순 없어. 가진 방법이 이게 전부래도 자꾸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우린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거야.

다른 건 차치하고 강제 입면이 계속 반복되는데 우리가 매번 때맞춰 깨어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잖아. 언젠가 몇 초라도 늦게 깨어났다가는 곧바로 멀리 있는 습격자의 과녁이 될 거야. 우리가 기계 승려도 아닌데 우리 몸으로 총알, 유탄, 바주카포를 어떻게 막아내겠어?

젠장, 주위 곳곳에 생물 전기 신호가 있어서 그 사람이 어딨는 건지 판단이 안 돼. 건우가 감지할 수 있는 인간 의식도 마찬가지겠지. 그건 총알의 궤도를 통한 계산, 초강력 시야, 군용 외골격 장치의 보조를 바탕으로 한 포착과는 전혀 다른 능력이니까.

그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를 찾지 못하면 반격하려 해도 할 수가 없어. 눈만 뜬 채 한 걸음, 한 걸음 궁지로 걸어 들어가는 거지.’

짧은 틈에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지만, 장목화는 결국 가장 내리고 싶지 않았던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조 형식으로 흩어져!”

이러면 적어도 팀원 전체가 한꺼번에 몰살되는 경우는 피할 수 있었다.

최악보다는 차악을 택한 것이었다.

* * *

구조팀과 직선거리가 100미터도 안 되는 어느 아파트 3층에, 카오라는 한 남자가 있었다. 각도 때문에 이 방에서는 구조팀이 가까스로 보였지만, 그의 태도는 여유가 넘쳤다. 그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창밖의 구조팀을 주시했다.

그의 머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황갈색인데다 눈동자 색은 파랬다. 곧은 콧대와 멋진 눈썹을 보면 젊은 시절에는 수려한 미남이었으리란 걸 짐작하게 했지만, 중년의 나잇살을 이기지 못한 탓에 지금은 얼굴이 좀 퉁퉁했으며, 입가엔 까칠한 수염도 나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구세계 스타일의 검은색 정장이었다. 그 안에 받쳐 입은 흰 셔츠의 첫 번째 단추는 풀어져 있었다.

“과연 퍼스트 시티의 감시망 아래 출입 암호를 훔쳐낸 팀답네. 기어이 100미터 범위 내로 들어오게 만들다니.”

카오는 상대의 실력에 감탄하긴 했지만, 이미 앞으로의 철수까지 다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상대가 찾았던 수종이라는 기이한 아이가 때맞춰 나타나든 어쩌든, 또 도움을 제공하든 어쩌든, 자신을 막지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의 뒤쪽으로 보이는 긴 소파 위에, 한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카오의 머릿속에 몹시 분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전부 조용히 해!

약간 앳된 티가 어린 목소리는 카오의 심령 세계 안에 울려 퍼졌다.

순간 석상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린 카오는 움직임도,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멍하게 창밖만 보는, 기이할 만큼 안정된 상태에 처해버렸다.

* * *

다시 사파이어색 지프가 전복된 곳엔 성건우는 기침을 겨우 멈췄고, 용여홍도 비로소 끔찍한 간지러움에서 벗어났다.

그 사이 장목화, 백새벽, 주세페는 주변의 놀라운 변화를 목격했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던 행인들이 마치 급브레이크를 밟은 자동차처럼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었다. 더러는 멍하게 안정적으로 서 있고, 더러는 관성을 이기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져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황해 무작정 걸음을 옮기다 넘어진 이들도 찍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거리 양옆에 딸린 건물의 주민 중 안전한 곳에 숨어 바들바들 떨던 이들은 강제로 통제됐고, 총기를 들고 대문과 이어지는 거리로 나온 이들은 마치 돌처럼 모두 다 굳어버렸다.

또 창문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던 이들은 눈을 감고 얼굴을 유리창에 갖다 붙였고, 질서의 손에 전화를 걸던 이들은 수화기를 내려놓는 것도 잊고 들고만 있었다. 반대편에서 계속 ‘여보세요’란 소리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멀찍이 자리한 습격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꿇어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엎드려 있던 그들은 그 자세를 그대로 멍한 눈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느낌이랄까. 이렇게 멈춰버린 사람들 눈빛이 흉악하거나 눈동자가 혼탁했다면, 얼굴에 야성이 드러났다면 용여홍은 이 거리에 무심병이 대폭발한 것이라 의심했을 것 같았다.

현재 구조팀과 주세페를 제외한 모두가 찰나의 순간 무심자가 돼버린 것 같았다. 구세계 파괴 당시에나 나타났을 법한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장목화, 백새벽, 용여홍, 주세페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성건우가 기쁘고도 놀라운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수종이!”

용여홍은 수종이의 실력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장목화 역시 쿵쾅대는 심장을 안은 채 소리쳤다.

“일단 수종이가 있는 곳으로 가자!”

이 구역에 일어난 기이한 변화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각종 방해가 사라진 이 틈을 타 성건우는 주세페를, 용여홍은 백새벽을 데리고 이동했다. 장목화는 그 뒤를 바짝 따르며 조금 더 힘을 내 수종이 머무는 아파트로 돌진했다.

전부 속도를 늦추지 않고 뛰어오르거나 내달리면서 단숨에 5층까지 올랐다. 수종이의 집은 잠금장치 없이 닫혀 있기만 했다.

* * *

노란 옷을 입은 수종이는 게임기와 휴대용 컴퓨터를 빨간 책가방에 챙겨 넣으며 입술을 한껏 내민 채 투덜거렸다.

“저 나쁜 놈들! 이곳이 드러나 버렸잖아! 여기 더 못 있게 됐어!”

이 무심자의 왕은 꼭 구세계 PC방에서 한창 게임을 하다 부모님이 찾는다는 이야기에 뾰로통해진 아이 같았다.

“그래, 얼른 이동하자!”

수종이와 진한 우정을 나눈 성건우가 단번에 응했다.

성건우와 용여홍이 수종이를 도와 짐을 싸는 와중, 머리를 굴리던 장목화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가는 길에 그 못된 사람 붙잡을까? 안 그러면 또 우릴 추적할 거야. 네 위치가 또 폭로될지도 몰라.”

잠시 고민하던 수종이가 답했다.

“좋아! 그놈한테 일을 시켜 돈을 벌게 할 거야!”

“⋯⋯.”

모두가 멍해진 사이, 성건우와 수종이만 열심히 짐을 다 쌌다.

이후 성건우는 다시 주세페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수종이는 자신의 어깨에 앉혔다. 수종이는 매우 신난 얼굴로, 성건우를 잡지 않은 손을 휘둘렀다.

“출발!”

* * *

구조팀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계단을 이용하지도 않았다.

백새벽을 챙긴 용여홍은 장목화를 도와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이후 건물의 불룩 튀어나온 부분에 도움닫기를 해가며 점프 두 번 만에 거리에 착지했다.

쿵!

뒤이어 성건우도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낯빛이 변한 수종이가 성건우의 어깨에서 냅다 뛰어내리더니 옆쪽 골목길로 달려갔다.

“늦었어. 난 먼저 갈게! 너희는 알아서 그 나쁜 놈 잡아. 그 녀석한테 미친 영향은 앞으로도 한동안 남아있을 거야⋯⋯.”

잔상이 남도록 달음박질하는 아이의 모습에, 용여홍은 순간 자신이 환각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수종이의 모습은 단 1, 2초 만에 구조팀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계속해서 아이가 남긴 말만 귓가에 맴돌 뿐이었다.

“이두형 선생님이 근처에 도착했나?”

장목화가 가장 합리적인 추측을 내놓았다.

사실 수종이 옆쪽 골목길로 달려 들어갔을 때 장목화는 때맞춰 저지할 수 있었다. 지금 달리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없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수종이를 불러 데려가 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군용 외골격 장치와 개조된 지프가 있으니 아이 혼자 도망칠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순간 장목화는 망설였다. 수종이의 반응으로, 그녀는 이두형이 흔적을 쫓아 이미 이 근처에 이르렀음을 짐작했다.

만약 구조팀이 수종이를 붙잡은 채 이두형을 피하지도 않는다면, 그 둘이 맞닥뜨린 순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될 터였다.

어느 쪽이든 구조팀으로서는 직면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게다가 수종이도, 이두형과도 어느 정도 친분을 맺고, 그들로부터 적잖은 호의도 받았었다.

그렇게 난처한 상황에서 어느 한쪽을 택한다면 이후 다른 한쪽으로부터 상당한 미움을 사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성건우의 충동성까지 감안한다면, 이럴 땐 이기적으로 구는 편이 훨씬 나았다.

결국 장목화는 골목길 안쪽으로 빠르게 달아나는 수종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휴, 인간은 언제나 이렇게 탐욕스럽다니까. 지금도 양쪽 모두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잖아.’

어린아이 같은 수종이의 외양 때문인지, 장목화는 오랫동안 마음속 죄책감을 떨치지 못했다.

그녀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은 수종이의 상태가 범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전력을 다해 달리는 아이의 속도는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상태로 발휘할 수 있는 최대 속도만큼이나 빨랐다.

그러니 구조팀과 함께하지 않아도 수종이의 안위에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이두형 선생님⋯⋯.”

성건우가 얼른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 골동품 학자의 인영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그는 소원을 빌었다.

“수종이가 무사히 도망쳤으면 좋겠는데⋯⋯.”

이두형과 수종이 사이에서 확실히 성건우의 입장은 한쪽으로 기운 듯했다. 그가 더 친밀하게 여기는 상대는 이두형이 아니었다.

‘근데 수종이가 정말로 무심자의 왕이라면, 그 주위에 잠재된 위험은 어마어마해. 차라리 이두형에게 감시당하는 게 제일 좋은 선택인지도 몰라.’

용여홍 역시 사방을 둘러보다가 일시 정지 버튼이 눌린 듯, 혹은 무심병에 감염된 듯 꼼짝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수종이가 원하기만 하면 무심병 대폭발을 한 번 더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했다.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수종이를 감시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었다.

물론 수종이가 아직 나쁜 마음을 먹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감시는 더 인간적이고 인도주의적이어야 했다.

수종이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았다. 방, 전기, 물, 게임, 음식 정도면 충분했고, 그를 방해하지 않고 애완동물들을 잘 보살펴주기만 하면 될 터였다.

“지금도 그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에게 반격해야 할까요?”

옆쪽 골목길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백새벽이 빠르게 물었다. 반격하든 안 하든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종이가 떠났으니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용여홍이 곧장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필요가 없다는 건, 사실 너무 위험하고 자신도 없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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