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9화. 방송
장목화는 이내 전보의 두 번째 줄을 읽었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호움 난임 센터를 한 번 탐색하는 것을 고려해볼 것. 탐색할 때 아직 운행 중인 기기에 주의하도록.”
“헉⋯⋯.”
흠칫 놀란 용여홍이 찬 숨을 들이마셨다. 회사에선 지금껏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불모지 13호 유적의 비밀 실험실에 대해서도 구조팀에게 그곳을 탐색하라는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었다.
“역시 회사는 난임 치료에 훨씬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네요.”
성건우의 생각은 이번에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장목화가 웃었다.
“회사는 두 지역의 위험도가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하나 봐. 그 비밀 실험실에선 구조팀 10팀이 가더라도 전멸해 아무 수확이 없을 수도 있지만, 호움 난임 센터에선 조금 조심하기만 하면 뭔가 얻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 거지.”
적어도 수정의식교의 승려들에게 호움 난임 센터에 가서 의식을 거행하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그곳에서 뭔가를 건드리지 않는 한. 큰 위험은 없으리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수정의식교 승려들이 다니는 길 역시 상당히 안전할 터이니, 아직 운행 중인 기기가 있을 가능성도 매우 낮았다.
용여홍은 별 의심 없이 팀장의 추측을 인정했다.
“하긴 그렇겠네요. 가보실 거예요?”
“상황 봐서. 우린 아직 갇혀 있잖아. 어디를 갈지 말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겠어?”
장목화가 문을 가리켰다.
“그렇죠. 호움 난임 센터가 발이 달려서 어디로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언제 가든 상관없겠죠.”
용여홍은 솔직히 성건우가 심령의 복도에 진입한 뒤에 그곳에 가고 싶었다.
“망했네. 다리가 생긴 단서가 도망치게 생겼어.”
성건우가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차라리 잘된 거 아냐? 단서는 보통 위험하다고!’
용여홍이 속으로만 대꾸했다.
그때, 바깥의 여러 거리에서 동시에 방송이 울렸다.
- 긴급입니다, 긴급입니다. 주민 여러분, 내일 오전 9시에 희망 광장으로 나와 중요 집회에 참여해주십시오.
레드울프 구역에 자리한 희망 광장은 퍼스트 시티가 건립되었을 당시 구세계 어느 광장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뒤 지금과 같은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곳엔 오레이, 드라세, 카스 등의 건립자 석상이 설치돼 있고, 퍼스트 시티 주민 제도의 상징인 그들은 종종 부근의 원로원과 아울러 칭해졌다.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된 방송 이후, 구조팀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퍼스트 시티에 나름 익숙한 백새벽은 창가로 다가가더니 약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 난 모양이에요. 일반적인 상황에 이렇게 긴급하게 주민을 소집해 집회를 거행하진 않거든요.”
장목화는 생각에 잠겼다.
“퍼스트 시티 정세 균형이 깨지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걸까?”
이는 구조팀이 기대해온 일이자 두려운 상황이었다.
퍼스트 시티에 혼란이 일어난다면 구조팀은 그 틈을 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다만 그런 상황에서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라도 스스로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었다. 전란 속에서는 모두가 위험했다.
성건우, 용여홍은 백새벽 곁으로 다가가 바깥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불균형하게 밝혀진 등불의 빛들이 내려앉아 있지만, 주위는 그저 고요하기만 할 뿐 소란의 조짐 같은 건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15분 정도가 흐를 때까지 모든 것은 여전히 정상이었다.
팀원들 뒤쪽에 서 있던 장목화가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집회가 내일 오후에 열린다는 건 그리 급한 상황은 아니란 거겠지.”
그때,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백새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잔나가 대사예요.”
“뭐?”
장목화가 얼른 그 옆으로 다가갔다. 아래엔 비쩍 야윈 승려가 시커먼 오토바이를 타고 서남쪽으로 질주하는 것이 보였다.
“잔나가 대사가 이 시간에 외출하다니. 방향을 보면 골든애플이나 레드울프의 중요한 장소로 가는 것 같은데. 암류가 들끓고 있는 게 분명해.”
성건우가 곧장 물었다.
“드디어 우리가 도망칠 기회가 온 걸까요?”
그의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잔나가가 잠시 시카라 사원을 떠났다면 구조팀도 충분히 도주를 고려할 수 있었다.
덩달아 기대한 듯한 백새벽과 거기에 두려움까지 안고 있는 용여홍을 본 장목화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은 때는 아니야. 지금 퍼스트 시티에는 암류가 들끓고 있어. 수정의식교 역시 통지를 받은 모양이니 경계를 강화할 게 분명해. 여긴 그들의 본부잖아.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몇이나 있을지 몰라.
겉보기엔 여유로워 보여도 실제론 그렇지도 않고, 우리가 도망에 성공할 가능성은 극히 낮아. 어쩌면 그러다 누군가의 화만 돋울 수도 있고.”
사실 시카라 사원이 수정의식교의 본부라는 걸 알게 된 후, 장목화는 도망에 영 자신이 없어졌다. 얌전히 열흘의 기한을 다 채우는 것이 가장 좋고 온당한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녀도 지난 며칠은 팀원들이 도망칠 기회를 엿보도록 방임하고 심지어는 그 일에 협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한편에 퇴로를 남겨놓기 위한 것과 또 한편으론 팀원들이 이런 상황에서 후각과 판단력을 단련할 수 있도록 훈련의 하나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며칠 전에 있던 그 기이한 사건을 잔나가를 비롯한 원각자들에게 알리지 않은 건 구조팀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타심통 아래 숨길 수 있는 비밀 역시 많지 않았다. 때가 되면 잔나가는 그들에게 이곳에 더 오래 머물러 있기를 요구하는 데 그치더라도, 다른 승려들은 구조팀을 아예 죽여 입을 다물게 하는 걸 원할지도 몰랐다.
자세히 고민해보던 백새벽이 장목화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요. 진정한 기회는 내일 아니면 모레 오겠죠.”
그때쯤 퍼스트 시티는 아마 혼란에 휩싸일 것이었다. 그럼 잔나가에게도 더는 구조팀을 이곳에 구금할 명목이 없었다.
성건우는 아쉬운 듯 시선을 거둔 뒤 다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로부터 거의 15분쯤 더 지났을 무렵,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곧이어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방문자는 구조팀 식사를 담당하는 젊은 중 단로였다.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한 단로가 염불을 외웠다.
“시주님들, 절 따라 잠시 뒤쪽 광장에 가 계셔야겠습니다. 원각자들이 공동으로 내린 결정입니다. 걱정은 마십시오. 사원 안의 승려들도 거의 다 광장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죠?”
용여홍이 물었다.
‘동란이 시작되려는 건가?’
단로가 고개를 저으며 목소리를 대폭 낮췄다.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매해 이맘때쯤 이런 일이 몇 번 일어납니다. 소문으론 7층에 봉인된 그 악마의 힘이 주기적으로 최고 수준까지 회복되어 이 건물 내 모든 승려에게 영향을 미친답니다.
원각자들은 부처의 응신에 협조해 그 악마를 제압하는 동안 우리에게 신경 쓸 수가 없어서, 나머지 승려는 광장으로 잠시 대피해야 하는 것이죠.”
“그렇군요.”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까지 들은 마당에 더 이상 시카라 사원 안에 머물러 있기를 고집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다시금 성건우, 백새벽, 용여홍을 한 번씩 돌아보며 주위 환경에 주의해야 하고, 절대로 7층에 가면 안 된다는 눈빛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용여홍은 주세페의 몸에 묶여 있는 밧줄을 푼 뒤 그를 부축했다.
* * *
단로를 따라 아래로 내려간 구조팀은 화장탑이 세워진 광장에 이르렀다.
하늘은 무척 어두워져 있었다. 광장 위 곳곳에 배치된 등불로는 모든 공간의 어둠을 다 밝힐 수 없었다.
구조팀은 광장 중앙에 도착한 뒤 뒤돌아 시카라 사원을 바라보았다.
이 7층짜리 건물 안의 여러 방은 아직 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그 불빛들이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밤의 장막 아래, 온 시카라 사원이 흔들리고 있는 듯했다.
용여홍은 일찍이 무슨 일이 날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광장에 이러한 떨림이 없었다면 그냥 지진이 난 줄 착각했을 것 같았다.
“전에도 이랬나요?”
아무런 답변이 돌아오지 않자, 용여홍이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어둑한 가로등 빛 아래, 단로는 제자리에 서서 7층 높이의 시카라 사원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용여홍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용여홍은 단로의 시선을 끌고자 큰소리를 냈다.
“야!”
“난 왜 불러?”
성건우가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단로 역시도 느릿하게 몸을 돌려 용여홍을 마주했다.
어둠이 드리워진 얼굴, 멍한 눈과 뻣뻣한 표정……. 단로는 갑자기 7층에서 내려온 회색 가운 차림의 승려들처럼 변한 것 같았다.
심장이 철렁한 용여홍은 주세페를 부축하던 손을 풀고 저도 모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 사이,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용여홍은 서서히 주위를 훑었다. 광장으로 피난 나온 수정의식교 승려들은 마치 해바라기처럼 일제히 자신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멍하니 서 있거나 밤의 장막이 엷게 내려앉은 얼굴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사람이라기보단 꼭 조각상처럼 생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승려들은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구조팀을 응시하고 있었다.
구조팀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팀장님,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용여홍이 장목화에게 말하려던 그때, 그녀가 명령을 내렸다.
“옆문으로 이동해. 뛰지도, 돌아보지도 말고 한 걸음씩 천천히 가.”
그녀는 격한 반응이 연쇄적인 변화를 초래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장목화의 말뜻을 잘 이해한 백새벽과 용여홍은 각자의 무기를 가지고 몸을 반쯤 틀었다. 그리고 폐쇄식 광장 옆에 난 출구로 조금씩 걸음을 뗐다.
광장 밖은 시카라 사원에 속한 주차장이었다. 지프도 그곳에 있었다.
수정의식교 승려들은 뻣뻣하게 구조팀을 바라볼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따로 저지하지도 않았다.
성건우는 대열 맨 뒤에서 팀원들을 보호하며 천천히 철수를 시작했다.
그는 용여홍과 백새벽처럼 몸을 반쯤 트는 대신 먼저 왼손을 들어 머리에 얹고 오른손은 복부에 내려놓았다.
준비 동작을 마친 성건우는 문워크를 통해 광장 옆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엄청난 의식을 치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찬가지로 대열 뒤에서 팀원들을 지키던 장목화도 성건우를 목격했다.
“…….”
정말 욕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듯했다.
승려들은 춤추는 성건우를 멍하니 보면서도 뻣뻣한 침묵을 유지했다.
그렇게 성건우는 백새벽과 주세페를 부축한 용여홍을 따라잡고서 조그만 한숨을 내쉬었다.
“휴⋯⋯.”
“왜 그래?”
용여홍이 잔뜩 긴장한 눈으로 물었다.
“저 사람들이 손뼉을 안 쳐주잖아.”
매우 실망한 듯한 성건우를 보던 용여홍의 입꼬리가 살짝 뒤틀렸다.
“⋯⋯너 스스로한테 또 억지쟁이 능력을 발휘한 거야?”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이건 저 사람들 예의 문제야.”
맨 처음에만 해도 성건우는 거울을 이용해야만 스스로에게 추리 광대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억지쟁이로 만들기 위한 조작은 더 복잡했다. 일단 추리 광대로 스스로와 특정인이 같다고 여기게 한 뒤, 상대를 억지쟁이로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성건우가 아홉으로 나뉠 수 있게 되고, 서로 간 독립성이 점점 강해져 스스로를 볼 수 있게 된 후론 조작이 훨씬 간단해졌다.
구체적인 단계를 말하자면 첫째론 심령 세계 속 아홉 성건우는 일단 행운아 한 명을 골라 추리 광대나 억지쟁이를 발휘했다. 다음으론 그를 내보내 육신의 통제를 맡기는 것이었다.
다들 활력이 넘쳐서 수시로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타인의 미움을 사거나 잘못도 저지른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런 대가는 어느 정도 유용한 데가 있었다. 심지어는 차으뜸의 피동적인 매혹과도 비등했다.
수정의식교 승려들은 조각상처럼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멍하니 구조팀원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를 보고, 장목화는 옆문을 바라보며 두 번째 명령을 내렸다.
“주차장으로 가.”
그들이 가진 장비 대부분은 차에 있거나 몸에 지니고 있었다. 무선 통신기만 시카라 사원 6층 방에 남겨두고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연락할 때 필요한 주파수와 코드북이지, 무선 통신기야 또 얼마든 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