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독창(毒瘡)
구조팀과 이두형이 침대 가장자리, 책상, 의자 등 방 곳곳에 각자 자리를 잡자 성건우가 곧장 물었다.
“이두형 선생님, 저는 제 자신과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비등해요. 그렇다고 그와 화해할 수도 없습니다. 애초에 갈등이랄 게 없었거든요.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두형은 입가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약간은 뿌듯함이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질문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자아의 포용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다면, 애쉬랜드 위의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겠죠.
저는 당신 대신 선택할 수도, 당신에게 직접 방안을 내줄 수도 없습니다. 각자 마음은 서로 다릅니다. 다른 이를 흉내 냈다간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제 개인적인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일단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의 공통점을 찾으세요. 당신들이 공통으로 하고자 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거기에서부터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이두형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심령 세계는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라, 다른 누군가와 같을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이후 짧은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망설이던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이두형 선생님, 혹시 불모지 13호 유적에 가본 적 있나요?”
이두형은 진지하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마도 가봤을 겁니다.”
아마도? 눈동자를 굴리던 용여홍은 곧 이두형의 기억에 온전치 못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럼 오하명이라는 사람을 아시나요?”
장목화가 보다 심층적인 질문에 나섰다.
“들어는 봤습니다. 왜요, 여러분은 그 사람을 만나보셨습니까?”
별 확신 없이 답한 이두형이 웃으며 물었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한 마디씩 주고받듯 리만을 통해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을 듣게 된 것과 흰 늑대를 쫓던 끝에 불모지 13호 유적에 들어가게 된 것, 그곳에서 영향을 받아 자살할 뻔했던 위기까지 다 이야기했다.
다만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 프로그램을 녹음했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일에는 수종이도 연루돼있기 때문이었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이두형이 입가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능력의 이름은 아마도 사유 이식, 혹은 잠재의식 사유일 겁니다. 어쩌면 오하명은 그 두 능력을 다 갖추고 있을지도 모르죠. 이런 능력이 전자파에 대한 어느 정도 장악력과 결합한다면,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국 프로그램과 같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겁니다.”
“어느 영역에 속하나요?”
성건우가 물었다.
“장생이죠.”
이두형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장생이라. 장생 영역의 각성자가 심령의 복도에 진입하면 전자파에 간섭할 수 있게 되는구나.’
장목화가 성건우를 힐끔 돌아보았다.
성건우는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쳤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짙은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나중에는 전신 사기도 현실이 될지 모르겠는데.’
장목화가 성건우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이두형도 불모지 13호 유적에 관심이 있는지, 구조팀에게 그곳을 관찰한 결과를 묻기 시작했다.
한참 뒤, 하늘의 색을 살핀 이두형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다른 일이 있어 가봐야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시죠.”
구조팀은 그를 따라 일어나 그를 계단 입구까지 배웅했다.
헤어지기 직전, 장목화가 웃으며 농담을 했다.
“이두형 선생님, 불모지 13호 유적은 지금의 저희로서는 탐색할 수 없는, 아주 위험한 곳이라는 말씀은 안 하시네요.”
2초간 침묵하던 이두형은 구조팀을 슥 훑어본 뒤 자조하듯 웃었다.
“원래는 그렇게 말씀드릴 생각이었는데, 결국 포기했습니다. 오하명 같은 사람, 그런 존재는 이 세상의 독창(毒瘡)이고, 썩은 살이에요. 계속 방치한다면 더 심하게 썩어 상황만 더 악화되겠죠.
그렇다고 신경 쓰려면 어마어마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동귀어진(同歸於盡)하게 될 수도 있고, 헛된 희생만 하게 될 수도 있어요.”
“전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성건우가 매우 엄숙하게 대꾸했다.
흠칫 놀라는가 싶던 이두형은 웃으며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에게 말했다.
“혹시 왜 당신이 나서서 처리할 생각은 안 하냐고 생각하시나요?”
“아뇨.”
장목화와 백새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장목화가 보기엔 오하명 같은 사람, 그런 존재는 이 세상의 독창이고, 썩은 살이란 말이 숙고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용여홍은 따라 고개를 저으면서도 조금 찔리긴 했다.
“제가 지금 하는 일에도 사실 그런 방면의 의의가 있습니다. 아마도요.”
이두형은 손을 휘휘 흔들며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수종이를 가리키는 말인가?’
장목화도 함께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 * *
북안 불모지, 이른 아침을 맞은 도시 유적.
피범벅이 된 살점과 잡초로 뒤덮인 길 곳곳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게네바는 왼팔의 유탄발사기로 전방을 조준해 한참을 관찰했다.
“변이 생물들은 전부 이 구역에서 다 물러났다.”
소총을 쥔 한명호와 쌍권총을 든 정도연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이들은 수많은 변이 생물의 습격을 받았다. 개중에는 기이한 능력을 가진 존재도 몇 포함돼 있었다.
한명호는 그런 능력에 면역된 게네바가 없었다면, 자신과 정도연이 아무리 화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한들 화를 피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두 사람은 비로소 ‘생명 금지 구역’이란 것이 무엇인지 깊이 깨달았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주로 인간을 가리켰다.
“가지.”
게네바는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그가 재촉하는 것은 이곳이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명호와 정도연이 오염된 환경에 노출된 시간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묵직한 SUV가 도시 유적을 빠져나가는 와중, 보조석에 앉은 한명호가 운전 중인 정도연을 바라보았다.
“만약 네 병이 낫고 내 심장 문제도 더 나은 해결 방법이 생긴다면, 뭘 할 계획이야?”
정도연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뭘 할 계획이냐고? 더 많은 도우미를 찾아 마을 사람들을 구해야지. 그들을 데리고 새로운 거점으로 가서 유전자 약물을 생산할 수 있는 조직과 연락할 방법을 찾을 거야. 아이들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 대목에서 정도연이 돌연 탄성을 뱉었다.
“왜 그래?”
한명호가 물었다.
정도연은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변이 생물들의 유해, 값이 꽤 나갈 텐데 그걸 가져오는 걸 잊었어.”
“지금 돌아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
뒷좌석의 게네바가 경고했다.
“그건 알지만⋯⋯.”
정도연의 목소리에서는 강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가까스로 마음을 달랜 그녀가 한명호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런 이상한 질문은 왜 한 거야?”
“갑자기 떠올라서.”
한명호의 답은 매우 간결했다.
정도연 역시 더는 무엇도 묻지 않고 전방 도로 상황을 집중해 살폈다.
* * *
오후, 레드울프 구역, 로스타 스트리트 19호.
직속 상사의 전화로 소환받은 월이 질서의 손 본부에 도착했다.
“무슨 일입니까?”
레드울프 구역 질서관 트레비스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 양손으로 빨간 만년필 하나를 집어 든 뒤 무심하게 답했다.
“전에 그 시민 집회 폭발 사건의 범인을 잡았잖아? 지난 며칠간 그 자한테 찾아낸 단서를 바탕으로 몇 사람 더 잡아들인 끝에 수확을 좀 얻었어. 이 사건은 아무래도 바로 원로가 구세군과 결탁해 벌인 짓 같아.”
‘바로 원로? 전에 반 지성교, 구세군과 합작했다는 이유로 붙잡혔지만 아직도 유죄판결이 나지 않은 그 바로 원로? 그는 집정관 조수인데⋯⋯.’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월은 곧 트레비스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깨달았다. 본인을 통해 이 정보를 월의 장인어른이자 동쪽 군단 군단장, 원로원 변혁파 대표인 가이우스에게 전하려는 것이었다.
순간 월은 퍼스트 시티에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는 장인어른이 동쪽 군단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태 퍼스트 시티에 남아있던 이유까지 알게 되었다.
* * *
카시라 사원.
저녁을 먹고, 구조팀은 앉거나 누워 회사와 연락 시간까지 기다렸다.
성건우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 양쪽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원의 바다로 떠나려는 것이었다.
황금 엘리베이터가 있는 섬에 도착한 성건우는 회색 카무플라주 제복을 입은 자신을 응시하다가 아홉으로 분열돼 상대를 포위했다.
그중 한 성건우는 고개를 들어 허공에서 햇빛을 번득이는 균열을 바라보더니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은편 그 사람과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오도록 초청하는 게 어때? 내가 생각해봤는데, 우리 사이의 가장 큰 공통점은 전부 자신을, 이 육체를 중시하고 앞에서 주도하고 싶어 한다는 거야.
다른 방면으로는 의견 차이가 커서 서로 협조하지 못하면 위기를 맞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까지 올 수도 있어. 그럼 다들 대립을 포기하고 공동의 적을 막으려 전략적인 동맹을 맺으려 하겠지. 그렇게 포용할 수 있을 거야.”
이 성건우의 의견에, 아홉 성건우 중 하나가 반박했다. 그는 이렇게 급진적이고 위험한 책략에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쳤냐? 맞은편 그 사람은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야. 어쩌면 더 깊은 곳까지 탐색했는지도 몰라. 그 사람이 여기 강림하면 우리가 살 가능성은 10퍼센트, 아니, 1퍼센트도 안 된다고! 이건 모험이 아니라 자살이야!”
또 다른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게다가 모두가 위험한 상황에 합작을 택하진 않아. 어떤 사람은 음흉하게도 그 기회를 틈타 나머지 모두를 배반하려 할지도 모르지. 그런 녀석들은 언제나 요행심을 마음에 품고 그런 상황에서 나타날 문제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 결과는 대개 반대인데도 말이야.”
이야기를 하는 사이 그는 빌런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아홉 성건우는 쉬지 않고 논쟁했지만, 의견을 일치시키진 못했다. 일단 그 사람을 초청하는 방법만 포기하기로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빌런 성건우를 빤히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기원의 바다에서 돌아온 성건우는 잠시 후 반고 바이오가 구조팀에 보낸 전보를 확인했다. 전보의 내용은 단 두 줄로 많지 않았다.
「‘호움’은 불모지 13호 유적 안에 있는 호움 난임 센터로 여길 것.」
“회사에서도 5대 성지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나 봐. 적어도 호움 난임 센터가 그중 하나란 건 알고 있는 것 같아.”
장목화가 약간 이상한 듯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반고 바이오가 철강 공장의 이상을 알았다고 볼 순 없지만, 구조팀의 감정은 상당히 복잡해졌다.
백새벽이 망설이다 생각을 밝혔다.
“어쩌면 회사에서 파악하고 있는 건 5대 성지에 관한 정보가 아닐지도 몰라요. 호움 난임 센터에는 다른 이상 현상이, 다른 방면으로의 유명세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구세계가 아직 파괴되지 않았을 당시 호움 난임 센터에서도 유전자 선별, 개량, 치료 등의 연구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회사가 가진 관련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그들의 공로 덕분인지도 몰라.”
반고 바이오가 그곳을 알고 있는 건 바로 그 때문일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