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오랜 친구
아침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가져갈 단로를 기다리는 동안, 구조팀은 방에서 나와 산책하듯 계단 입구로 다가갔다.
그 승려의 시신이 있던 곳을 힐긋 살폈지만 놀랍게도 그곳은 깨끗했다. 심지어는 시체에서 흘러나온 것들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시체를 옮기고 계단을 청소했을까. 그것도 이건 아주 일상적인 일이라 오늘 당직을 맡은 원각자에게 알릴 필요도 없다는 듯이.’
용여홍이 시선을 거뒀다. 만약 목에서 느껴지는 이 불편함이 아니었더라면 오늘 이른 아침에 겪은 일은 단순한 환각이었다고 착각했을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오던 그때, 구조팀은 카시라 사원 뒤에서 웬 소리를 들었다.
“헉헉…….”
퍽! 퍽!
사실 그들은 지난 며칠 동안에도 이와 비슷한 기척을 어렴풋이 느낀 바 있었다. 다만 그때는 6층 복도를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받진 못해서 구체적인 상황을 관찰할 수는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성건우는 누구보다 먼저 맞은편에 활짝 열린, 아무도 없는 선방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 창문 앞에 이른 구조팀원들은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런 색도 없는 유리창 너머로, 우뚝 선 화장탑이 자리한 밀폐식 광장이 있었다. 그 광장 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회색 가운 차림 승려들은 저마다의 일에 몰두 중이었다.
개중엔 검은 반자동 소총을 쥐고 멀찍이 자리한 과녁을 향해 사격하는 이도 있고, 쌍권총을 가지고 정확도를 훈련하는 이도 있었다. 또 계속 바벨을 들었다 내리길 반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광장 가장자리를 달리며 서로를 쫓는 이도 있고, 글러브를 낀 채 동문과 대련을 하는 이도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용여홍은 그야말로 흠칫했다. 이건 아무래도 사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행동 자체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데, 회색 가운을 입은 승려들이 하기에는 좀 이상한 감이 있었다.
‘불가 사원 안에서 이뤄지는 아침 일과는 보통 참선과 예불 아니었나? 저 사람들은 왜 사격과 격투 훈련을 하는 거지?’
순간 용여홍은 언젠가는 이 사원에서 온몸에 탄띠를 두르고 기관총을 쥔, 오일로 번득이는 근육을 자랑하는 스님이 나올 수도 있겠다고 경계했다.
‘나무 개틀링 보살이라는 염불을 욀지도 모르지.’
이내 장목화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정의식교에서는 육신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으며, 정신의 수양이야말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던가?”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구조팀의 머리에 잔나가의 음성이 울렸다.
- 정신이 제대로 갖춰지기 전까지는 육신도 중요합니다. 수영을 배우기 전까지는 튜브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과 같지요. 맹목적으로 육체를 포기하고 쇠약해지게 뒀다가는 물에 잠기기 마련입니다.
“사격까지 훈련하는 이유는요?”
성건우가 물었다. 이는 정말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잔나가는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 정신 방면의 수행은 단순히 참선만으로 완성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교파 승려들은 일정 단계에 이르면 모두 사원을 떠나 애쉬랜드 곳곳을 순례해야 하지요.
그 과정에서 신체가 건강하지 못하고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면 목숨을 잃기 쉽습니다. 그럼 더는 정신을 단련한 기회도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빈승과 같은 나이에 이르고 불법 상의 깨달음을 어느 정도 얻은 후에야 육신 껍데기에 대한 요구를 내려놓을 수 있지요.
‘상당히 실용주의적이네.’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곧이어 용여홍이 못 참겠다는 듯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저렇게 뼈밖에 안 보일 정도로 마른 잔나가 대사도 젊었을 때는 근육이 우락부락했을까? 주먹 한 방으로 사람을 때려죽일 수 있는 대머리 장골이었을까? 아니면 온몸에 탄띠를 두르고 기관총을 쥔 채 오일로 번득이는 근육을 자랑하는 승려가 바로 잔나가 대사였을까?’
참 아름다운 그 장면이 더 그려지진 않았다. 다만 용여홍은 검은 오토바이를 아끼던 잔나가를 생각하면 그 가능성도 아예 없진 않을 거라 여겼다.
한동안 수정의식교 승려들이 아침 단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구조팀원들은 곧 방으로 돌아갔다.
이날 역시 도망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고, 서서히 저녁이 찾아왔다.
구조팀은 시간에 맞춰 전보로 지난 이틀간 일을 회사에 알렸다.
유혹당해 위층으로 올라갔다는 것, ‘호움’이란 단어를 들었던 것도 언급했지만 자신들의 추측은 전하지 않았다.
* * *
북안 불모지, 식물이 우거진 도시 유적 안.
건물 잔해를 칭칭 에워싼 덩굴들은 참 굵고도 컸다. 붉은 열매들이 맺힌 푸른 덩굴들은 꼭 서로에게 뒤얽힌 독사처럼 미끈거리고 매섭게 보였다.
이렇게 변이된 식물은 심하게 오염된 이 구역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 사이를 오가는 위험한 변이 동물과 숨은 무심자들도 어렴풋이 보이곤 했다.
게네바는 이미 오염 감지기 소리는 꺼버렸다. 안 그럼 배터리가 다 닳을 때까지 경고음은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너희는 일단 좀 쉬어. 내일 날 밝는 대로 여길 떠나야 한다. 안 그럼 나중에 후유증을 앓게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니 건강이 조금 더 나빠져봤자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미래를 생각해. 치명적인 문제를 해결해 더 살 수 있게 됐는데, 치료하기도 어렵고 치사율도 높은 병을 앓게 된다면 후회되지 않겠어?”
게네바가 전문가 같이 말했다. 그의 말이 감정을 자극하긴 했지만, 한명호도 일리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명호는 바로 정도연을 바라보았다.
“차에 가서 쉬자. 혹시 뜻밖의 상황이 발생해도 곧장 이동할 수 있게.”
이 구역의 위험도는 결코 낮지 않았다. 사냥꾼은 어디에나 있었다.
아직 게네바의 배터리는 나름 충분히 남아있었다. 그래서 게네바도 성치 않은 몸으로 힘겨운 여정을 했던 한명호와 정도연을 생각해 둘 다 잠시라도 쉴 수 있게 한 것이었다.
한명호도 자신의 상태를 감안해 게네바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 * *
또 한 차례 여정을 거친 끝에 한명호, 정도연, 게네바는 장목화가 보내온 전보를 받았다.
자세한 실험 덕에 두 사람의 병세는 더 확실히 파악됐고, 일반적인 방안에 따라 치료받을 희망도 생겼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들은 당장 퍼스트 시티로 돌아가 전면적이고 상세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정도연과 한명호는 모두 놀랍고도 기뻐했다.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 시도나 해보자는 마음을 먹고, 즉각 게네바와 함께 퍼스트 시티로 돌아왔다. 오염이 심각한 구역이 추격자를 따돌리는 데 유용한 몫을 했다.
셋은 구조팀이 수정의식교 시카라 사원의 초청을 받아 그곳에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에 혹여나 뜻밖의 상황이 발생할까 싶어서 맹목적으로 그곳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게네바는 붉은빛이 번득이는 눈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수종이가 있는 곳으로 가자. 큰 흰둥이가 그랬어. 그들에게 뭔가 문제가 생겨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우리는 퍼스트 시티에 돌아오는 대로 일단 수종이부터 찾아야 한다고.”
“그래?”
한명호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합리적인 이야기이기도 했고, 자신도 충분히 생각해볼 법한 대책이었지만, 장목화에게 직접 그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서였다.
게네바는 금속 목을 움직이며 말했다.
“응, 전에 불침번 설 때.”
한명호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종이의 구체적인 정체를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변이 생물과 교류할 수 있고, 구조팀이 그렇게도 중시하는 아이라면 범상치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정도연은 한명호와 게네바를 따라 수종이의 거처로 간 뒤 그 아이를 데리고 시카라 사원으로 향했다.
오랜 시간 퍼스트 시티 주위 구역에서 지낸 유적 사냥꾼답게, 정도연은 그 사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노란 바탕에 흑청색으로 장식된 7층짜리 고층 건물이 눈앞에 나타난 그때,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한바탕 폭우가 쏟아지려는 것 같았다.
* * *
퍼뜩 놀라 깨어난 정도연은 열린 차 문밖을 내다보았다.
옅은 안개가 사방으로 퍼지는 가운데, 희미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정도연은 경험에 근거해 멀지 않은 곳에서 변이된 생물끼리의 사냥과 반격이 진행되고 있거나 변이 생물이 무심자들에 맞서고 있으리라 판단했다.
경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 위험한 생물은 인간 2명을 더 사냥하는 것에 아무 거리낌도 느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한명호도 깨어났다.
그와 정도연은 함께 총을 쥔 채 게네바에게 다가갔다.
어둑한 밤하늘 아래, 정도연은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내 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꿈을 꿨었는데.’
* * *
어느 날 오전, 아침 식사를 마친 구조팀은 6층 복도를 돌아다니며 이용할 수 있을 만한 기회를 찾았다.
그렇게 복도를 몇 바퀴나 돌던 그때, 귓가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닿았다. 7층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발소리였다.
용여홍이 굳은 눈빛을 드러낸 사이 장목화가 말했다.
“두 사람이야.”
“귀신을 제외한다면요.”
성건우가 기이한 방식으로 그녀의 말을 긍정했다.
걸음을 멈춘 백새벽은 경계심이 어린 눈으로 계단 입구를 바라보았다.
성건우는 목을 가다듬으며 자세를 갖췄다. 그러다 고개까지 틀어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장목화의 시선을 느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언제라도 살려달라고 큰소리로 외쳐야죠.”
그로부터 10여 초가 흘렀을 무렵, 계단 입구에 두 인영이 나타났다.
한 사람은 야위어 보일 정도로 비쩍 마른 잔나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구조팀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검은색 가운을 걸치고 머리를 길게 기른 미중년 이두형!
골동품 학자를 자처하는 이 신비로운 남자가 느닷없이 시카라 사원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7층에 올라가기까지 했던 것이었다.
“이두형 선생님!”
성건우가 외쳤다.
그 소리에 고개를 튼 이두형이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들 계십니까?”
“잔나가 대사가 우리가 퍼스트 시티에 혼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잡아 왔거든요. 열흘 동안 구금한다고요.”
성건우는 잔나가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그 어떤 것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이두형은 웃으며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혹시 열흘 안에 처리해야만 하는 급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성건우는 솔직하게 답했다.
“아뇨.”
“그럼 여기서 열흘을 머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밥값과 숙박비도 아낄 수 있잖습니까.”
이두형이 농담하듯 말했다.
장목화는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읽어냈다.
“이두형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일로 여기에 오셨나요?”
이두형은 고개를 돌려 7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오랜 친구를 만나러 왔지요.”
‘오랜 친구? 7층?’
용여홍은 단숨에 두 가지 중요한 단어를 포착했다. 전자는 이두형이 직접 한 말이었고 후자는 상대의 시선과 행동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7층에 있는 것이라면 교대로 당직을 서는 원각자를 제외하곤,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은 승려와 부처의 응신뿐이었다.
장목화는 정신과 육신을 동시에 신세계에 들이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던 이두형의 말과 그의 실제 나이와 겉모습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녀는 이두형이 말한 오랜 친구가 수정의식교의 부처의 응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피었다.
‘이두형은 오랜 친구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간 후 상태가 좋지 않아졌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한 걸까?’
고개를 살짝 끄덕이던 장목화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만 가시려고요?”
그녀는 오랜 친구와 관련된 질문은 하지 않았다. 잔나가가 바로 곁에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구조팀과 이두형의 대화가 애쉬랜드어로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해도, 잔나가의 타심통까지 피할 순 없을 터였다.
“예. 왜 그러시죠?”
이두형이 웃으며 말했다.
“묻고 싶은 질문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지만 답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곳에 있는 승려들처럼요.”
성건우는 언제나처럼 솔직했다.
“그럼 일단 어디 좀 앉을까요?”
이두형이 좌우를 한번 둘러보며 레드리버어로 말했다.
단박에 그 뜻을 알아차린 잔나가는 이 신비로운 골동품 학자와 구조팀 네 사람을 6층에 아무도 없는 선방으로 안내한 뒤 자리를 비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