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우리는 함께 세상 끝에 버려져 떠도는 신세
강소월은 심령의 복도에 방을 하나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방에 잘못 들어간 신룡교의 한 꿈 보호자에게 무심병을 감염시키기도 했다.
“구세계의 파괴와 관련한 특정 소문들과 결합해 보면. 강소월과 철강 공장의 그 식물인간이 연루된 실험은 신령과 관련된 금기를 건드린 건지도 몰라. 이에 화가 난 달지기가 무심병을 일으켜 인류의 지능을 박탈하려 했나?”
장목화는 접했던 갖가지 종말론을 되새긴 끝에, 지금 발견한 것과 연관 지을 만한 것 하나를 택해 나름의 논리적인 추측을 했다.
이를 바탕으로 백새벽이 한발 더 나아간 가설을 내놓았다.
“달지기 보리가 분노를 분출했을 때 이용했던 것이 그 식물인간일까요? 보리의 분노가 시작된 지점이 바로 그 철강 공장이었던 걸까요?”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지금 우리한테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어.”
여태까지도 구세계의 파괴 원인은 추측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때 성건우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사원에서 이런 토론을 하기는 너무 부적합하지 않나요?”
“⋯⋯.”
흠칫 놀란 용여홍은 서서히 겁을 먹었다. 팀원들은 이미 모든 얘기를 입 밖에 내버렸다. 물론 생각만 했어도 잔나가에게 다 들켰겠지만.
그래도 이건 밤낮을 막론하고 고행하며 신실하게 예불을 드리는 스님들에게 일종의 모욕을 준 것 아닌가?
용여홍은 당장이라도 온몸을 꽁꽁 얼릴 듯한 그 끔찍한 추위가 다시 찾아올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내 장목화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확실히 수정의식교 사원에서는 삼가야 할 말이 있으니까. 괜히 그들을 자극해서 불필요한 골칫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고. 거기다 이건 아무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라 더 이상 토론할 필요도 없어.”
용여홍과 백새벽도 연달아 동조했고, 네 사람은 다시 종이에 집중했다.
「3. 빙원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
4. 대강시 임해 마을 어귀 늙은 홰나무 아래.
5. 파흐 지방 호움 난임 센터.」
철강 공장의 등장에 충격받긴 했지만 그 후로 이어진 성지들을 보니 구조팀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이곳들을 정말 성지라고 할 수 있나? 수정의식교 승려들은 이걸 보고도 아무 의심도 안 했나? 이 허황되고 촌스럽고 우스운 느낌의 성지들로는 제대로 된 믿음도 사기 어려웠을 텐데. 누군가 의도적으로 장난친 건가?
무엇보다 보리가 난임 센터에서 세상에 강림했다니, 이렇게나 법칙을 잘 지킬 줄 아는 존재였다고? 아니면 혹시 그곳에서 설법을 했었나? 파흐는 불모지 13호 유적이 자리한 그 지방이잖아?’
한참 후에야 안정을 되찾은 장목화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누군가 장난친 건 아닐 거야.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농담으로라도 연합 철강 공장이 성지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테니까.”
종이에 적힌 정보는 분명 모종의 비밀과 연관이 있을 터였다.
용여홍은 바로 전에 떠올린 의문을 제기했다.
“이 종이를 경전에 끼워놓은 건 누구일까요? 우리가 5대 성지에 대해 묻고, 그게 비밀이란 걸 알게 된 건 오늘 아침 식사도 하기 전이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바로 답을 얻게 되다니, 너무 공교로운 일 아닌가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게 바로 이런 거지!”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장목화는 그를 아래위로 한번 흘긴 뒤, 얼룩덜룩한 벽을 바라보았다.
“이건 누가 쓴 걸까? 우리한테 주려고 만든 걸까?”
그녀의 말에 답하는 이는 없었다.
이를 보고 성건우가 웃었다.
“잔나가도 지금은 우리 마음속 소리를 감청하지 않나 봐요.”
용여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깊은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믿음직한 잔나가라면 그들에게 답을 알려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는 그 종이를 집어 들더니 조심스레 일부 단어들을 잘랐다. 명확한 지향성이 없는 단어들이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따가 밥을 가져오는 승려한테 이 필체를 알아보겠냐고 물어보자.”
이후 구조팀은 경전을 읽거나 가리발디의 금단 현상을 통제하며 점심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 * *
장목화가 젊은 중을 보며 종잇조각 몇 개를 꺼냈다.
“경전에서 이런 것들을 찾았는데, 혹시 누구의 필체인지 알아보시겠어요? 글씨가 너무 멋져서요.”
젊은 중은 종이를 힐긋 살피더니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수석께서 쓰신 거네요. 원래 경전에 초고를 끼워두길 좋아하셨어요.”
장목화의 눈이 살짝 커졌다.
“수석이라고요?”
젊은 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젯밤 열반에 오르신 그분이요.”
구조팀은 순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 광경이 떠올랐다. 사원 꼭대기에서 뛰어내린 노승의 끔찍한 최후가.
그는 미리 특정 경전에 5대 성지를 적은 쪽지를 끼워둔 것이었다.
* * *
북안 뭇산.
게네바를 태운 뒤 한명호가 백미러를 힐긋 보며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저 유적 사냥꾼 팀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나 폐허 마을이 어디지?”
정도연이 즉각 답을 내놓았다.
한명호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목적지로 차를 몰았다.
* * *
이윽고 조그만 폐허 도시에 도착한 뒤, 한명호는 나름 온전한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출입구에 가까운 쪽이었다.
정도연이 이건 너무 과한 반응 아니냐고 물으려는데, 갑자기 바깥 공중에서 드론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이 폐허 도시를 몇 바퀴나 돈 후에야 점차 멀어졌다.
주위 상황을 살피는 게네바를 따라 정도연도 차에서 내렸다.
“아슬아슬했네⋯⋯. 난 대형 세력에 쫓겨본 적은 한 번도 없거든.”
정도연은 그런 방면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지만, 애쉬랜드엔 그런 경험을 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많았다. 곳곳에 세력의 공백 지대가 널려 있었고, 본인들 근거지를 벗어난 대형 세력은 야외 장악력이 딱히 강하진 않았다.
그런데 정도연이 말을 막 마치자마자 미간을 팩 구겼다. 빠르게 창백해진 안색에 병색은 더욱 짙어졌다.
일찍이 차에서 내렸던 한명호는 이 광경을 보고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상대를 부축하려 했지만, 순간 그의 심장 역시 박동이 느려졌다.
비틀거리던 그는 하마터면 뒤로 벌렁 나자빠질 뻔했다. 뒤이어 가까스로 작은 병을 꺼낸 그가 급하게 입에다 약을 털어 넣었다.
한명호는 이제 허리를 굽혀 양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을 골랐다. 심장이 다시 원상태로 회복될 때까지 조금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다 그가 자신과 비슷한 행동을 취한 정도연을 바라보았다. 정도연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 또한 그녀만큼이나 좋지 않은 안색이었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그때, 정도연이 먼저 자조하듯 웃었다. 하지만 내내 그 자세 그대로 거친 숨을 몰아쉴 뿐,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온 사방이 고요해진 그때, 게네바가 주변 순찰을 끝내고 돌아왔다.
게네바도 마침내 힘들어하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사실 심장 박동 조절 장치를 장착하면 좀 더 버틸 수 있을 거다.”
한명호는 느릿하게 몸을 세운 뒤 고개를 틀어 게네바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확실히 방법이긴 하지. 괜찮은 기기와 의사를 찾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만약 정말로 좀 더 버텨야 하는 상황이라면 고려해볼게.”
이야기를 하는 사이 그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정도연에게로 향했다.
‘나야 심장 박동 조절 장치로 연명할 수 있다지만, 저 여자는 어쩌지?’
* * *
“수정의식교 수석은 어젯밤 투신자살 아니, 육신을 벗어던지며 열반에 올랐고 우린 오늘 한 경전에서 그 사람이 남긴 초고를 발견했어. 그 초고엔 마침 우리가 알고 싶어 했던 비밀이 있었고, 보란 듯 ‘5대 성지’란 제목도 붙어있어. 너희가 생각할 땐 이런 우연이 발생할 확률이 얼마라고 봐?”
장목화가 주위를 둘러보며 미간을 살짝 구겼다. 그녀가 지금 사용하는 건 애쉬랜드어였다. 보통 이 방에서 대화할 때면 구조팀은 다 애쉬랜드어를 썼다. 물론 타심통이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성건우가 답했다.
“답은 두 가지예요. 첫째, 이미 발생한 일이니 가능성은 100퍼센트. 둘째, 그런 우연이 발생할 가능성은 0.03퍼센트고요. 제 추측은 그래요.”
성건우가 언제나처럼 헛소리를 하건 말건 백새벽, 용여홍은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할 확률은 거의 0퍼센트로 치부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백새벽이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수석이 우리한테 의도적으로 이 정보를 알려준 건 아닐까요?”
“왜?”
용여홍이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그 사이 성건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목적은 인류를 구하는 거고, 수석의 이상은 중생을 제도하는 거잖아. 큰 틀에서 보자면 뜻이 같다고 할 수 있지. 같은 뜻을 가진 이들이 서로 협력하는 건 아주 정상적인 일이고.”
용여홍이 즉각 말도 안 된다는 듯 반문했다.
“수석의 이상이 중생 제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내 추측에 따르면 그래.”
성건우 역시 대답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때, 한창 생각에 잠겨 있던 장목화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문제는 나중에 잔나가 대사한테 물어볼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어떻게 물어볼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고 있었지만, 잔나가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장목화도 피식 웃고 말았다.
“쪽지에 적힌 5대 성지가 진짜든 가짜든, 그것 자체만으로도 아주 흥미로운 거야. 자, 봐봐⋯⋯.”
너무도 익숙한 이 소리에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리며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장목화는 성건우가 아니기에, 용여홍도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말에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아이언마운틴 시티의 제2 식품회사, 빙원 타이 시티 제1 고등학교, 대강시 임해 마을 어귀 늙은 홰나무 아래, 이 세 곳은 우리가 가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곳이야. 심지어 타이 시티 고등학교와 임해 마을은 어딨는지도 몰라. 그러니까 일단 이건 내버려 두자.
장하시 연합 철강 공장은 분명 검은 늪 황야의 그 폐허 철강 공장이야. 그러니 기계 승려 정법이 거기 가서 참선하고 예불을 드리려 했겠지. 그리고 파흐 지방 호움 난임 센터는 불모지 13호 유적과 관계돼 있을 거야.
즉, 이 두 성지는 정도가 심하든. 심하지 않든 기이한 곳이라는 거야. 상당수의 비밀이 숨겨진 곳이라는 거지.”
용여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우리가 철강 공장에 갔을 때 찾은 건 그 병력 말곤 없었잖아요. 아니면 전에 그곳을 탐색했던 유적 사냥꾼이 이미 가져가 버린 걸까요?”
검은 늪 황야의 철강 공장은 개발이 완료된 유적에 속해서, 용광로처럼 옮길 수 없는 사물과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들만 남아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백새벽이 말했다.
“비밀이라는 게 우리가 발견한 그 병력일 수도 있고요,”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넌 어떻게 생각해?”
성건우는 턱을 쳐들며 답했다.
“그 중이 그랬죠. 5대 성지는 달지기 보리와 장생이 세상에 임한 곳, 열반에 오른 곳, 그리고 설법했던 곳이라고요. 그럼 달지기가 전에는 이 땅 위에서 활동했다는 뜻 아닐까요? 적어도 그들은 그렇게 믿는다는 거죠.”
장목화가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이 5대 성지에 숨겨진 가장 큰 비밀은 사실 그들의 행적일 거라는 거야? 만약 우리가 구세계 당시에 5대 성지 중 세 곳, 혹은 두 곳에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을 찾아낸다면 그거 참 재미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