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58화 (458/649)

458화. 경전을 빌려 읽다

장목화는 자세히 생각해 보다가 한숨을 토해냈다.

“자, 이제 자자. 내일 도망칠 기회도 찾지 못하고, 할 일도 없으면 밥을 갖다주는 승려한테 수정의식교의 전적과 경전을 빌려달라고 하려고. 그들의 이념과 승려 교단, 구세계가 남긴 몇몇 불경 사이의 차이점이 뭔지 보려고.”

그녀는 잔나가에게 들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두렵지도 않은지 도망칠 기회를 찾겠다는 이야기를 대놓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조팀이 이러한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열흘을 가만히 기다리리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성건우는 먼저 침대 하나를 차지했다.

장목화는 백새벽을 힐긋 보며, 빈 침대 하나를 가리켰다.

“네가 먼저 자. 나랑 작은 빨강이가 불침번 설게.”

감시당하고 있다 해도, 수정의식교의 시카라 사원에 머물고 있다 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전처럼 돌아가며 불침번을 설 계획이었다.

잔나가가 자비롭고 선량한 사람이라고 다른 승려들 역시 그러리라 볼 수는 없었다. 그들 중엔 분명 정신 상태가 좋지 못한 이들도 있을 터였다. 게다가 조금 전 발생한 기이한 사건에 구조팀의 경계심도 한층 더 높아져 있었다.

장목화가 평소처럼 조를 나누지 않은 건, 인간의 존재를 감지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균등하게 배치하기 위해서였다.

“네.”

백새벽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때 고통에 몸부림치던 가리발디는 이미 지쳐 잠든 상태였다.

* * *

밤은 아무런 일 없이 지나고,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 한명호, 정도연, 게네바는 거래를 통해 얻은 구신 무선 통신기를 가지고 차에 올랐다.

셋은 황야유랑자 거점을 떠나 북안 뭇산에서 검은 불모지로 돌아왔다.

“저쪽에 소규모 사냥꾼 팀이 있네. 가서 길 물어보면서 흔적을 남길까?”

운전을 맡은 한명호가 멀찍이 떨어진 곳을 내다보며 말했다.

“좋아.”

뒷좌석 중앙에 앉은 게네바가 답했다.

정도연은 흠칫 놀란 듯 멍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녀는 소형 사냥꾼 팀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가 몇 초를 더 나아가자 그녀는 그제야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한 다용도 자동차 한 대를 볼 수 있었다.

‘시력이 이렇게나 좋다고?’

정도연은 물음표 가득한 눈으로 한명호를 돌아보았다.

게네바가 먼 거리의 사물을 판별하는 건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한명호가 그럴 수 있다는 건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한명호의 약간 누런 흰자를 떠올린 정도연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도 변이인인가?’

이내 정신을 차린 그녀도 한명호의 제안에 응했다.

“그러자.”

한명호는 곧장 작은 언덕에 차를 세웠다.

머지않아 간단한 위장을 끝낸 그가 게네바를 돌아보았다.

“넌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 지원 세력인 것처럼. 우리가 셋뿐이란 사실을 들키면 안 돼. 더 많은 사람이 여기 숨어있다고 생각하게 해야 해.”

게네바는 자신을 당연히 사람으로 인정해주는 한명호의 말에 상당히 만족스러워했다.

“문제없어.”

차에서 내린 게네바가 적당한 위치를 찾아 숨자, 한명호와 정도연이 탄 검은 SUV는 흰색 다용도 자동차 쪽으로 향했다.

흰 차와의 거리가 아직 한참 남은 그때, 차를 세운 한명호가 창밖으로 몸을 죽 빼고 손을 휘휘 흔들며 외쳤다.

“묻고 싶은 게 있다!”

한담이나 인사 따위 없이 곧장 건넨 질문은 강도, 혹은 강도를 겸하는 유적 사냥꾼들의 시선을 끌기 좋았다.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 멈춘 흰색 다용도 자동차 보조석에선 구세계의 카우보이모자를 쓴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흰 셔츠에 단추를 채우지 않은 갈색 조끼 차림에, 허리춤엔 리볼버가 하나 걸려 있었다. 동시에 남자는 예리한 비수를 손으로 빙빙 돌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 바람과 비에 시달린 듯 거친 피부를 가진 남자는 멀찍이 자리한 한명호를 몇 초간 응시하다가 큰소리로 대꾸했다.

“조금 더 와서 말하지 그래? 이렇게 소리 지르면 힘들잖아.”

남자의 한쪽 손은 이미 허리춤의 리볼버에 닿아 있었다. 어느 정도 경계는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명호는 곧장 자동차를 모는 대신 그 남자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정도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

“저 사람, 불모지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됐을 거야.”

수시로 불모지에서 지낸 유적 사냥꾼이 내린 판단이었다.

이곳의 수원, 식량, 환경은 상당히 악랄했다. 그 때문에 아무리 충분한 준비를 했어도 불모지에 들어온 인간은 5, 6일 만에 더럽고 피곤한 꼴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저 남자처럼 쌩쌩한 정신력과 깨끗한 옷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정도연의 판단을 받아들인 한명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여긴 퍼스트 시티랑 가깝잖아. 저 사람들은 퍼스트 시티에서 왔을 테니 분명 우리에게 걸린 현상금을 봤을 거야. 겨우 이 정도의 위장만으론 저들을 속이기 부족할 거고.

음……. 우리를 알아봤는데도 더 가까이 오라고 하는 건 우리를 처리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겠지. 우리의 지원 병력이 당도하기 전에 처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거야.”

“맞아.”

카우보이모자를 쓴 남자를 몇 번 더 힐끔거리던 정도연은 상대를 더욱 의심스러워했다.

한명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액셀을 밟으며 핸들을 틀었다. 검은 SUV는 게네바가 숨은 언덕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우보이모자를 쓴 남자는 실망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다가, 무전기를 꺼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표 발견.”

* * *

시카라 사원 6층.

장목화는 귀리 빵 여러 개와 맑은 물을 가져다준 젊은 중을 향해 선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선사, 어젯밤 일 덕분에 수정의식교에 대해 큰 흥미를 느껴서 그런데, 경전 몇 권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젊은 중은 곧장 고개를 숙이더니 염불을 외웠다.

“그거야말로 저희 종교의 본뜻이지요.”

장목화가 막 감사 인사를 하려던 순간, 창가에 있던 성건우가 갑자기 홱 돌아서서 중에게 물었다.

“오늘 저렇게 많은 승려가 외출하는 이유는 뭡니까?”

“수석께서 열반에 올라 극락정토, 그러니까 여러분 같은 일반인들이 말하는 신세계에 진입하셨으니 5대 성지로 사람을 보내 의식을 거행해야지요.”

“5대 성지? 어떤 곳들인가요?”

이는 장목화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젊은 중은 당황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다.’ 빈승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지만, 답을 안 할 순 있습니다.”

장목화는 바로 의문점을 포착했다.

“왜 그걸 얘기해줄 수 없다는 거죠?”

젊은 중이 간단히 설명했다.

“5대 성지는 전부 우리 보리와 세자재여래에 관련돼 있습니다. 그들이 열반에 오른 곳이거나, 세상에 강림한 곳이거나, 구세계 고대에 설법했던 곳이지요. 다른 이들이 그런 성지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저희는 관련된 사항을 비밀로 숨겨오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젊은 중은 정직하게 웃었다.

“사실 저 역시 5대 성지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 교파에서는 여섯 번째 식(識)을 깨달은 승려만이 성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장목화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성건우에게 이 중과 친구가 되라는 주문도 하지 않았다. 남의 집에 묵는 상황에 활개를 펼치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행동이 잔나가가 흑화하는 계기가 될지도 몰랐다.

* * *

구조팀이 저녁을 다 먹은 무렵, 아까 전 방문한 젊은 중이 수정의식교 경전 몇 권을 가지고 왔다.

네 사람은 각자 한 권씩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응? 여기 종이가 끼워져 있네.”

용여홍의 목소리에, 세 사람이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용여홍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종이를 펼치며 웃었다.

“새 종이 같은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왜 그래?”

장목화와 백새벽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용여홍에게 다가갔다. 성건우는 아예 몸을 날리기까지 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용여홍이 혼란에 휩싸인 얼굴로 말했다.

“5, 5대 성지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어요⋯⋯.”

세 사람은 동시에 용여홍 곁으로 모여들어 종이를 확인했다.

종이엔 레드리버 문자가 필기체로 적혀 있었다.

「5대 성지 :

1. 아이언마운틴 시티 제2 식품회사.」

용여홍은 정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성지라며? 성지가 제2 식품회사야?’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장목화는 빠르게 셋째 줄을 확인했다.

「2. 장하시 연합 철강 공장.」

장하시 연합 철강 공장?

장목화는 고개를 홱 틀어 성건우와 백새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기계 승려 정법을 만났던, 검은 늪 황야 내 폐허 철강 공장의 구세계 이름이었다.

기계 승려 정법이 그곳에 나타났던 건, 우연이 아니었던 걸까?

구조팀은 당시 기계 승려 정법과의 만남이 공교로운 우연과 불운이 겹친 것이라 생각했다. 마침 검은 늪 황야의 철강 공장을 지나던 정법이 인연인을 찾다가 성건우와 용여홍을 만났고, 그들이 가진 무전기를 통해 여성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서 발광을 한 것이라 믿었다.

주로 승려 황원에서 활동하던 정법이 왜 갑자기 검은 늪 황야에 왔느냐는 의문을 배제한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상황의 전개는 모두 논리에 부합했다. 구조팀의 운이 좋지 않았던 것이라 여기면 될 뿐이었다.

그 후로도 구조팀은 그 사건을 수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각양각색의 인물도 만나고, 각양각색의 불운한 사고도 당하는 법이었다. 또 그 철강 공장엔 정법이 아니더라도 다른 강자가 있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이 순간, 구조팀은 마침내 당시 사건이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기계 승려 정법이 아무 이유도 없이 고향 정토를 떠나 검은 늪 황야의 그 철강 공장에 들어간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곳은 수정의식교의 5대 성지 중 하나였다.

그리고 승려 교단과 수정의식교가 숭배하는 대상 역시 1월의 달지기 보리로 똑같았다. 두 조직은 충분히 성지를 공유할 수 있었다.

10여 초가 흐른 뒤, 성건우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정법 선사가 철강 공장에 도착했던 건 예불을 위해서였네요. 그곳에 있던 용광로들에 대한 신실한 마음도 진짜였어요.”

용여홍은 용광로를 향해 절하던 기계 승려 정법을 떠올렸다. 덩달아 머릿속에선 구세계 콘텐츠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대사가 생각나기도 했다.

‘선재선재(*善哉善哉: ‘훌륭하다, 훌륭해.’, ‘좋다, 좋구나.’)라.’

이어, 장목화는 생각에 잠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근데 그게 성지일 수 있나? 부처님과 철강 공장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부처님이 설마 용광로와 쇳물, 시커먼 연기 사이에서 열반에 오르기라도 했다는 거야?”

“부처님의 금빛 육신이 그 철강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죠.”

성건우의 말을 듣고, 백새벽은 그가 묘사한 광경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쓰며 큰 자신 없이 얘기했다.

“달지기 보리와 관련된 건 그 철강 공장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다른 무언가일 수도⋯⋯.”

그녀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리고 백새벽과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병력!”

팀원들이 가리키는 건 병력 자체가 아닌,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새로운 치료를 받기 위해 북방으로 보내진 그것의 주인, 실험 지원자였다.

그의 상황은 심령의 복도 503호의 강소월과 매우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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