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육신 껍데기
장목화의 질문에 가리발디는 저도 모르게 몸을 한 번 더 떨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침을 꼴깍 삼킨 그가 답했다.
“그, 그 여자는 혼혈이었어. 그렇게 예쁘진 않은데, 굉장히 매력적이었어. 그 여자는 어떤 표정으로라도 너, 너를⋯⋯.”
가리발디는 눈앞에 자리한 두 여자를 보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백새벽은 상당히 직접적으로 캐물었다.
“어떤 표정으로라도 욕망을 끓어오르게 할 수 있다고?”
가리발디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마, 맞아. 극도로 피곤해 지친 상황이라도 그런 느낌이 들어.”
“건강한 몸에 감사해. 안 그랬으면 진즉 죽었을 거야.”
백새벽이 냉랭하게 평가했다.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본 용여홍은 가리발디가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내기까지는 1년 반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장목화는 눈을 살짝 굴려 방 안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구체적인 생김새를 묘사해봐.”
가리발디는 정신을 차리고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구조팀은 그 묘사를 바탕으로 매복자의 대략적인 외모를 상상했다.
170센티미터가 안 되는 키, 검고 구불거리는 긴 머리, 옅은 커피색 눈동자, 별 특징 없는 코와 입술. 독특한 기질과 뛰어난 몸매만 아니면 거리에 나가 행인에 섞여들 경우 쉽게 찾기 어려울 유형이었다.
또한 그 여자는 시시때때로 독특한 기질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대부분은 그런 기질을 숨기고 있었고, 그럴 때는 약간 매력적으로 보이기만 했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묻자, 가리발디는 모른다고 답했다. 아는 것이라곤 콜론자가 그녀를 ‘쾌락주의자’라고 불렀다는 것뿐이었다.
동시에 가리발디는 콜론자가 문밖에 있는 또 다른 쾌락주의자와 나누는 대화를 듣기도 했다.
그 쾌락주의자에 대한 콜론자의 태도와 방에 있던 쾌락주의자에 대한 태도는 분명히 달랐다. 둘 모두 여자이었으나 콜론자는 둘 중 한 명에게는 지극히 공손하게 굴었다. 다른 한 명도 존중하기는 했지만, 그 차이는 매우 또렷했다.
이에 가리발디는 구조팀을 노리고 매복했던 여자가 욕망 성인 교파의 쾌락주의자 중에서도 비교적 특수한 사람이리라고, 언제든 더 높은 지위로 승급할 수 있는 사람이리라고 의심했다.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를 꽤 중시하는 것 같던데.”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구조팀이 아닌 반고 바이오를 가리켰다.
욕망 성인 교파가 노린 건 장목화가 이끄는 구조팀이 아니었다. 그들은 당시 이미 도시를 벗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구조팀을 노린 함정이라면 여태 갖가지 업적을 세운 그들을 노리는 함정에 잔나가의 존재를 감지하자마자 놀라 뛰쳐나간 쾌락주의자 한 명만 배치하진 않았을 터, 적어도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파견했을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한 대형 세력은 적대자의 정보망을 노릴 때 힘이 아닌 비밀성과 수단, 루트 등을 강조했다.
욕망 성인 교파가 반고 바이오의 다른 정보원을 낚으려 했을 때 그런 쾌락주의자 중 걸출한 자 한 명을 파견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들이 반고 바이오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장목화는 가리발디를 보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들한테 어떤 걸 털어놨어?”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인 가리발디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더듬더듬 답했다.
“얘기할 건 다 해버렸어⋯⋯. 나,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너희는 몰라. 그런 상황에서 만족을 얻기 위해선, 참을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는 난 심지어 자, 자해라도 할 수 있었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고. 그, 그 여자는 마치 심연에서 기어 나온 악마 같았어.”
성건우와 용여홍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면 장목화는 표정을 애써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도 전부 해봐. 상부에서 특정 문제를 간과하지 않도록.”
가리발디는 자신을 질책하지 않는 구조팀을 보고 약간의 안정을 찾았다. 이후 그는 욕망 성인 교파에 유출한 정보를 있는 그대로, 자세히 설명했다.
말을 잇던 그때였다. 순간 멍한 표정을 드러내는가 싶던 그가 연달아 몇 번이나 하품을 했다. 당장이라도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의 몸은 뭔가 고통에 휩싸인 듯 약간 뒤틀렸다.
장목화는 이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곧장 한 발 앞으로 나선 성건우는 주먹을 날려 가리발디를 기절시켰다.
구조팀은 야외 생존을 할 때를 대비해 준비한 밧줄로 가리발디를 칭칭 감고 입까지 틀어막은 뒤, 침대 위로 내던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난 가리발디는 온몸을 끊임없이 뒤틀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내 그가 살짝 진정하자 장목화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좀 참아. 불구가 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가리발디는 자신이 금단 현상을 겪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차오르는 충동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벽에 머리라도 갖다 박고 싶은 심경이었다.
장목화는 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 차례 금단 현상을 겪으면서 어느 정도 기반이 갖춰지면 회사 약이 효력을 발휘할 거야. 그 후로는 더는 이런 현상을 겪지 않을 거고.”
그녀는 분명 팀원들을 향해 설명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는 가리발디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말이었다.
욕망 성인 교파의 손에 떨어졌던 사람은 죽음은 면할 수 있을지 몰라도, 때로는 죽음보다 더 비참한 일을 겪곤 했다.
* * *
가리발디가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구조팀은 저녁 10시가 될 때까지 방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평범한 회색 가운 차림의 승려가 저녁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오트밀과 싱거운 소시지였다.
“쉬어.”
장목화는 남은 두 침대를 보며 말했다. 침대를 어떻게 나눌지까지 자기가 정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눈앞이 이지러지며 갑자기 깊은 복도가 하나 나타났다. 복도 안 회색 가운 차림의 승려들은 합장을 한 채 황급히 앞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는 방의 광경과 겹쳐져 있었지만 동시에 분명히 분리돼 있기도 했다.
“너희도 봤어?”
장목화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탑이 굉장히 많네요.”
성건우가 답했다.
장목화 역시 방 안 사방의 벽이 허상으로 변하며 불탑과 철탑, 제철소의 탑들을 드러내는 걸 보았다.
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용여홍은 자신이 수많은 이들의 시야를 장악한 채 각기 다른 광경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어둑한 복도, 간소한 방, 방석들, 집합한 승려들, 시카라 사원 바깥 담장 위에 늘어선 부처님, 보살, 명왕들의 조각상, 사원 주위로 자리한 여러 거리의 야경⋯⋯.
그것들이 하나하나 중첩되며 구조팀에게 주체할 수 없는 현기증을 안겼다.
장목화는 필사적으로 기억에 새겨놓았던 불경과 구세계 콘텐츠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천안통(天眼通)? 누군가가 우리한테 천안통으로 사원에 있는 모든 승려가 보고 있는 광경을 보여준 건가?”
짝짝짝!
성건우는 이 와중에도 손뼉을 치는 걸 잊지 않았다. 눈빛에도 흥분이 잔뜩 어려 있었다.
잠시 후, 구조팀 네 사람은 회색 가운 차림의 승려들이 모인 대전을 보았다. 대전엔 단정하게 앉은 불상이 놓여 있었다.
레드리버인 위주인데, 그중엔 머리를 박박 민 사람도, 짧게 깎은 사람도 있었고 눈동자 색은 다양했다.
잔나가도 그들 사이에 자리해 있었다.
장목화는 그 선사의 눈을 통해 불상 앞에 앉은 승려 한 명을 보며, 동시에 다른 이의 눈을 통해 그 선사를 보았다.
불상 앞에 앉은 승려는 매우 늙은 편이었다. 볼살이 아래로 축 처져 있었으며 눈썹도 새하얬다.
그는 녹색 눈동자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의식을 수정처럼 여기면 곧 여래를 본다. 난 이미 우리 보리의 극락정토에 진입했으니 그대들에게 눈을 주고, 신세계를 보게 할 것이니라.”
승려가 이야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구조팀의 눈 앞에 펼쳐진 화면에도 재차 변화가 생겼다.
가장 중앙에 자리한 것은 이 어둡고 넓은 대전이었다. 대전 밖으로는 큰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바깥은 유리로 덮인 듯했고, 고탑 같은 외형을 갖추고 있거나 실제 고탑이기도 했다.
그런 건물들 사이로 허공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 위론 끝이 보이지 않는 차량 행렬이 이어졌고, 그 차엔 전부 불자가 타고 있었다.
이때 허공에서는 각기 다른 색의 종잇조각들이 떨어져 내리며 몽환적이고 밝은 빛들을 번득였다. 그 사이론 수정 같은 태양도 하나 떠 있고, 아래론 구름을 뚫을 듯 높은 탑이 서 있었다.
깊고 어두운 대전 안의 승려들은 모두 입을 모아 염불을 외웠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광경 속, 노승은 어느새 시카라의 맨 꼭대기 층에 이르러 있었다.
가장자리에 선 그는 천안통으로 모든 승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난 육신 껍데기를 벗고 허망을 돌파해 새로운 세계에 진입할 것이다.”
말을 마치자마자 노승은 위쪽으로 폴짝 뛰어오르듯 몸을 날렸다.
퍽-
급속도로 떨어진 인영은 땅으로 추락했다.
구조팀은 빠르게 흩어져 사라지는 갖가지 시야를 통해 계단 아래에 엎어진 노승을 확인했다. 반파된 그의 머리에서는 붉은 피와 유백색 뇌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이 순간 구조팀 전체가 넋을 잃었다.
조금 전 목격한 여러 광경 중 전반부 화면에선 억지로나마 기묘한 환상과 장엄한 신성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눈에 비친 건 끔찍한 죽음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육신이란 껍데기에서 벗어나는 거야? 이렇게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방법이어야 하는 건가?’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사원 안의 승려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언제라도 사람 가죽으로 된 가면을 벗고 그 아래 숨겨져 있던 파란 피부와 하얀 이빨을 드러낼 것 같았다.
몇 초 후, 모든 것이 사라지자 성건우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왜 목을 매다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성건우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친구 용여홍만 그 노승이 육신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신한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할 뿐이었다.
‘목을 매고 죽는 건 좀 나약해 보인다고 생각했나?’
용여홍이 반복된 생각 끝에 얻어낸 답은 이 가능성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구조팀의 시야는 원상태로 회복되었다. 이제 보이는 건 간단한 가구와 사방의 약간 얼룩덜룩한 벽이었다.
전방을 응시하던 장목화가 시선을 거둔 뒤 자조하듯 웃었다.
“원래는 수정의식교가 승려 교단과는 달리 구세계 불교 교리를 제대로 환원했다고 생각했어. 근데 이제 보니 잔나가 대사만 상대적으로 특수하게 자비로웠던 모양이야.
음, 방금 그걸 보고 나니까 구세계 콘텐츠에서 나온 사이비 종교가 떠오르더라. 생각해 봐, 별 하나 없는 밤에 어둑하고 넓은 대전, 사방팔방에서 모여든 회색 가운 차림을 한 중.
또 각기 다른 시야가 하나로 중첩되고, 이 모든 걸 가만히 주시하고 있는 불상, 성과를 얻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사원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머리가 깨진 선사⋯⋯. 저들이 숭배하는 게 사악한 신이 아닐 수 있을까?”
“사악한 부처겠죠.”
성건우가 장목화의 말을 고쳐주었다.
용여홍도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밝혔다.
“확실히 돌이켜보니까 끔찍하고 으스스하긴 해요.”
백새벽 역시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수정의식교가 사악하다 한들 지나친 수준은 아니에요. 승려 교단보다는 훨씬 낫죠. 전 이전에 퍼스트 시티에 있었을 때도 그들이 선을 넘는 짓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어요. 사악하고 기이한 짓들은 조직 내부에서만 이루어지는 걸 거예요.”
기계 승려 정법에 깊은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 백새벽은 승려 교단에 대해서도 극도로 낮게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