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56화 (456/649)

456화. 변하지 않음으로 모든 변화에 대응한다

차를 타고 한명호가 빌려둔 안전 가옥으로 돌아간 구조팀은 모든 물건을 사파이어색 지프에 실었다.

이후 렌트카 안에 수리비를 남겨둔 채 지프로 옮겨 탄 그들은 새카만 오토바이를 탄 잔나가를 따라 다시 레드울프 구역 최동단에 자리한 수정의식교의 사원으로 향했다.

그 사이 그들은 도망칠 기회 같은 건 한 번도 엿보지 않았다.

“선사, 저희는 승려 대부분이 저희를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장목화가 새로운 요구를 제기했다. 감시를 당하러 가는 입장이니만큼, 그녀는 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상대가 그 요구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별 자신이 없었다.

- 좋습니다.

잔나가도 그들을 곤란하게 하진 않았다.

오토바이를 타고서 구조팀을 안내한 잔나가는 사원 옆쪽에 이르러 그곳에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이후 협소하고 어두운 계단을 따라 6층에 멈춰 섰다.

“시주님들은 열흘간 여기서 머물 겁니다. 때맞춰 식사를 올려드리지요.”

잔나가가 원목색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구조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리발디를 부축해 그 문으로 들어갔다.

아주 간소한 방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침대 세 개와 벽에 붙은 테이블 하나가 있었으며, 옆쪽에는 화장실이 하나 딸려 있었다.

잔나가의 인간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장목화는 바로 팀원들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최대한 빨리 가리발디의 상황을 상부에 보고해야 해.”

잔나가는 구조팀이 무선 통신기를 사용하는 것도 금지하지 않았다.

구조팀이 이번에 사용한 건 가리발디에게서 찾아낸 코드북과 그에게 속한 휴대용 무선 통신기였다.

구조팀은 가리발디는 이미 구조됐지만, 일찍이 발각당한 상태였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들이 잔나가에 붙잡혀 사원에 갇혀 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구조팀은 잔나가가 자신들 마음속에 목소리를 울리며 제지할 것을 경계했다. 이 시도가 성공으로 돌아가리라는 확신도 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문밖은 내내 고요했고, 복도를 지나치는 승려도 없는 듯했다.

“아예 걱정도 안 하네.”

장목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잔나가가 왜 이렇게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구조팀의 배후에 자리한 세력이 때맞춰 그들의 소식을 접하더라도 수정의식교라는 거대한 조직에 대적하려면 방안을 세우고, 인력을 조직하고, 사전 준비를 하고, 지원에 나서기까지는 적어도 보름 이상이 걸릴 것이다.

거기다 수정의식교가 어느 정도의 경계와 대비에 나선다면 소요되는 시간은 더 길어지기 마련이고, 열흘이 지나면 구조팀도 이 시카라라는 사원을 떠날 예정이었다.

“이제 어쩌죠?”

용여홍은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잔나가는 선하고 자비로워 보였지만, 그렇다고 수정의식교의 다른 승려들 역시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보리 영역에 속해 있으니, 확률적으로 따졌을 때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는 각성자도 분명 존재할 터였다.

그러나 왜인지 구조팀은 여태 그들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선 기계 승려 정법과 정념의 차이를 통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성건우는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이건 기회야!”

“뭐?”

용여홍 뿐만 아니라 장목화와 백새벽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드러냈다.

성건우는 짐짓 매력적인 목소리를 냈다.

“위험한 상황일수록 모험에 나서야지. 이건 내 스스로를 포용해 심령의 복도에 진입할 기회라고. 그렇게 되면 우리한테도 맞서 싸울 힘이 생길 거야.”

‘오하명한테 빙의라도 된 거야?’

속으로 중얼거리던 장목화가 잠시 고민하다가 대꾸했다.

“어느 정도나 자신하는데?”

“자신은 없죠.”

성건우의 답은 매우 깔끔했다.

“⋯⋯.”

장목화는 느릿하게 한숨만 토해냈다.

“급하게 굴 것 없어. 사력을 다해야 할 만큼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잖아. 잔나가 대사는 다른 승려를 제압하거나 막을 수 있을 거야. 안 그럼 그런 성격과 이념을 가진 사람이 우리를 이 사원에서 감시하려 하지는 않았겠지.”

“그건 그러네요.”

용여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잔나가가 그리 확실하지는 않은 예언을 바탕으로 구조팀을 시카라 사원에서 감시하려 하지 않았다면 용여홍도 그에게 다소 호감을 느꼈을 것 같았다. 최소한 일반인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잔나가는 진정한 승려였다.

“하지만 우리 계획은 중단되어 버렸잖아요.”

백새벽은 아무래도 강제로 구금된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했다. 그리고 잔나가도 상당히 싫어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장목화가 웃었다.

“우리 계획이 뭐였는데? 조용히 상황 변화를 지켜보면서 퍼스트 시티에 알아서 혼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물이 흐려지면 그 기회를 틈타 임무를 완성하는 거 아니었나? 과연 우리 실력으로 정말 그 혼란에 관여할 수 있을까? 그런 거물들이 뺨 한 대만 때려도 우린 죽을지도 몰라.”

구조팀은 자신들의 분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주도적으로 공격하며 퍼스트 시티의 균형을 깨려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저 정세에 따라 이익을 추구하고 변화를 기다리려 했을 뿐이었다.

그때, 성건우가 엄숙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니요? 우리 계획은 그게 아니죠. 잔나가 대사가 그랬잖아요. 우리가 퍼스트 시티에 혼란을 일으킬 거라고요. 그건 우리가 뭔가 실수를 했고 계획을 잘못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진심으로 하는 얘기냐, 아니면 잔나가를 비웃는 거냐?’

용여홍은 대담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잔나가가 뭘 예언했는지 궁금해. 우린 여기 있든, 밖에 있든 똑같잖아. 설마 그가 우리를 막고 우리를 시카라 사원에 가둬 감시하는 이 행동이 도화선이 돼서. 뭔가 변화를 일으키기라도 한다는 걸까? 예언은 언젠가 예언자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실현되는 법이잖아. 안 그래?”

피식 웃는 장목화를 보며, 용여홍은 이번엔 그녀의 진짜 목적을 간파했다.

‘팀장님, 팀장님은 여전히 잔나가의 신념을 흔들어보려고 하고 있네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잔나가의 음성은 없었다.

장목화는 하는 수 없이 허리를 쭉 펴며 기지개나 켰다.

“다들 쉬어. 쉬면서 기다려보자. 그래, 겐에게 전보를 보내야겠네. 퍼스트 시티 정세가 지금은 비교적 안정적이라는 것과 우리가 수정의식교 잔나가 대사의 초대를 받아 시카라 사원에서 열흘간 묵게 됐다고도 전해야지.”

* * *

북안 뭇산, 어느 황야유랑자 거점 안.

한명호와 정도연은 아무도 없는 구석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며, 게네바가 해독한 전보문을 읽었다.

“뭔가 일이 생겼나 본데.”

정도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오랜 시간 퍼스트 시티와 북안 불모지에서 지낸 유적 사냥꾼으로서, 그녀는 퍼스트 시티 정부 세력과 어느 정도 연계된 수정의식교가 공개적으로 전도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명호는 몇 초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전보를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면 그렇게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이제 어떡하지?”

그의 시선이 게네바에게 향했다.

게네바는 중저음 합성음 목소리로 답했다.

“다들 문제가 생긴 상황이면 전보에 숨겨진 내용을 읽어내야겠지. 이건 큰 흰둥이가 전에 했던 말이기도 해. 전보문에 우리 계획을 변경하라고 요구하는 내용은 없어. 그러니 우리는 원래 계획대로 행동하면 된다.”

큰 흰둥이?

정도연은 줄곧 구조팀의 별명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강력한 팀인데 큰 흰둥이, 작은 흰둥이, 작은 빨강이, 심지어 야까지. 아무래도 너무 앙증맞은 별명이었다. 각각 1만 오레이가 넘는 현상금이 걸린 사람들보단 거의 초등학생 어린이들에게나 붙을 법한 이름이었다. 그에 비하면 겐은 상당히 정상적이었다.

“좋아.”

한명호 역시 지금은 변하지 않는 것으로 갖가지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전보문을 태우고 검은 빵이 부드러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정도연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게네바를 돌아보았다.

“넌 머신 헤븐 어느 지역 시장 같은데 왜 큰 흰, 아니, 서시월 팀과 함께 퍼스트 시티로 온 거야? 머신 헤븐과 퍼스트 시티, 합작 관계 아니었어?”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지능 로봇도 로봇이었다. 프로그램된 설정과 상부의 명을 거부할 수 없고, 허락이 없다면 어떤 직책을 두고 떠날 수도 없었다.

게네바는 눈의 붉은빛을 몇 차례 번득이며 답했다.

“난 과도하게 인간화됐거든. 떠나지 않았다면 본부로 소환돼 포맷됐을 거다. 내가 큰 흰둥이 팀과 함께 하는 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야. 나는 과연 인간인지 아닌지, 인간이라면 어떤 인간인지, 내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거든.”

정도연은 그 답에 머리가 다 어지러워 순간 멍한 얼굴이 됐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모닥불을 보며 얌전히 듣고만 있던 한명호가 게네바를 돌아봤다. 빛은 몸집을 키우고 줄이길 반복하며 저무는 석양에 비친 그의 얼굴 위를 오갔다.

이내 게네바가 합성음이 약간 묻어나는 목소리로 웃었다.

“하하, 타르난을 떠나기 전 난 꽤 훌륭한 시장이었고, 자상한 남편이었고, 다정한 아버지였으며, 엄격한 장관이었어. 그게 내 핵심 프로그램에 존재하는 나에 대한 정의였지.

근데 지금의 난 그 외에도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내가 충분하고 완전한 인간 템플릿을 갖추면 그땐 진정한 자아를 찾을지도 모르지.”

정도연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라 웃기만 했다.

“난 그렇게 복잡한 생각은 못 해. 그저 초봄 마을의 모두가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랄 뿐이야.”

그러자 한명호가 그녀를 힐긋 바라보며 냉담한 투로 말했다.

“너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정도연은 입을 다물고 점차 부드러워지는 검은 빵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저녁 무렵, 마침내 가리발디가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에워싼 네 개의 얼굴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 그는 바로 몸을 웅크리며 무기를 찾았다.

“깼어?”

성건우가 먼저 웃으며 물었다. 애쉬랜드어로 한 질문이었다.

멍한 표정의 가리발디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눈앞에 자리한 이들이 전에 만난 적 있는 회사의 외부 파견 팀임을 알아차렸다.

“너희가 나를 구한 거냐?”

가리발디의 표정에는 저도 모르게 변화가 일어났다. 둔한 용여홍조차 그 눈에서 상대의 두려움과 미련을 읽어낼 수 있었다.

“맞아.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도와줄까?”

장목화가 웃으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때, 가리발디는 갑작스레 몸을 떨더니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뒤이어 그는 잽싸게 일어나 앉았다. 동작이 매우 빨랐다. 그 사이 성건우와 용여홍을 훑어보던 가리발디는 못 참겠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장목화는 얼른 손을 들어 자신의 입꼬리를 눌렀다. 말려 올라가려는 입술을 재빨리 막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가리발디가 조금 안정을 찾았을 때, 장목화가 물었다.

“너한테 깊은 인상을 안긴 그 여자, 어떻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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