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교통사고
골든애플 구역 가장자리, 어느 가문에 속한 저택.
구조팀과 잔나가는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곳을 관찰하며 예정된 목표 펠프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이 귀족 자제는 어젯밤 콜론자의 집에서 열린 비밀 모임에 참석한 만큼 오전 내내 잠들어 있었을 터였다. 구조팀이 오후에 움직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동안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망원경에 목표가 잡혔다.
검은 머리와 파란 눈동자, 살짝 처진 볼 근육을 가진 펠프스는 저택 정문으로 나와 차에 오르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의 두 경호원도 앞뒤로 차에 오르며 펠프스가 안전한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했다.
움직이기 시작한 차는 정원 내 길을 따라 철책 대문을 빠져나왔다.
멀찍이 자리한 백새벽은 이를 보고 바로 액셀을 밟아, 비교적 거리를 멀게 두고 펠프스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레드울프 구역이 눈에 들어온 순간 냅다 속도를 낸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를 따라잡은 뒤 곧장 그 차를 지나쳤다.
펠프스를 태운 차의 기사는 별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갑자기 끼어들어 앞을 가로막지 않을지만 경계할 뿐이었다.
그러던 그때, 그의 마음속에서 돌연 억누를 수 없는 울분이 차올랐다.
‘저 망할 차가 감히 나를 추월해? 내 실력을 보여주지!’
기사가 액셀을 힘껏 밟았다.
우렁찬 배기음이 울려 퍼지고, 앞쪽 차는 막 방향을 틀려고 했다.
쾅!
펠프스의 차가 구조팀이 빌린 차를 뒤에서 들이받았다.
훈련을 받았던 기사는 다행히 때맞춰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어 심각한 사고가 일어나는 걸 피했다.
그러나 충격으로 인해 용여홍은 안전 벨트를 매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반면 오히려 충돌 위치에 더 가까웠던 성건우는 뛰어난 체질적 특성 덕분인지 멀쩡한 몰골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움푹 팬 차를 한번 살피더니 펠프스 차로 달려가 고래고래 외쳤다.
“운전을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귀족인 펠프스가 전부 기사의 잘못이라며 저자세로 나가려 할 리는 없었다. 그는 옆에 앉은 경호원에게 간단히 눈짓만 했다.
이에 곧장 차에서 내린 경호원은 상의를 살짝 들어 올리며 허리춤에 찬 권총을 보여주었다.
바로 겁에 질린 연기를 하던 성건우는 차 안의 펠프스를 향해 말했다.
“봐봐. 네 차는 망가졌어. 내 차도 망가졌고. 너한테는 일행이 있지. 나도 일행이 있고. 그러니까⋯⋯.”
성건우는 마치 큰 충격에 당황하긴 했지만, 고집은 꺾지 못하고 말을 줄줄 늘어놓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약간의 표정 변화를 보인 펠프스가 경호원에게 말했다.
“됐어, 아는 사람이다.”
펠프스를 몇 년간 모셨어도 어릴 때부터 봐오진 않았던 데다 추리 광대의 영향까지 받은 경호원은 이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내 성건우가 펠프스를 향해 불만을 표했다.
“기사가 너무 거친 거 아냐? 됐다, 됐어. 우리 관계를 봐서 이 일을 문제 삼진 않을게.”
펠프스도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고.”
성건우는 또 좌우를 두리번거리더니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어젯밤 마스가르 거리로 가는 것 같던데⋯⋯.”
그는 뭔가 입장을 설명하지도, 어떤 모임에 참여했던 거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아무 의도도 없는 것처럼 여유롭게 한 사실만 툭 던졌다.
순간 경계심을 바짝 드높인 펠프스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성건우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광란의 파티가 열렸거든. 만다라를 즐겁게 하기 위한⋯⋯.”
‘만다라를 즐겁게 하기 위한 파티?’
성건우를 도우려는 척 차에서 따라 내린 용여홍은 그 말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법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구조팀은 이미 퍼스트 시티의 적잖은 귀족이 암암리에 만다라를 믿는 욕망 성인 교파의 사람들임을 알고 있었다. 펠프스의 답도, K의 집에서 열린 비밀 모임도 자연스레 이를 뒷받침했다.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백새벽과 장목화의 표정을 확인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 순간 용여홍은 뭔가 깨달음을 얻었다.
‘하긴, 이 정도 거리를 둔 상황에 겨우 저만한 소리는 못 듣지. 두 사람은 지금 차에 있기까지 하잖아. 팀장님은 원래 청력이 안 좋기도 하고.’
용여홍이 다시 먼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거리 끝에 검은 오토바이를 탄 잔나가가 보였다. 그의 표정은 전보다 더 진중해진 상태였다.
“욕망에도 영혼이 있나?”
성건우는 뭔가 깨달은 듯 웃으며 욕망 성인 교파 교리 하나를 언급했다.
그러자 같은 교도를 찾았다고 생각한 건지 펠프스는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볍게 눌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벽은 없지.”
상대가 욕망 성인 교파의 신도임을 확인한 성건우가 계속 질문을 이었다.
“어때, 어젯밤은 즐거웠고?”
펠프스는 곰곰이 기억을 떠올렸다.
“아주 훌륭했지. 모두 자기 욕망을 분출하고, 서로 간에 존재하는 모든 장벽을 허물며 각자 심령으로 통하는 대문을 열었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각종 체험에, 각종 성찬, 성유, 성약, 의식의 도움으로 난 한 차례, 한 차례 연거푸 깨어나 또 한 번, 또 한 번 뛰어넘었어.”
이 대목에서 그는 하품을 했다.
“다음 날이 되면 너무 피곤해서 일주일 동안은 더는 그런 일을 하고 싶지 않아져. 파티가 끝날 무렵, 모든 욕망이 불타오르고 육신이 극도로 피로해지자 내 영혼도 안정되어서 더는 어떤 번뇌에도 시달리지 않았어. 정말로 모든 걸 초월한 영성을 느꼈지. 그게 바로 만다라야.”
말을 마친 펠프스는 진지하게 자신의 사타구니를 두드렸다.
‘욕망을 방출했다는 이야기를 그렇게나 성스럽게 하다니.’
용여홍은 얼른 저 사람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이번 성찬은 뭐였는데?”
성건우가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순간 펠프스의 표정에 생기가 흘러넘쳤다.
“뭐가 더 있었겠어? 대마지. 그와 비슷한 합성품들도 있었고.”
성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꾸했다.
“다들 몇 년 지나지 않아 전부 만다라를 보러 가겠네.”
펠프스는 성건우의 ‘축복’에 상당히 만족한 듯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의 욕망도 충족되기를.”
그 후로 조금 더 대화를 나눈 성건우와 펠프스는 각자의 차는 알아서 수리하기로 약속한 뒤 손을 흔들며 서로에게 작별을 고했다.
* * *
성건우, 용여홍이 렌트카로 돌아오자 백새벽은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성건우는 방금 펠프스와 했던 대화를 용여홍과 한두 마디씩 주고받듯 전했다. 그러면서 의도적으로 용여홍에게 펠프스를 연기하도록 했지만, 사타구니를 두드리는 동작이 민망했는지 용여홍은 그냥 못 들은 척하고 말았다.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욕망 성인 교파에서 정말로 광란의 파티를 할 줄이야. 보아하니 K는 그들과 귀족 계층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연결점인 모양이야.”
“전부는 아니죠.”
백새벽이 상당히 단호하게 덧붙였다.
장목화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며 생각에 잠겼다.
“K가 욕망 성인 교파 사람이라고 치자. 그럼 가리발디가 구조 요청한 건 더 수상해져. 너무 급한 나머지 무선 통신기를 챙기지 못한 건 아주 정상적이야. 근데 K 집에 들어간 후 며칠이 지나도록 그 사실을 발각당하지 않은 건,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치기에도 너무 과한 거 아냐?
K의 집에선 수시로 이런 광란의 파티가 열려. 그러니 그 안엔 욕망 성인 교파 각성자도 적지 않을 거야. 그중 기원의 바다 수준에 이른 자만 있어도, 저택 어딘가에 숨은 인간 의식 한 줄기 정도는 충분히 감지해낼 수 있겠지. 가리발디는 각성자도 아니니 자신의 의식을 숨길 수 없잖아.
그 각성자들이 욕망의 분출에만 정신이 팔려 주위 경제를 못 했다고 해도 K 집에 도착했을 때는 비밀 유지가 목적이 아닌 이상 또 다른 사람의 존재를 감지했을 거야. 광란의 파티가 열릴 때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욕망 성인 교도들이 자발적으로 K의 집에 찾아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운전 중이던 백새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것 같지는 않아요. 광란의 파티에 참석한 수많은 귀족은 일반인이었어요. 기껏해야 유전자 개량을 했을 뿐이죠. 그들이 비밀을 유지할 가능성은 극히 낮아요.”
용여홍도 동조했다.
“그래요, 모든 창문에 커튼을 쳐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파티 자체는 굉장히 눈에 띄는 편이었잖아요. 주위 구역에 사는 이들이라면 많건 적건 어느 정도 눈치를 채기는 했을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떤 모임이 열리는지 몰랐을 뿐, 의심은 했겠죠.”
성건우 역시 웃으며 말을 보탰다.
“우리라고 다른 사람들은 몇 년이 지나도록 알아내지 못한 진상을 단 하루 만에 알아낼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니까요.”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K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건 반쯤 공개된 비밀일지도 모르지. 그럼 가리발디의 구조 요청이 함정일 가능성은 없는 걸까?”
이번에 백새벽과 용여홍은 답하지 못했다. 그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성건우는 진지하게 답했다.
“그들이 어느 정도 함정을 준비해놓았을지 모르겠네요.”
장목화는 이 토론을 더 심층적으로 진행하며 상세한 분석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구조팀의 여러 비밀이 폭로될지도 몰랐다. 이 순간에도 잔나가가 타심통으로 자신들 마음을 감청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내 그녀는 전방의 허공을 바라보며 평범한 크기의 목소리로 말했다.
“선사, 이 일은 욕망 성인 교파와 연루돼 있어요.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고 어렵네요. 어떤 생각이신가요? 저희가 일단 사원으로 돌아간 뒤 동료를 구출할 방법을 고민하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타진하고 기회를 마련해 충돌 규모를 통제하는 저희 모습을 보고 싶으십니까?”
장목화는 수정의식교와 욕망 성인 교파의 관계가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수정의식교는 밝은 곳에서 사원을 짓고 공개적으로 전도할 수 있는데 반해 욕망 성인 교파는 암암리에 일부 귀족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수십 초 후, 잔나가의 음성이 구조팀원들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 일단 가서 보도록 하지요.
“좋습니다.”
장목화는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보아하니 수정의식교는 욕망 성인 교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백새벽도 한숨을 토하며 레드울프 구역으로 차를 몰았다.
* * *
차를 수리하러 가는 대신 곧장 마스가르 거리로 향한 구조팀은 이제 콜론자의 집 정문 맞은편에 섰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떠보듯 물었다.
“선사, 선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의 이번 행동이 위험할 것 같나요?”
그녀는 잔나가에게 모종의 예언 능력이 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잔나가는 1분이 지난 후에야 답을 내놓았다. 지연되는 답에 구조팀은 상대도 이젠 타심통을 거두고 질문을 듣지 못한 것이라 생각했을 때였다.
잔나가가 덤덤하게 말했다.
- 미리 세워둔 방안을 엄격히 따르면, 뜻밖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너무 모호한 예언인데. 뜻밖의 상황이라니, 어떤 뜻밖의 상황?’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잔나가가 더 이상의 설명을 늘어놓지 않자, 그녀는 몸을 틀어 성건우와 용여홍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계획에 따라 움직여보자.”
계획의 첫 번째 단계는 기다림과 관찰이었다.
저택 안에 있는 인원은 많지 않은 듯했다. 콜론자와 그의 심복, 시종, 경호원은 일하러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성건우와 용여홍은 회색 캔버스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의 가슴팍에는 레드리버어가 쓰여있었다.
「퍼스트 시티 전력 수리 회사」
이후 차에서 내린 성건우와 용여홍은 미리 정해둔 곳으로 달려가 전선 하나를 냅다 끊었다. 그렇게 콜론자의 집은 정전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