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53화 (453/649)

453화. 수정의식

그 시각, 회색 가운을 입은 잔나가는 새카만 오토바이를 몰고 거리와 골목을 누비며 레드울프 구역 동쪽 끝으로 향했다.

도시를 거의 벗어나려 할 즈음, 구조팀 눈앞에 사원 한 채가 나타났다.

총 7층인 건물은 황토색 바탕에 파란색이 칠해져 있고, 각기 다른 레드리버식 기둥과 대형 창문으로 장식된 데다 애쉬랜드 풍의 각종 부처님, 보살, 명왕의 조각상도 볼 수 있었다.

건물의 상위 다섯 개 층 가장자리에 놓인 이 조각상들은 정말로 이 시방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했다.

- 거의 도착했습니다.

다시 잔나가의 목소리가 구조팀의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다.

장목화는 곧 자신을 포함한 팀원들이 이 독특한 사원 안에서 감시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수정의식교인가요?”

그녀가 건물 양식을 보고 추측했다. 장목화의 목소리는 그리 크진 않았는데, 그래도 그녀는 잔나가가 자신의 질문을 똑똑히 들었으리라 확신했다.

잔나가는 오토바이의 속도를 살짝 낮추며 답했다.

- 그렇습니다.

도망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던 장목화는 별생각 없이 물었다.

“선사, 우린 살던 곳에 많은 물건을 남겨두고 왔습니다. 여기 열흘간 붙잡혀 있는 동안 그걸 다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죠?

그리고 우린 태양열 충전기를 사려던 중이었습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차에 쓰려고요. 열흘 이후, 만약 예정대로 동란이 발생한다면 아마 태양열 충전기를 살 기회가 없어질 겁니다. 불모지로 피난 가지도 못한 채 이 도시에 갇혀버리고 말겠지요.

선사, 저희와 함께 가셔도 좋으니 거기 한 번 다녀오면 안 되겠습니까? 신변을 마저 정리할 수 있게요. 정 안 되겠다면 사미승 몇몇을 파견해주십시오. 주소도 알려드리고 열쇠도 드리겠습니다.”

잔나가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사원을 바라보며 덤덤하게 답했다.

- 좋습니다. 이따가 주소와 열쇠를 주세요.

장목화는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선사. 아, 참. 우리가 오늘 외출한 건 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원수의 집에 갇혀 도망치지도 못하고 있지요.

선사,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건 7층 불탑을 쌓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선사의 예언으로 한 사람이 목숨을 잃게 내버려 두진 않으시겠지요?

차라리 저희와 함께 그 사람이 갇힌 곳으로 가서 저희 행동을 지켜보시고 저희가 도망치지 못하게 예방하시지요.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희도 무기를 쓰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면 말로 해결하는 게 제일 좋지요.

그러니 이로 인해 큰 난리가 일어나진 않을 거고, 정 마음이 안 놓이신다면 저희가 그 동료를 구하는 걸 직접 도와주셔도 됩니다. 이의는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지요.”

용여홍은 장목화의 말재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른 사람을 마주했다면 이런 말도 소용이 없었겠지만, 지금까지 봐온 모습에 따르면 잔나가는 정말로 자비를 베풀 줄 아는 스님이었다.

그때, 잔나가는 새카만 오토바이를 멈추고 뒤에서 따라오고 있던 흑녹색 SUV를 돌아보았다.

백새벽도 얼른 브레이크를 밟았다.

장목화는 잔나가의 눈빛을 가만히 받아냈다. 그녀는 정말로 가리발디의 탈출을 돕겠다는 핑계로 이 상황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 초 후, 잔나가가 왼손을 세우며 말했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빈승이 시주님들과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잔나가의 답을 듣고, 용여홍과 백새벽은 퍽 기뻤다.

장목화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사실 그녀는 잔나가가 이 제안에 응하리란 기대가 없었다. 그냥 느낌에 따라 한 번 던져봤을 뿐이었다. 그 느낌은 잔나가가 했던 말과 행동에 대한 관찰과 기억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사!”

성건우는 창밖으로 손을 뻗고, 진심을 담아 두어 번 흔들었다.

곧이어 잔나가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시주님들, 앞장서시지요.”

오토바이 방향을 돌려세운 그가 다시 그 위에 올라 액셀을 당겼다.

백새벽은 능숙하게 핸들을 꺾어 옆쪽 골목길 콜론자의 집으로 향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선사, 우리 동료의 원수에게는 든든한 배후가 있고,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습니다. 무턱대고 방문했다가 만나선 안 될 사람과 만나거나 맞닥뜨려서는 안 될 사건과 맞닥뜨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럼 선사께서 막아주셔도 일이 잘 해결되지 않을 수 있어요.

저희가 전에 골든애플 구역에 있었던 건 한 귀족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희 동료 원수의 손님으로, 비밀스러운 파티에 종종 참석한 사람이라 뭔가 아는 게 있지 않을까 추측한 거죠.

그 사람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면 그 후에는 방안의 가닥도 잡히고 언제, 어떻게 행동에 나설지 결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차 옆을 달리는 잔나가의 목소리가 구조팀의 머릿속으로 울려 퍼졌다.

- 세운 계획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제가 시주님들을 막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선사.”

장목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성건우가 의혹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선사, 그렇게 자비로우신데 왜 퍼스트 시티 노예 문제나 공장 환경 문제, 노동 강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진 않으십니까? 왜 그린올리브 하층민들과 외래 유랑자들을 이끌고 귀족들과 대화하려 하진 않으십니까? 많은 권리와 생산 자원을 쟁취한 귀족들과 아름다운 신세계를 건설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그만둬⋯⋯.’

장목화가 속으로만 무력하게 외쳤다.

그녀는 수정의식교의 이념과 잔나가가 추구하는 목표에 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만약 상대가 정말 자비와 중생 구제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성건우의 이런 질문들은 그의 뺨을 연거푸 갈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자제심이 부족하다면 잔나가는 분노와 수치심에 구조팀을 당장 죽일지도 몰랐다. 자제심이 있어도 이마 혈관쯤은 불룩 튀어나올 터, 무엇보다 보리 영역에 속한 그는 치른 대가가 정신적 결함일 가능성도 분명 있었다.

장목화가 걱정하던 그때, 용여홍은 바들바들 떨었다. 핸들에 얹은 백새벽의 오른손에도 푸른 핏줄이 불룩 돋아난 것이 보였다.

‘아, 쟤는 왜 이때 저런 말을 하는 거야? 이러다 우리 죽을 수도 있다고!’

용여홍은 속으로 고래고래 외쳤지만, 진짜 화가 나진 않았다. 분명 성건우의 질문엔 아무 적의도 없었고, 그냥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해서 내뱉은 말임을 알고 있었다. 통제가 가능하다면 그건 대가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잔나가는 아주 오랫동안 침묵했다. 성건우를 제외한 나머지 세 팀원이 지금 당장 임전무퇴의 마음으로 공격에 나서야 할지 말지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까지 정적은 계속 이어졌다.

마침내 입을 연 그는 한숨부터 내뱉었다.

- 그럴 수 없으니까요.

“⋯⋯.”

그의 답에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은 입술만 쩍 벌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성건우가 막 입을 떼려는데, 잔나가가 덧붙였다.

- 게다가 우리 수정의식교의 중점은 정신 단련과 의식 수행에 있습니다. 자비는 본성을 비춰본 이후의 자아 깨달음과 인지일 뿐, 모든 승려가 가져야만 하는 마음가짐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런 승려들 역시 이렇게 상관없는 일에 신경 쓰지는, 시주님들을 막지는 않을 겁니다.

나무아뇩다라삼먁삼보리, 빈승의 나이는 이미 적지 않습니다. 그간 많은 일을 봐왔기에 아무리 형편없는 질서라도 질서가 없는 것보단 낫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유효한 체계를 갖출 수 있다는 충분한 확신이 들기 전까진, 다른 이들의 생명으로 본인 야욕을 채우려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건 귀족들에나 적용되는 이야기죠. 하층 주민들과 황야유랑자들이 저항하는 건 더 이상 이대로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건우는 정말 진지한 토론을 하듯 반박했고, 잔나가는 다시 침묵했다.

다시 장목화가 나설 때였다. 그녀는 알아서 때맞춰 분위기를 환기했다.

“흠흠, 선사. 수정의식교에도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계율이 있습니까?”

잔나가가 솔직하게 말했다.

- 그렇습니다. 출가인은 남을 속이면 안 됩니다. 하지만 답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지요.

검은 오토바이 위,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인 그의 회색 승복이 바람에 마구 나풀거렸다. 박박 민 머리와 손에 쥔 염주 말고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몇 초 후, 잔나가가 입을 열었다.

- 시주님들, 애쉬랜드에서 살아가는 중생들의 고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성건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저희가 행하는 모든 일은 다 전 인류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잔나가는 또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성건우의 속마음을 경청하며 그의 생각과 말이 일치하는지 확인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잔나가가 한숨을 내뱉었다.

- 시주님처럼 그렇게 웅대한 포부를 가진 사람은 결코 흔치 않지요. 빈승은 젊었을 당시에도 그런 엄두는 내본 적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보수적으로 변했고요.

‘건우가 솔직하다고 칭찬하는 겁니까, 아니면 건우의 이상이 높기만 하다고 지적하는 겁니까?’

장목화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잔나가가 그녀의 이 마음을 읽었는지, 읽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계속 말이 이어졌다.

- 시주님의 말과 행동은 완벽하게 일치하고 마음은 티 한 점 없이 깨끗합니다. 의지는 굳건하고 반짝반짝 알아서 빛을 내는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집착 역시 망령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수정처럼 깨끗하고 맑은 의식을 가질 순 없어요. 만약 정도에 흥미가 있으시다면 빈승은 기꺼이 시주님의 길잡이가 되겠습니다.

이번엔 용여홍이 절로 탄식을 내뱉었다. 잔나가가 성건우를 마음에 들어 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탓이었다.

‘젠장, 정상인이라면 건우 말에 코웃음을 치거나 농담으로 치부하지 않나? 보리 영역의 각성자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건 환자끼리의 호감 같은 건가?’

순간 용여홍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 생각을 막 떠올리자마자 쇠망치로 머리를 때리고 싶었다. 잔나가는 이런 생각까지도 다 들을 수 있었다. 타심통에 겁을 먹자 어느새 말보다 생각이 더 풍부하게 앞서 흐르고 있었다.

이때, 장목화 역시도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선사, 수정의식교 성찬은 무엇입니까?’

동시에 성건우가 매우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사, 수정의식교 성찬은 무엇입니까?”

그 사이 백새벽은 웃음을 애써 참으려는 듯 입술을 오므렸다. 그녀 또한 장목화처럼 성건우가 이런 질문을 하리라는 걸 예상한 모양이었다.

잔나가는 사실대로 답했다.

- 우리 수정의식교에 성찬은 없습니다. 성물만 있을 뿐이지요. 성물은 보리와 탑입니다. 먹을 것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꺼립니다. 그 외의 제한은 없으나 내 손으로 직접 죽인 사냥감을 먹을 순 없어요.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그 계율을 피할 수 있는 음식을 떠올려보았다.

‘훠궈와 바비큐는 맵고 자극적인 음식에 속하지 않나? 적어도 대부분은 그럴 것 같은데.’

이내 성건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선사, 아마도 저는 보리와 연이 없는 모양입니다.”

잔나가도 더 이상의 강요는 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구조팀을 따라 골든애플 구역으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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