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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야여화-452화 (452/649)

452화. 잔나가

백새벽 또한 순간적으로 반응했다. 그녀가 액셀을 끝까지 밟자, 묵직한 SUV는 우렁찬 소리를 내며 앞으로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중이 왼손에 쥐고 있던 염주를 굴렸다.

장목화는 정말 참기 힘들 정도로 극단적인 고통이 밀려들었다. 흡사 강철 바늘이 꽂힌 함정에 빠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탕! 탕! 탕!

조건반사적으로 그녀의 오른손이 움츠려진 탓에 총알은 길가의 석판으로 치우치게 됐다.

성건우마저 이글거리는 불바다에 빠진 듯 피부가 활활 타오르는 고통에 잠식돼 한껏 몸을 웅크렸다. 버튼을 누를 힘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백새벽도 끔찍한 고통에 빠지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뜨거운 물이 끼얹어진 듯한 느낌에,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결국 그녀의 오른발은 저도 모르게 힘이 풀렸고, 고작 몇 미터 정도 나아갔던 차는 금세 느려졌다.

마지막 용여홍까지 얼음 굴에 떨어진 것처럼 온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덜덜 떨기 시작했다. 몸은 뻣뻣하게 굳고 생각 역시 얼어붙었다.

육도윤회의 지옥도였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형의 고난 속에 구조팀은 모든 저항력을 잃었다.

아니, 장목화의 왼손만은 예외였다. 왼손만은 알아서 차 밖으로 뻗어지더니 손에 쥐고 있던 금속 동전 하나를 내던졌다.

파직-

은백색의 전광이 방출되며 전광은 내던져진 동전을 휘감은 채 한 줄기의 또렷한 꼬리를 그렸다.

콰아앙!

동전은 마치 거친 포탄처럼 중 앞에 떨어졌다.

성건우와 중과 얘기하던 사이, 장목화는 이미 앞으로 발생할 충돌에 대비했다. 여러 각성자와 마주한 경험으로, 특정한 몇몇 유형만 아니면 보조 칩에 미리 설정된 몇 가지 행동만으로 영향을 거의 피할 수 있단 걸 알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생체 공학 의수 속 칩은 상당히 간단하여 미리 설정해놓을 수 있는 동작이라고 해봤자 고작해야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체조 전 과정이라도 다 설정해둘 수 있는 게네바와는 달랐다. 그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을시 딱 한 번의 반격으로만 활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중은 이 역시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느새 길가의 석판 하나가 날아올라선 그 금속 동전을 가로막았다.

휘릭- 팅!

전광에 휩싸인 동전과 충돌한 석판은 새카맣게 타올랐지만, 앞이 가로막힌 동전은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동전을 던져 고압 전류를 방출하려던 장목화의 계획도 수포가 되었다.

지옥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에 구조팀원들은 거의 의식을 다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나무아미뇩다라삼먁삼보리⋯⋯.”

그 순간, 중이 다시 왼 염불에 모든 건 정상으로 돌아왔다.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몸부터 살폈다. 다친 부분은 없는데, 조금 전 겪은 극심한 추위만은 기억에 또렷이 각인돼 있었다. 이마와 등에 식은땀이 솟은 걸 보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분명했다.

“시주님들, 무의미한 저항은 고통만 초래할 뿐입니다. 빈승의 감시를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겁니다.”

중이 덤덤하게 말했다.

장목화는 보조 칩을 재프로그래밍하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사, 우리를 얼마나 감시할 생각입니까?”

“열흘입니다. 열흘이 지나면 바로 놓아드리지요.”

중이 간결하게 답했다. 그리고 장목화를 힐긋 바라보던 중은 그녀를 저지하는 대신 성건우에게 말했다.

“저를 억지쟁이로 만드시렵니까?”

성건우는 웃으며 양손을 펼친 후, 그냥 생각만 했을 뿐 실천할 의도는 없었음을 표했다. 그러곤 한결 더 여유롭게 물었다.

“선사는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빈승의 법명은 잔나가입니다.”

그는 앞에 떨어진 석판을 천천히 원래 자리에 되돌려놓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통제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구조팀은 저 중이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임을 확신했다.

“선사는 어느 교파 소속입니까?”

성건우는 한층 더 심층적인 질문을 했다.

그러자 선사 잔나가는 녹색 눈동자로 주위를 슥, 한 번 훑어보았다.

“여긴 한담하기 좋은 곳이 아닙니다. 시주님들, 빈승을 따라오십시오.”

“앞장서십시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장목화도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예를 들어 감시당할 곳을 스스로 정할 수도 있고,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운 아이가 한 명 있는데 구조팀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면 제대로 생활할 수도 없어 바로 데려와야 한다고 얘기해볼 수도 있었다.

심지어 장목화는 잔나가를 차에 태우는 방안도 고민했다. 이 중을 따라 여유롭게 거리를 돌아다니다간 남들의 시선을 끌기 십상이었다.

“참으로 자비로우십니다.”

어쨌든 인정하는 바였다. 질서의 손은 구조팀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지만, 잔나가는 구조팀의 목숨을 원하지는 않았다.

잔나가도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가 염주를 쥐지 않은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옆쪽에서 검은 오토바이 한 대가 날아왔다.

눈을 휘둥그레 뜬 용여홍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사이 잔나가는 몸을 훌쩍 날려 오토바이에 탑승하더니 액셀을 당겼다.

오토바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자 잔나가는 자세를 낮춰 침착하게 말했다.

“시주님들, 빈승을 따라오시면 됩니다.”

승려, 회색 가운, 대머리, 오토바이, 매연으로 이루어진 충격적인 광경에 용여홍, 장목화, 백새벽 모두 멍한 얼굴이 됐다.

반면 성건우만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선사, 차를 타지 않는 이유는 뭔가요?”

잔나가는 오토바이의 균형을 잡으며 솔직하게 답했다.

“차는 너무 무겁습니다.”

‘차는 너무 무겁다고? 그게 이유야? 차 무게랑 모는 차 유형이 무슨 상관이래? 사람은 차를 모는 거지, 차를 짊어지는 게 아니잖아.’

뒷좌석의 용여홍은 조금 전 극심한 추위로 떨어뜨린 권총을 집으며 생각에 잠겼다. 잔나가의 말을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잔나가는 이미 검은 오토바이를 타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백새벽은 하는 수 없이 액셀을 밟아 그 뒤를 따랐다.

보조석에 앉아있는 장목화는 잔나가의 뒷모습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타심통이란 능력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지? 저 사람이 모든 걸 다 예견할 수 있다면 승산이 아예 없다는 거잖아. 스스로를 희생해 무심자가 된다고 한들 오로지 본능에만 의지해 승리해봤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무엇보다 승리를 차치하고, 무심자는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고 보면 저 사람은 분명 기계 승려 정법보다 강해.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도 우리 생각을 또렷하게 파악했잖아. 타심통은 본인에게 속한 능력일 거야. 우리에게 고통을 안긴 능력은 염주에서 기인한 걸 테고. 그러니까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쓸 수 있었던 거지.

사물을 조종하는 것도 기본 능력으로, 타심통과 모순되진 않나 봐. 석판으로 전류를 막아냈을 때 바늘 수천수만 개에 찔리는 듯한 느낌은 여전했어. 근데 분명 완화되긴 했지. 그럼 일정 영향을 받긴 하는 것 같은데.

타심통은 보리 영역 능력이고 상응하는 대가는 정신 상태, 욕망의 변화랑 감각과 연관돼 있어. 거짓말을 못 하는 게 대가일 수도 있다는 거야.

저 사람은 방금 우리가 한 질문들에 다 대답해줬어. 그래, 거짓말을 못 하는 게 대가일 가능성도 분명 있는데, 그건 저 사람 교파에 존재하는 계율 때문일지도 몰라. 승려 교단에도 그와 비슷한 계율이 있었잖아.

여태까지 모습으로 봐서 저 사람 감각기관에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성욕이 증강된 것 같지도 않아. 지금은 대가를 추측할 수가 없네. 저 사람 인격이 분열돼 있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안 그럼 지금은 자비로운 잔나가가 나중엔 잔인하게 변할 수도 있잖아.’

장목화도 이 생각이 잔나가에게 고스란히 읽힐 걸 알았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충분히 할 법한 반응이었다.

또한 그녀는 기껏해야 각성자 상황을 조금 더 아는 데다 기계 승려 정법과 접촉해본 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런 생각을 했다고 잔나가의 역린을 건드리거나 하지는 않을 터였다.

구조팀의 대책이 폭로될 염려도 없었다. 현재 그들에게 이 상황을 타개할 대책 따위도 없었으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들킬 순 없는 법이었다.

시커먼 오토바이는 방향을 틀어 다른 거리로 꺾어 들었다. 장목화는 전방을 주시하다가 뒷좌석에 있는 성건우와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성건우는 엄숙했다가, 즐거워 보였다가 또 때로는 묵직했다가, 다시 여유를 보일 때도 있었다. 꼭 만화경 같은 가면을 쓰기라도 한 것 같았다.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망설이던 장목화가 물었다. 이 질문이 성건우의 방안을 누설할까 걱정하진 않았다. 어차피 타심통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건 아예 없었다.

곧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온 성건우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우리 다 각자 해결 방안을 세우곤 있는데, 최종적으로 어느 걸 택할지 투표는 안 하고 있어요. 저 사람은 우리 토론을 듣더라도 그 모든 방안에 대처할 방안을 세울 순 없어요.

우린 때가 되면 상황에 맞춰 투표한 뒤 곧장 행동에 나서면 돼요. 그럼 저 사람이 우리 방안을 예측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수 초, 수십 초 정도에 불과하겠죠. 그만한 시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긴 어려워요. 이 작전 이름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예요.”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야.’

멍한 표정을 드러낸 용여홍은 성건우의 방안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목화는 미간을 찌푸린 채 대꾸했다.

“문제는 너, 아니, 우리도 투표하기 전까진 모든 방안에 대해 충분히 준비가 안 된다는 거잖아.”

준비되지 않은 쪽과 준비되지 않은 쪽이 맞서는 상황인 셈이었다.

성건우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게 이 방법의 가장 큰 난제긴 하죠. 또 방법 하나 더 있어요. 계속 쉬지도 않고 생각해서 저 사람이 내내 감청하도록 하는 거예요. 우린 종일 생각할 수 있지만 저 사람이 온종일 타심통을 유지할 순 없을 테니까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기원의 바다 급에 불과한 성건우를 훨씬 능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능력에는 한계가 따랐다.

성건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용여홍의 머릿속에서는 평온하고 덤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분명 그렇긴 하죠. 하지만 시주님들은 제가 언제 타심통을 쓸지, 그리고 또 언제 사용하지 않을지 알 수 없습니다.

잔나가의 목소리였다. 아니, 명확히 귀에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용여홍은 장목화, 성건우, 백새벽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료들도 자신 같은 환각을 겪은 건지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다음 순간, 장목화가 좌우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 타심통은 반대 방향으로도 쓸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나 봐.”

잔나가는 타심통으로 구조팀원들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그들에게 본인 생각을 들려줄 수도 있었다.

장목화는 시선을 거두며 전에 본 몇몇 자료를 떠올렸다.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 실행하려던 의식 교류 실험에 가까운 능력이야.’

그리고 용여홍은 잔나가로부터 아예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비관적인 생각만 더 깊어졌다.

잔나가가 24시간 내내 타심통을 쓸 수 없다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구조팀은 그가 언제 해당 능력을 쓰는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또 방안을 예상한다고 해도, 잔나가가 또 이를 알고 있을 거란 가능성도 생각해야 했다.

무엇보다 무시무시한 건 잔나가는 이들의 생각을 듣고도 듣지 못한 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구조팀의 계획을 냉정하게 방관하다가, 끝내 모든 비밀을 파악한 뒤 희망쯤이야 얼마든지 가볍게 짓밟아 없앨 수 있었다.

용여홍은 이번에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의 위력을 제대로 실감했다. 잔나가는 상태가 좋지 못해 결함을 또렷하게 드러낸 디마르코나 고급 각성자와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동시에 용여홍은 한 가지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각성자 영역에서는 선수를 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전에 구조팀이 디마르코를 깔끔히 처리하고 가상 세계를 파훼할 수 있었던 건 몰래 숨은 상태에서 정보를 바탕으로 선수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잔나가가 가진 예지와 타심통이란 능력은 그 자체로 선수였다.

침묵이 맴도는 흑녹색 SUV 안, 구조팀은 한동안 침묵만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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