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화. 새로운 임무
1층 패스트푸드 식당은 여전히 성황리 운영 중이었다. 장사가 꽤 잘 되는 듯했다. 소나영을 비롯한 여자들은 굉장히 바빠 보였지만 그 얼굴은 희망의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진짜 신부 사건 이후 구조팀은 한 번도 그들을 찾지 않았다. 혹여나 그녀들이 자신들과 연루돼 가까스로 얻은 새로운 삶을, 조금씩 쌓아 올리고 있는 미래를 잃어버릴 것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지금 보니 구조팀의 바람은 이루어진 것 같았다.
이제 구조팀과 소나영을 비롯한 이들의 관계를 추적할 수 있는 지점은 2개뿐이었다. 하나는 블랙셔츠파의 세컨드 보스 테렌스, 다른 하나는 여자들이 운영 중인 패스트푸드 식당의 식재료 원산지였다.
패스트푸드 식당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장원 주인은 벌써 2번이나 바뀌었다. 치안관들도 구조팀이 임무를 완수하고 받은 장원을 오레이로 바꾼 것까지 확인한 뒤론 더 이상 조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터였다.
또 성건우는 정기적으로 테렌스를 만나 그와 우정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이 퍼스트 시티를 완전히 떠나기 전까지는, 테렌스를 통해선 절대 구조팀과 관련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저 애들을 보니까 전에 한 일이 마냥 헛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네.”
보조석의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뒷좌석 오른쪽에 앉은 성건우 역시 활짝 웃었다.
“이게 바로 전 인류를 구원하는 즐거움이죠.”
잠시 멍해졌던 용여홍이 속으로만 꿍얼거렸다.
‘그냥 남을 도와주는 거라고 해. 무슨 말끝마다 전 인류의 구원, 전 인류의 구원, 헛소리 염불을 외는 건지…….’
* * *
늑대 소굴을 지나친 사파이어색 지프는 이제 다른 거리에 접어들었다.
그때였다. 한 골목길에서 일고여덟 명 정도 되는 사람이 걸어 나왔다.
맨 앞에 선 이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귀밑머리가 흰, 잘생긴 중년 신사였다.
그 뒤쪽에 자리한 이들 대부분은 남회색의 치안관 제복 차림이었고, 그중 둘은 한 남자를 끌고 가는 중이었다.
얼룩덜룩한 가죽옷을 입은 남자는 부드러운 이목구비에, 눈동자가 청록색이었다. 그리고 길고 검은 머리칼은 상당히 덥수룩한 상태였다.
그를 본 순간, 백새벽과 용여홍의 눈이 커다래졌다.
끌려가는 남자는 구조팀과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시민 집회 폭발 사건의 용의자이자 격투장 암살 기도 사건의 공범인 남자, 행위 교단의 구성원으로 아무 문제도 없는 입가를 스카프로 가려 치안관들을 헷갈리게 했던 디미스였다.
그 행위예술가가 질서의 손에 붙잡힌 것이었다.
백새벽과 용여홍은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 치안관들을 산책시켰던 디미스의 멍한 표정과 공허한 눈빛을 보았다. 뭔가 혼란스러운 빛도 어려 있었다.
의식을 잃지도 않고, 수갑이나 족쇄를 차지도 않았으며, 총으로 위협받지도 않았지만 마치 꼭두각시가 된 듯한 디미스는 아무 저항심도 없어 보였다.
사파이어색 지프가 방향을 틀면서, 성건우도 그 광경을 보게 됐다.
“저 사람이 잡히다니. 행위예술 실력이 부족했나 보네.”
장목화 역시 의아하긴 했지만 크게 놀란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강변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신발이 젖기 마련이야. 저 사람은 수시로 치안관 앞에 나타나 행위예술을 했어. 언젠가 잡힐 수밖에 없었다고. 질서의 손에 능력이 뛰어난 강자가 얼마나 많은데.”
백새벽도 깊이 동조했다.
“지난번에 봤을 때도 절벽 가장자리에 한쪽 발로만 서서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한두 번이야 무사할 수 있겠지만, 여러 번 반복되다 보면 결국에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는 행위 교단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는 거예요.”
성건우는 진지한 얼굴로 추측했다.
“성대하고 다양한 행위예술 공연을 선보이겠지.”
그 말에 용여홍의 상상이 날개를 달았다. 순간 머릿속이 벌거벗고 달리는 사람, 똥을 먹는 사람, 물구나무서서 걷는 사람 등등으로 뒤덮였다.
‘행위예술에 그렇게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이나 교단이 어떻게 본인 생존을 보장하는 걸까?’
이러한 각도에서 생각해보니, 용여홍도 행위 교단이 절대 만만한 집단이 아니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이때 장목화가 웃었다.
“행위 교단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이 일은 절대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거야. 큰 소란이 벌어져 제대로 갈등이 붙었으면 좋겠네.”
그때, 돌연 그녀의 표정이 멍해졌다.
“……잠깐만. 혹시 디미스가 여태 치안관 주위에서 약 올리고 행위예술을 했던 목적이 이거였나? 본인 의지는 아니었을 거야. 누군가 그의 취향과 습관을 이용한 거지.”
그녀의 말인즉슨 다른 누군가가 갈등의 심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구조팀 입장에선 굉장히 기대할만한 변화였다.
물이 흐려져야 아무도 모르게 고기를 잡아챌 수 있는 법 아니겠는가.
* * *
반 바퀴를 크게 우회한 끝에 안타나 스트리트 주위 구역에 이른 지프는 한명호가 몰래 준비해둔 안전 가옥에 도착했다.
안전 가옥은 낡은 아파트 2층이었다. 앞 건물은 목욕탕이었고 양쪽 옆과 뒤쪽 건물은 이곳처럼 거주용 아파트였다.
어느덧 하늘도 어둑해진 상황이었다. 거기다 저녁을 맞아 약간 거센 비도 함께 내렸다. 본디 여름은 비가 잦은 계절이었다.
한명호가 준비한 안전 가옥은 크지 않았다. 침실은 하나고, 거실과 주방은 거의 붙어있었다. 협소한 화장실이 힘겹게 구역을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용여홍도 이젠 막 지상에 올라왔을 때 비해 훨씬 경험이 풍부해져서 장목화, 성건우가 따로 경고하지 않았는데도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오른손을 허리춤에 얹었다. 언제라도 급습을 피하고 반격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집은 약간 축축하긴 했어도 그 외의 이상한 점은 없었다. 용여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 옆의 벽으로 손을 뻗어 스위치를 켰다.
탁-
그런데 아무리 스위치를 눌러도 전등이 켜지질 않았다. 아직도 창밖의 어스름한 빛과 성건우가 든 손전등 불빛만이 집의 윤곽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정전인가?”
용여홍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정전이 흔한 그린올리브에선 정전과 단수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였다.
대열 맨 끝에 서 있던 장목화는 주위를 한번 둘러본 뒤 밖을 가리켰다.
“저기는 전기가 들어오는데.”
그녀가 가리킨 것은 복도 맞은편 문이었다. 나무 문 아래 틈으로 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용여홍도 비로소 의문이 생겼다.
“같은 건물에서 이 집만 정전될 리는 없을 텐데⋯⋯.”
그러자 백새벽이 그를 힐끔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전기료를 안 내서 그래.”
“⋯⋯.”
흠칫 놀랐던 용여홍도 금세 동의했다. 이 집을 몰래 빌려둔 한명호는 은신과 안전을 위해 최대한 이곳으로 방문을 삼간 까닭에 전기료를 때맞춰 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용여홍이 백새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와 동시에 문을 여닫던 성건우가 바닥을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그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린 용여홍은 종이 몇 장을 발견했다.
성건우가 든 손전등 불빛 아래, 내용이 드러났다.
「전기 요금 납부 통지」
“통지서가 다 있네?”
손을 뒤로 뻗어 문을 닫은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그린올리브 주민 중에는 글을 아는 이보다 모르는 이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백새벽이 간단히 설명했다.
“보통은 직접 찾아와서 독촉해요. 계속 부재중인 집만 통지서 넣고요.”
대상자가 글을 모르는 문제는 전력부에서 고려할 일이 아니었다.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지금 이 시간에는 어디로 가서 요금을 지불해야 하지?”
용여홍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간 수많은 대형 사건을 일으키며 이젠 십수만 오레이 현상금이 걸린 데다 강도단을 사주해 퍼스트 시티 정규군을 급습하기까지 한 구조팀이, 지금은 연체된 전기 요금 납부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내일까지 기다려야죠.”
백새벽이 답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말했다.
“건우야, 작은 빨강이랑 같이 회로 다시 연결하고 공용 네트워크에서 전기 좀 끌어와라. 스스로 움직여야 입고 먹는 것도 풍족해지지.”
어차피 회사도 아닌데 공공 전기 좀 훔쳐 쓰는 것쯤이야 아무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그 비용을 주위 이웃들에게 떠넘길 생각도 없었고,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비용도 치를 생각이었다.
‘융통성 있게 굴어야 할 때는 융통성 있게 굴어야지, 그러지 않고 어떻게 임무를 수행하겠어?’
성건우와 용여홍이 작업을 마치자 방 안 백열등은 마침내 빛을 발했다.
하늘은 한층 더 어두워졌고,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던 장목화가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굳이 밖으로 나갈 필요 있나? 우리끼리 알아서 한 끼 해결하자.”
팀원들도 모두 다 동의했다.
이미 지프 트렁크에서 고기 통조림, 컵라면, 건조채소를 챙겨왔기에, 다들 인덕션으로 즉각 저녁 준비에 나섰다.
퍼스트 시티는 유적 사냥꾼도 아주 많고 외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군대도 적지 않아서, 이런 간편 식품 관련 시장과 산업도 굉장히 잘 갖춰져 있었다.
또한 야외 생활 경험이 풍부한 구조팀은 언제든 간편하게 한 끼 먹을 수 있는 식량은 항상 준비해두었다.
큼직하고 맛있는 소고기와 알록달록한 채소 조각이 든 컵라면이 금세 완성되었다. 진한 냄새가 방 안을 다 메울 정도였다.
테이블 의자가 두 개뿐이라 성건우, 용여홍은 자연스레 여자 동료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성건우는 도시락통에 음식을 담아 창문 앞으로 가서 창밖 풍경을 즐기며 먹었고, 용여홍도 함께 창가로 향했다.
소고기 한 조각을 먹고 컵라면 국물을 홀짝 들이마신 후, 용여홍도 친구를 따라 창밖을 한번 쳐다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에 흐려진 밤이지만, 건물들 창문은 노르스름한 등불 빛으로 밝혀져 있었다.
건물 안에서 사람들은 머리를 긁적이거나, 식사하거나, 아이를 어르거나, 서로에게 기대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건물 밖 거리엔 적잖은 사람이 바쁘게 오갔다. 더러는 비옷을 입고 우산도 썼지만, 몇몇은 고개를 숙인 채 애써 손으로 비를 막기 바빴다. 그런 사람들도 어느 건물로 들어서선 맞아주는 사람들에게 불평하는 표정을 보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용여홍은 이런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 깊은 곳에 안정감과 따뜻함이 몰려왔다.
한참의 침묵 끝에 그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퍼스트 시티에 난리가 나길 바라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일 아닐까요?”
혼란은 수많은 이들의 삶과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도시락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난 장목화가 창가로 다가오더니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가 바라지 않는다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아니잖아.”
백새벽도 입에 물고 있던 라면을 꿀꺽 삼키곤 용여홍을 돌아보았다.
“난리가 나지 않더라도 여기 사는 사람 중 대부분은 기껏해야 2, 3년밖에 못 살아.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고.”
안타나 스트리트는 부근의 공장 구역과 매우 가까웠다.
용여홍의 감회를 무정하게 깨부수는 말이었다.
성건우 역시 용여홍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퍼스트 시티는 전 인류를 구원하지 못해.”
“⋯⋯.”
용여홍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른 먹어. 면 다 불겠다.”
장목화는 때맞춰 분위기를 수습했다.
“네, 네.”
용여홍도 다시 도시락통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