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47화 (447/649)

447화. 겹치는 단서

빠르게 밖으로 나간 말로프는 복도 반대편 끝으로 가 짙은 붉은색 나무 문을 두드렸다.

“프레스 선생, 현재까지 확인된 상황은 이렇습니다⋯⋯.”

말로프는 포로들이 답한 내용을 종합해 간추려 전달했다.

10여 초 뒤, 방 안에서는 사력을 다해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사람들한테 그 남녀가 도착하기 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

“예, 프레스 선생.”

곧장 돌아선 말로프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진지하게 포로들을 주시하던 말로프는 프레스의 질문을 전했다.

이에 민머리 강도가 답했다.

“두 사람은 확성기나 스피커를 이용해 저희가 포위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알 수 없는 묘한 설교를 늘어놓았습니다.”

“어떤 설교?”

말로프가 캐물었다.

안색이 창백한 강도는 기억을 더듬으며 간략히 설명했다. 잘 모르는 걸 마주했을 땐 겸허하게 가르침을 청해야 하고, 처음부터 거부감을 품지 말고 포용적으로 학습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둥.

더 혼란스러워진 말로프는 몇 번이나 되물은 뒤에야 다시 프레스의 방으로 갔다. 말로프는 문 앞에 서서 프레스에게 다시 그대로 말을 전했다.

그런데 말로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굳게 닫힌 방 안에선 약간 놀란 듯한 프레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하명?”

* * *

퍼스트 시티 레드울프 구역, 로스타 스트리트 19호 질서의 손 본부.

벽 같은 치안관 월은 직속 상사인 레드울프 질서관 트레비스를 만났다.

트레비스는 앞에 놓인 문서 몇 장을 집어 월에게 건넸다.

“군대에서 몇 가지 피드백을 전달해왔다. 일부 부대가 노스 앙헤포드 구역에서 비밀 임무를 진행 중이라는군.”

자료를 넘겨보던 월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나친 우연 아닙니까?”

이 말은 구조팀이 퍼스트 시티 세력 범위를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닌, 노스 앙헤포드 구역에 흥미를 느껴 북안 불모지로 도망친 것 같다는 뜻이었다. 이건 군에서 진행 중이란 비밀 임무와 어느 정도 관련돼 있을지도 몰랐다.

트레비스는 테이블 앞에 앉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확실히 공교롭긴 하지. 그래서 자네에게 그 자료를 준 거야. 앉게, 앉아서 천천히 읽어봐.”

월은 사양치 않고 자리에 앉아 손에 쥔 문서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미혹된 강도단과 경계심을 낮추는 음성에 관한 부분을 확인한 월의 표정은 점차 진중해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상사를 바라보았다.

“저희는 서시월 팀이 도시에서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조사하던 중에 어느 정도 단서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방송으로 밀수꾼들의 신뢰를 산 듯합니다.”

이는 강도단이 겪은 일과 매우 흡사했다.

트레비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물었다.

“그러니까 서시월 팀이 군에서 진행 중인 그 비밀 임무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다는 건가?”

월이 자신 있게 말했다.

“예,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공교로울 리 없습니다. 설득된 강도단이 진술한 남녀 한 쌍, 특징으로만 봐도 서시월과 장우병으로 추정됩니다. 충분한 위장과 은닉을 한 데다 모든 목격자를 죽여버리기까지 했지만 지나친 우연은 오히려 의심을 사기 마련이죠.”

트레비스가 말을 받았다.

“그들이 북안 불모지로 향한 데에는 분명 나름의 목적이 있을 거야. 그리고 이 사건에는 모종의 위험한 존재도 연루돼 있지.”

월은 그 위험한 존재에 대해서는 따로 묻지 않았다. 트레비스가 바로 설명하지 않은 건 자신도 아직 그 존재에 대해 알 자격이 없기 때문일 터였다.

이에 월은 나중에 돌아가 새로 승급한 원로이자, 군의 실권자인 장인어른 가이우스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한 차례 얘기가 더 오가고, 트레비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자네들이 찾은 단서와 그걸 바탕으로 한 추측을 상부에 보고하겠네.”

* * *

노스 앙헤포드, 한 폐허 도시.

“초봄 마을 주둔군 경계가 한층 삼엄해졌어.”

한명호가 관찰 결과를 알렸다.

장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용여홍, 백새벽, 게네바를 돌아보았다.

백새벽이 즉각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퍼스트 시티 쪽에서 여기로 접근 중인 새로운 부대가 나타났어요.”

그녀와 용여홍은 관찰을 위해 군용 외골격 장치까지 착용했었다.

한명호와 정도연의 표정이 무거워진 그때, 장목화가 웃었다.

“잘된 일이야.”

“맞아요, 맞아요.”

성건우가 친구 용여홍을 흉내 내며 동조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정도연의 표정을 보고, 장목화가 설명했다.

“퍼스트 시티에선 우리가 남몰래 독수리 강도단을 사주했다는 사실을 알아낸 거야. 보아하니 그 사람들도 마냥 멍청이는 아닌 건 같아. 우리가 이번에 저지른 짓이 헛된 게 아니었다고.”

“어째서지?”

한명호가 물었다. 그의 눈엔 초봄 마을의 방어력만 강화돼 마을을 구하긴 더 어려워진 것으로 보였다.

장목화가 웃었다.

“내가 전에 분석했듯 우리 힘만으로 초봄 마을을 구하긴 불가능해. 너희가 겨울까지 버틸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게다가 겨울까지 기다린다고 꼭 성공라리란 보장도 없고.

그렇다면 차라리 퍼스트 시티에서 엘리트 팀을, 심령의 복도 급 강자를 더 파견하게 해서 방어력을 공고히 하게 만들고, 우리를 내쫓는 게 나아. 그리고 우리는⋯⋯. 퍼스트 시티로 돌아가는 거야.”

말을 마친 장목화의 눈빛이 매우 진지해졌다.

“예?”

이번에는 용여홍도 그녀의 생각을 따라잡지 못했다.

다시 장목화가 소리 내어 웃었다.

“퍼스트 시티 정세는 원래부터 아주 미묘한 상태였어. 거의 혼란의 가장자리에서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있었잖아.

우리 때문에 대량의 인원과 강자들이 도시 밖으로 빠져나간다면, 힘겹게나마 평평한 상태를 유지하던 저울은 그대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커. 그때를 노리면 우리도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거야.

퍼스트 시티에 큰 사태가 발생하면 초봄 마을에 주둔해 있던 강자와 군대는 황급히 복귀하려 하겠지. 그럼 이쪽의 방어력에는 빈틈이 생길 테고.”

모두의 눈이 커다래지던 그때, 장목화는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이게 바로 성동격서라는 거야.”

장목화의 설명에 모두가 복잡한 생각에 잠겨 말을 잃었다.

그중 오직 성건우만이 친구 용여홍을 흉내 내며 짐짓 놀란 듯 물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건가요?”

용여홍도 즉각 성건우에게 속으로 동조했다.

‘그래, 만약 처음부터 지금 상황을 생각했던 거라면, 이 모든 게 계획이었다면 그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일이지!’

장목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겐처럼 지능인이 아니잖아.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처음부터 철저히 분석해 이 상황까지 계획했겠어. 우린 초봄 마을에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있다는 것도, 퍼스트 시티로 돌아가야 하는 임무가 있는지도 몰랐잖아.

강도단을 이용해 초봄 마을 주둔군 상황을 알아보려 했을 때도 어차피 약한 그 사람들을 이용해봤자 별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할 거라 생각했어.

야의 능력에만 의지해 충분한 화력을 갖춘, 대규모 적에 대적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오가는 몇몇 주둔군에게 영향을 미쳐봤자 도중에 또 우리가 한 말에 어긋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잖아.

그에 반해 오하명의 녹음을 이용하는 건 가장 간단하고, 편리하고, 또 예상치 못한 변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가장 적어.

우린 퍼스트 시티를 도망쳐 나올 때도 녹음된 오하명의 음성을 썼었어. 질서의 손은 한동안은 아무 단서도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갈피를 잡지 못하리라 여기는 건 그들을 과소평가하는 거지.

이 두 사건의 공통점을 통해 이제 그들도 일정한 연상을 해낼 거야. 전자는 숨길 수도 없는 거고.

강도들을 이용하려면 오하명의 음성을 들려줘야 하는데, 그때부터 우릴 노출한 거나 마찬가지야. 영원히 비밀을 지키려면 강도들을 다 죽여야 하는데 그건 말도 안되는 얘기잖아,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적막을 뚫고, 백새벽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한테 목격자를 죽이라고는 하셨잖아요.”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럼 우리가 너무 일부러 특정한 사실을 드러내려 한 게 티 나잖아.”

‘이, 이건 너무, 교활한 거 아닌가?’

용여홍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다시 장목화의 말이 이어졌다.

“난 당시 이렇게 생각했어. 오하명의 녹음된 목소리를 숨길 수 없다면 그걸 이용해 함정을 만들자고.

만약 초봄 마을에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강도단의 야간 기습으로 혼란해진 틈을 타 마을 주민들을 구하고 새로운 거점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을 거야. 후속 조치는 더 걱정할 필요도 없었겠지.

반면 퍼스트 시티에서 진행 중인 비밀 실험이 생각보다 더 중요하고, 우리 힘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가 우리 정체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진짜 목적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게 내 계획이었어. 그럼 이 사건은 질서의 손의 추적과 연동되면서 변화를 맞겠지.

전부터 계속 얘기했잖아. 이 사건에선 뜻밖의 상황이 일어나길 기대해야 한다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퍼스트 시티는 실력이 막강하고 소속된 강자도 상당히 많아. 일부 병력만 시내에서 빠져나와도 내부의 야심가들은 엉덩이가 들썩들썩할 거야.

물론 우리가 바라는 소란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분명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을 거라고 봐. 왜냐하면 초봄 마을 사건 이전부터도 시내 정세는 상당히 긴장돼 있었잖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

말의 마지막 부분은 정도연에게 향해있었다. 사실 장목화 본인도 별 확신이 없어 운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큰 기대를 품는 대신 남들에게 미안할 필요 없게 최선은 다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장목화는 반고 바이오에서 최근에 내린 지시와 자신이 뭐라고 답했는지까지는 언급하지는 않았다.

사실 후자는 뜻밖의 사건, 혹은 행운과 다름이 없었다. 반고 바이오에서 도움을 제공한다면 당연히 가장 좋고 일도 훨씬 수월했겠지만,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다 한들 전체적인 계획 진행에 어떤 영향이 미치진 않을 터였다.

한동안 말이 없던 정도연이 자조하듯 웃었다.

“이런 방향으로도 일을 추진할 수 있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일의 차원이 엄청 높아진 것 같은데.”

원래는 정규군 2중대와 심령의 복도 급 강자 한 명에만 대적하면 됐을 일이 이제는 온 퍼스트 시티와 대적해야 하는 수준으로 불어나 있었다.

한 마디로 더 많은 군대와 대량의 선진화된 무기, 온 북안 불모지를 뒤덮을 수 있을 정도의 화력과 셀 수 없는 강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 사건의 난도를 알아서 수백 배, 수천 배 이상으로 부풀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장목화는 이것이야말로 초봄 마을을 구해낼 기회라고 했다. 정도연이 듣기엔 좀처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장목화가 웃으며 덧붙였다.

“우린 원래부터 존재했던 상황을 우리한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것뿐이야. 퍼스트 시티에 그렇게 심각한 내부 갈등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무리 큰 사건을 일으켜봤자 별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겠지.

하지만 지금이라면 따로 불을 지필 필요도 없어. 우리는 그저 그쪽이 적합한 환경을 만들어내도록 돕기만 하면 돼. 하하, 퍼스트 시티가 하나로 똘똘 뭉쳤다면 그 결속력이 최저 수준이라도 우린 진즉 붙잡히고도 남았겠지.”

용여홍은 이제 장목화의 말에 완전히 넘어가 있었다.

짝짝짝!

성건우의 박수도 조금 늦기는 했지만 빠지지는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