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6화. 보고
그때,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아니야. 6월에도 눈은 내릴 수 있어. 우박이 떨어질 수도 있고.”
용여홍이 막 구세계 콘텐츠에서 나온다고 무조건 진짜인 건 아니라고 지적하려는데, 정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모지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날 때도 있어. 흔치는 않지만.”
이곳 환경은 워낙 어수선해서 각종 극단적인 날씨가 나타나기도 했다.
장목화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한다고 눈이 때맞춰 내려주는 건 아니잖아. 하……. 보자, 근육의 무력화도 겉만 봐도 판단할 수 있어. 근데 문제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그 사람을 직접 볼 수가 없다는 거야.
감정의 불안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초봄 마을 주둔군이 이번 습격에 보인 반응을 통해 단서를 찾아볼 수 있고.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대가들이 대가의 전부인 건 아니고.”
장목화 말의 요지는 전부 다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지금은 성공률을 논할 단계조차 아니었다.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정도연이 쓰게 웃었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네. 원래는 어느 정도 실력 있는 유적 사냥꾼 팀만 끌고 오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실제로는 질서의 손이 인당 2만 오레이를 건 강력한 팀마저도 초봄 마을을 구하는 것에 적잖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건 퍼스트 시티가 너희 마을에서 진행 중인 실험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야.”
장목화는 분명 위로의 취지로 말을 건넸지만, 그녀 스스로도 정도연을 위로하려는 건지, 외려 자극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몇 초간 침묵하던 정도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태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고마워. 이 일, 정말로 희망이 안 보인다 싶으면 그냥 포기해도 좋아.”
구조팀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 정도연은 한명호 쪽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숙인 채 연하게 웃었다.
“난 그냥 혼자서 시도해보려고. 어차피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실패한대도 꼭 최선을 다해 돌아올 거야. 너한테 심장을 줄 수 있게.”
짧은 정적 후, 장목화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그런 불길한 얘기는 아주 나중에 해도 돼. 우리한테 계획을 세우거나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최소 두 달이야. 그때쯤에는 설령 우리가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해도 뜻밖의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예를 들어 그 사람이 갑자기 무심병에 걸린다든가, 퍼스트 시티에 난리가 나서 이곳에 있는 강자와 정규군을 급히 소집한다든가⋯⋯.”
‘너무 과한 바람인 것 같은데요.’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솔직히 그 역시 그런 기적이 벌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성건우도 장목화의 말에 동조했다.
“맞아요, 여기 갑자기 눈보라가 몰아쳐서 그 각성자가 그대로 얼어 죽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네가 무슨 달지기의 아들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용여홍이 성건우를 살짝 위아래로 훑어내리며 웃었다.
장목화 역시도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 사람, 겨울잠에 들지는 않으려나? 음, 오늘은 일단 쉬고, 내일은 초봄 마을 주둔군들 반응을 살필 기회가 있는지 한번 잘 살펴보자.”
* * *
날이 밝아올 무렵, 한명호와 정도연이 불침번을 섰다.
백새벽과 용여홍을 대신해 자청한 것이었다.
한명호는 어두운 폐허만 보던 정도연을 돌아보다가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어쨌든 난 너한테 약속한 대로 시도는 한번 해볼 거야.”
2초간 말이 없던 정도연이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한명호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동이 튼 뒤 한명호와 정도연이 물을 뜨러 간 사이, 주위를 둘러보던 장목화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초봄 마을 상황에 대해서.”
백새벽이 먼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장목화와 용여홍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성건우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엄지와 검지를 붙여 입술을 한번 그었다. 입에 지퍼를 채우겠단 뜻이었다.
그때, 게네바가 가장 핵심 부분을 지목했다.
“그 사람의 기본 능력이 뭔지만 알아도 좋을 텐데.”
그의 말은 작열하는 문 영역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얻은 기본 능력이 전파를 방해하는 건지, 물질을 간섭하는 건지 정확히 모른다는 뜻이었다.
만약 후자라면 게네바에게 그를 제압할 방법이 있을 터였다.
장목화도 뭔가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확인해 볼 방법은 마련할 수 있겠다.”
* * *
초봄 마을에 대한 심층적인 관찰을 진행하는 동안, 벌써 저녁이 됐다.
구조팀은 정해진 시간에 재차 무선 통신기를 켜 회사에서 보낸 지시 사항이 있는지 확인했다.
한명호와 정도연을 피하지는 않았다. 이 두 사람은 구조팀에 배후 세력이 있다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마침내 돌아온 반고 바이오의 회신에 용여홍은 놀라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코드를 기억하는 장목화는 전보 내용을 종이에 그대로 해독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반고 바이오가 구조팀에 지시한 후속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아비아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찾아보도록.」
할 일은 정보를 얻는 게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장목화는 이 짧은 문장에 숨겨진 의미를 선명히 파악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보는 특정 내용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또 다른 뜻을 확실히 표명하고 있기도 했다. 불모지 13호 유적의 그 비밀 실험실에는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실 장목화는 이에 대해 일찍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퍼스트 시티는 벌써 수십 년 전에 그 실험실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암호를 파악했음에도 여전히 그곳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것만 봐도 그곳이 얼마나 위험할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퍼스트 시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네.”
용여홍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단 이쪽 일부터 마무리 지은 후에 얘기해 보자.”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는 퍼스트 시티산 볼펜을 꺼내 종이에 뭔가를 슥슥 적기 시작했다. 반고 바이오에 회신을 보내려는 모양이었다.
용여홍과 성건우는 호기심이 들어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글을 확인했다.
「우리는 이미 퍼스트 시티를 빠져나와 북안 불모지에 대피해 있음. 이곳 노스 앙헤포드 구역에서 퍼스트 시티 비밀 실험 장소를 발견. 그들은 감염자 및 돌연변이가 많은 한 마을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 방어 병력도 상당한 수준임⋯⋯.」
‘팀장님은 퍼스트 시티가 유전자 실험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회사를 끌어들여 초봄 마을을 구조하려는 건가?’
용여홍은 장목화가 쓴 내용에서 거짓도, 과장된 부분도 찾지 못했다. 게다가 이는 상당한 실행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전보를 보낸 뒤 종이를 태워버린 장목화가 한쪽에 있는 한명호와 정도연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좀 더 기다려보자.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
* * *
초봄 마을.
하루를 꼬박 생각해도 독수리 강도단이 갑자기 습격한 이유를 알아내지 못한 퍼스트 시티 소령 말로프는 결국 마침내 깨어난 포로들을 마주했다.
독수리 강도단 구성원 대부분이 목숨을 잃고 소수의 몇몇만 탈출에 성공했고, 사로잡힌 이들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에 상태도 그리 좋지 못했다.
말로프는 초봄 마을 구 촌장의 방에서 축 늘어진 세 강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리 고민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가 너희를 충동질한 거냐? 누가 여길 습격하라고 했지?”
말로프가 볼 땐 불모지에서 가장 강력한 노이스 강도단도 감히 퍼스트 시티 정규군에 대적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초봄 마을을 지키고 있는 군대는 평범한 부대보다 더 뛰어나기까지 했다.
이내 한 강도가 고통에 점철된 목소리로 답했다.
“저, 저희는 속은 겁니다. 이곳 주둔군이 오랫동안 불모지에 머물러 있었으니만큼 사기가 떨어졌을 줄 알았습니다. 장비만 빵빵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 한 대 치기만 하면 우르르 무너져 내릴 거라 여긴 겁니다.”
또 다른 강도가 얼른 동조했다.
“마, 맞습니다. 두목은 퍼스트 시티 주둔군은 거만해 마음을 마냥 놓고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급습하기만 하면 혼란에 빠져 어떠한 반항도 하지 못할 거라고, 그러니 가서 전리품만 챙기면 된다고 했습니다.”
말로프와 병사들은 의혹이 해소되긴커녕 얼굴만 붉혔다. 이들의 진술이 군대의 실제 상황과도 어느 정도 부합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대가 초봄 마을에 파견된 지도 벌써 두세 달이 지났다. 속에서는 욕망이 끓어도 끔찍한 모습으로 변이된 마을 주민을 보면 온갖 마음이 다 사라졌고, 조급한 마음에 7일 주기 근무를 마치고 퍼스트 시티로 돌아갈 휴일만 기다렸다.
든든한 장비에 퍼스트 시티란 막강한 이름까지 가진 이들은 누구도 자신들을 습격하지는 못할 거란 생각에 평소 훈련 시에도, 일상적인 순찰을 할 때도 형식만 그럴듯하게 갖춘 채 나태하게 굴기 일쑤였다.
독수리 강도단이 밤을 틈타 습격해왔을 때 순간 혼란에 빠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존재가 없었더라면 방어선을 재정비하지도, 반격에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었다.
부대의 지도자인 말로프는 포로들의 진술에 양 뺨을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레드리버 권총을 뽑고 싶었다. 별일이 없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럼 말로프 자신은 군사 법정에 끌려가는 신세가 됐을 터였다.
말로프가 숨을 느릿하게 내뱉었다.
“그걸 알려준, 아니, 너희를 속인 건 누구지?”
피를 많이 흘려 안색이 창백해진 한 강도가 더듬더듬 답했다.
“남녀 한 쌍이었습니다. 저희 거점 중 한 곳으로 찾아왔어요.”
“어떻게 생겼지?”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어진 말로프의 물음에, 맨 처음에 답한 강도가 고개를 흔들었다. 박박 깎은 그의 민머리에는 말라붙은 검은 흙이 묻어있었다.
또 다른 강도가 황급히 설명했다.
“밤이었고 비도 내렸습니다. 거점을 밝히는 횃불도 적고, 손전등은 더욱 적었습니다. 그 두 사람과 직접 대화한 몇을 제외하곤 나머지 중 그 두 사람 생김새를 제대로 확인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너희 중에는 없다?”
말로프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강도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교로운 우연인가? 분명 그 둘과 얘기했을 두목이 죽어버렸으니.’
말로프는 다시 화제를 전환했다.
“음, 그들은 너희 두목을 어떻게 설득했지? 너희 두목은 또 어떻게 너희를 설득한 거고?”
안색이 창백한 강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그 두 사람은 조금 전 저희가 말씀드린 그대로 말했습니다. 저희도 그때 왜 두목, 아, 아스를 믿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소라면 이런 큰일을 앞뒀을 때 누군가가 의혹을 표했을 텐데⋯⋯.”
말로프는 예리하게 문제점을 콕 짚었다.
“그 두 사람이랑 너희 두목이 얘기를 나눈 시간이 얼마나 되나?”
민머리 강도는 처음에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곧 확신했다.
“5분도 안 됐습니다. 예, 분명 5분도 안 됐었습니다!”
말로프는 다시금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질문을 던졌다.
“뭘 보여주지는 않고, 얘기만 나눴다고?”
“그랬습니다.”
강도들이 앞다퉈 답했다.
곧이어 말로프가 방에 있는 병사들을 힐긋 보며 몇 발짝 서성였다.
“너희 두목이 너희를 설득할 때, 그 두 사람은 뭘 하고 있었지?”
안색이 창백한 강도가 사실대로 고했다.
“거점 가장자리 그늘에 숨어있었습니다. 우리 두목이 우리를 설득하자 그제야 주둔군의 순찰 노선, 드론의 감시 패턴, 주위 지형을 알려줬습니다.”
말로프는 몇 걸음 더 서성이다가 방 안의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이 사람들 지켜보고 있어라. 곧 돌아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