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44화 (444/649)

444화. 독수리들

“근데 그 상황을 어떻게 파악해? 난 마을 사람과 연락할 방법도 없어.”

정도연이 걱정스럽게 입을 뗐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성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유적 사냥꾼들의 겁 많은 성격을 탓해야지 어쩌겠어.”

“뭐?”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건 용여홍만이 아니었다. 한명호도, 정도연도 똑같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들을 위해 장목화가 웃으며 설명에 나섰다.

“그 유적 사냥꾼들이 퍼스트 시티 정규군과 마주치자마자 더 나아갈 생각을 못 하고 곧장 물러난 게 문제라는 거야.

그러니 아무런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충돌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선 퍼스트 시티 정규군의 실제 실력을 파악할 수도 없으니까.

음,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초봄 마을에 머무르며 주변 수백 미터 반경을 감시하겠지. 외부 순찰을 담당할 리는 없어.”

용여홍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유적 사냥꾼이었어도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상황에 대형 세력과 충돌을 빚으려 하진 않았을 거야. 게다가 그 정규군은 소대 단위로 순찰을 돌잖아. 3~40명의 사람이 함께 움직인다고.

완전하고 온전한 무기를 갖춘 사람들을 일반 유적 사냥꾼 팀이 어떻게 거슬러? 그들한테 강도로 지목당해 가진 물자를 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때, 한명호가 입을 열었다.

“순찰대와 한 번 붙어보는 게 어때?”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방법이지. 근데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 이런 상황에서는 직접 나서지 않을 수 있다면 최대한 직접 나서지 않는 게 좋아. 공연히 적들의 경계심만 드높이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잖아.”

그리고 한명호가 재차 묻기도 전, 장목화는 정도연을 바라보았다.

“노스 앙헤포드 구역과 그 주위 지대에 위험하기로 소문난 강도단은 없어? 그 사람들은 보통 어디에서 나타나?”

장목화의 생각을 알아차린 한명호가 물었다.

“강도단을 시켜 정규군을 건드릴 생각인 건가? 근데 그 사람들이 그런 일을 기꺼이 해줄 리가⋯⋯.”

순간 뭔가가 떠오른 듯 한명호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속으로만 생각하던 용여홍도 소리 내 중얼거렸다.

“그 사람들은 어울리기도, 굴복시키기도 쉬운 상대지.”

성건우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어, 장목화도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때로는 말릴 수도 없고 말이야.”

정도연은 순간 그 강도단이 어쩐지 좀 가여워졌다.

그래도 그녀는 빠르게 정신을 차린 뒤 사력을 다해 기억을 뒤졌다. 아주 신중하고, 꼼꼼히 재수 옴 붙은 대상을 고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 * *

노스 앙헤포드, 한 폐허 도시.

더는 그 어떤 유적 사냥꾼도 찾지 않는 이 폐허 도시 가장 높은 빌딩 꼭대기 층에, 나름 온전하고 깨끗한 통창을 바라보는 한 인영이 있었다.

각양각색의 건물, 넓고 좁은 길, 수리 가능성이 없는 고물 자동차까지, 시야를 다 메우지도 못할 정도로 거대한 도시였지만, 이미 구세계가 된 대지는 너무도 황량하고 처참해 보이기만 했다.

구세계의 영광은 찾을 수도 없는 이 도시는 온통 녹색 식물에 뒤얽혀, 모기들의 천국이 되었다. 진정한 밀림이나 다름없는 세상이었다.

통창 앞에 선 이의 이름은 아스, 독수리 강도단의 두목이었다. 북안 불모지에서 그의 명성은 노이스를 비롯한 동업자보다 약간만 뒤떨어질 뿐이었다.

사실 아스는 노이스 강도단이 별로 탐탁지 않았다. 그들은 머리가 나쁜 탓에 뒷일을 생각지 못해 노예 거래에 참여하는 등 나중의 이익에 손해가 되는 짓을 하기 일쑤였다.

아스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꼭 필요한 자원이라고 여겼다. 불모지의 사람들에겐 돈을 벌어다 줄 능력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노예 상인에게 팔아버리는 건 그야말로 세상 멍청한 짓이었다.

심지어 아스는 황야유랑자 거점뿐만 아니라, 퍼스트 시티 노예 포획대가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게 막아줘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황야유랑자들은 피에 흐르는 본능에 따라 경작하기 적합한 곳에 거점을 지었고, 아스는 늘 그 수확기에 맞춰 독수리 강도단을 데려가 약탈을 했다.

즉, 아스가 사람들을 노예 포획대에서 보호해줘야 한다는 건, 오로지 자신들의 식량을 위한 일꾼으로 생각해서였다.

이러한 책략과 크고 작은 여러 거점 덕에 독수리 강도단은 식량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하루하루 당당히 살아갔다.

그들은 거점을 약탈할 때도 식량을 죄다 털어가지 않고 반드시 일부는 남겼다. 그래야만 그곳의 황야유랑자들도 사냥을 통해 얻은 고기와 남은 식량을 가지고 간신히 겨울을 나며, 이듬해도 계속 경작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독수리 강도단은 당연히 이 목적을 직접 밝히진 않았다. 아스는 핑계를 대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거점에서 택한 여자를 취한 뒤, 그것에 대한 대가인 것처럼 식량을 조금 돌려주었다.

만약 상대가 이를 거부한다면 아스는 총, 칼, 피로 이곳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잔인하게 알렸고, 그러한 폭력성을 통해 끝끝내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다.

구세계 역사책을 보는 걸 좋아하는 아스는 심지어 강도단이 통제하는 구역에서 초야권을 실행할지 말지를 고민하기도 했다.

다만 그런 거점을 손아귀에 완벽히 넣을 순 없었다. 퍼스트 시티의 노예 포획대, 강도단을 쫓는 정규군, 다른 강도단, 이따금 강도를 겸하는 일정 규모의 유적 사냥꾼 팀이 모두 거점을 노렸기 때문이었다.

애쉬랜드의 사람들이 아직도 거점 주민들을 황야유랑자라 부르는 건 애초에 그들이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서였다.

7, 8년 혹은 그보다 더 짧은 시간까지도 현실에 쫓겨 수없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래도 아스가 다행으로 여기는 건, 다른 강도단은 자신들도 상대의 전리품으로 전락할 것을 우려해 노예 상인과만 거래할 뿐, 감히 퍼스트 시티의 노예 포획대와 합작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독수리 강도단에 식량을 제공하는 거점도 이미 다 얼마 남아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또한 아스는 광맥 자원을 장악하고 있어, 본인 사업을 위해 거점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강도단들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이해했다.

이렇듯 식량이 기본적으로 보장된 독수리 강도단의 행동 양식은 그 이름과 똑같았다. 내내 사냥감 주위를 빙빙 선회하며 기다리다가 상대가 약한 부분을 드러낸 순간 곧장 달려들어 가장 기름지고 맛있는 부위를 쪼아먹었다.

이는 아스가 폐허 도시에 진입할 때마다 고층 빌딩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곳에 있으면 꼭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만물을 장악한 듯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의 눈에 북안 불모지에 있는 이들 중 약한 모습을 보인 자들은 곧 죽을 사냥감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아스의 강도단은 그들이 점차 시체로 변해 썩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 * *

밤이 내려앉고, 폐허 도시도 어둠에 물들자 아스는 못내 아쉬운 듯 시선을 거두고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왔다.

그에게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일종의 단련이었다.

물론 오르는 것에 비하면 내려오는 게 훨씬 쉬웠지만, 구세계 책을 애독하는 아스는 계단을 내려올 때면 늘 긴 바지 위에 무릎 보호대를 착용해 관절을 보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는 것이 힘이라니까⋯⋯.”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아스는 구세계 속담을 떠올렸다. 어렸을 적 선생님에게 배운 말이었다.

당시만 해도 황야유랑자 거점에서 살았던 그는 매주 돌아가며 선생님 역할을 맡은 어른들에게 글을 배웠었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 밖에 나가 사냥을 할 수 있게 된 이래, 너무 오랜 시간 굶주림에 시달리고 갖가지 상황에 강렬한 욕망을 느끼다 보니, 결국 동료 한 무리를 이끌고 나와 강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힘겨운 경작보다야 갈취가 낫다고, 아스는 구세계 속담으로 본인을 합리화하며 악행에 첫발을 뗐다.

이제는 아스가 속했던 황야유랑자 거점도 사라지고 없었다. 강도를 나쁘게 보는 어른들은 세월이 흘러 다 세상을 떠났고, 남은 이들은 아스를 따르거나 다른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아스가 빌딩 1층으로 돌아오니, 부하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카드 게임을 하는 무리, 어제 훔친 포도주를 마시거나, 복도 깊은 곳에 자리한 다른 방에 숨어 서로 뒤엉켜 있는 이들도 있었다.

애쉬랜드에는 여자 강도도 드물지 않았다. 총은 아무리 힘이 약하고 가녀린 여자들도 무시무시한 존재로 만들어주었다.

이내 말끔히 깎은 살쩍을 만지작거리던 아스는 빌딩 밖에서 순찰 중인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곧 비가 올 거다! 경계를 늦추지 마!”

이곳은 독수리 강도단의 거점 중 하나였다. 아스는 이런 폐허 도시를 좋아했다. 이렇게 큰 곳에선 이들의 거점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거의 넓은 바다에서 바늘을 찾는 수준이었다.

“예, 두목!”

빌딩 밖에서 기관단총을 든 강도들이 답했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아스는 빌딩 1층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장갑차 2대, 대포 여러 개, 수많은 기관총이 그의 시야를 스치며 지났다.

이때, 오랫동안 무르익은 비구름이 마침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세찬 비는 아니었지만, 밤 풍경을 더 흐릿하게 만들어주기에는 충분했다.

도시를 통틀어 이 빌딩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적막에 잠겼다.

“너희들은 이미 포위됐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해라!”

그런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을 휘둥그레 뜬 아스는 손을 한 번 휘둘러 모든 부하에게 적습에 대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약간 지직거리는 소음이 들리더니 소리를 내는 사람이 바뀌었다. 몹시 매력적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 그러니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 모르는 걸 마주했을 때는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청해야 합니다. 경험으로 형성된 견해를 내려놓아야 하고, 처음부터 거부감을 품는 대신 포용적인 자세로 학습하고, 이해하고, 파악하고, 받아들이려 해야 합니다.

비 내리는 적막한 밤, 전류 흐르는 소리와 함께 음성이 잔잔히 퍼졌다.

강도들의 머릿속에는 분분히 물음표가 떠올랐다. 적이 돌연 설교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상황과 어울리는 말도 아니었다.

아스는 어렴풋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다년간 경험이 비정상적인 상황은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드디어 음성이 멈추자, 검은 우산을 하나씩 받쳐 든 두 인영이 독수리 강도단이 자리한 빌딩 쪽으로 다가왔다.

“멈춰!”

아스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무래도 수상한 상황이라 직접적인 발사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우린 친구가 되려고 왔어!”

한 인영의 소리에 아스는 입을 쩍 벌렸다.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두 인영은 곧 극단적인 어둠에 뒤덮인 폐허 도시에서 손전등과 횃불 등으로 밝혀진 빛의 세계에 진입했다.

남녀 한 쌍이었다. 남자는 장신의 미남이었고, 여자도 씩씩한 미인이었다. 예쁜 사람들은 얼굴만큼이나 곱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 이름은 아스, 독수리 강도단의 두목이야.

난 높은 곳에서 폐허 도시를 내려다보는 걸 좋아해. 내가 꼭 이 세상의 주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

난 다른 강도들과 달라. 난 경작자들의 필요성과 안정적인 식량 공급원의 중요성을 알아. 내가 보기에 노이스 같은 녀석들은 위험하긴 해도 똑똑하진 않아. 돈 벌겠다고 노예 상인과 합작해 불모지의 황야유랑자들을 팔다니. 아무래도 미래에 대해선 아무 생각도 없는 모양이야.

우리 강도단은 약탈할 수 있는 대상만 약탈해. 마치 높은 하늘의 독수리처럼 약한 건 모두 썩은 고기로 여겨.

난 이런 생활이 계속 유지될 거라 생각했어. 우리 강도단은 내내 번창하며 끝끝내 북안 불모지의 지배자가 되리라 믿었어.

그 두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이날, 독수리 강도단 두목 아스와 그의 부하들은 아무 의심도 없이 초봄 마을 주둔군을 아주 약한 상대라 믿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