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돌파구
그리고 용여홍은 또 무슨 말인가 하려는 백새벽을 보고 웃었다.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아. 낮은 급의 치안요원들이 이 틈을 타 그 가련한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 명목으로 그들이 얻은 위로금을 갈취할까 봐 걱정스럽다는 거지?”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퍼스트 시티 치안요원들의 자질에 지나치게 많은 믿음을 가지면 안 돼요. 그들 중 대부분은 애초에 그런 자질 따위가 없으니까요.”
장목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일은 이미 커질 대로 커졌어. 상부의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그러니 아무리 그들이라도 선 넘는 짓을 하지는 못할 거야. 약간의 금전적 이익을 얻어내려 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까지 막을 순 없어.
웨트를 비롯한 이들의 가족들 역시 퍼스트 시티에 살고, 여기 오랫동안 머물렀으니 그것까지 피할 순 없다는 건 알 거야.
게다가 우리를 제외한 누구도 그들이 위로금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몰라. 돈 조금 뜯어 간다고 그 사람에게 큰 영향이 가지는 않고.”
“네.”
백새벽도 그 분석을 받아들였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성건우가 두 음절을 내뱉었다.
“명호!”
‘헉, 그래! 우린 친구 한명호를 찾는다고 현상금을 걸었어!’
순간 용여홍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장목화의 안색도 착 가라앉았고, 백새벽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게네바의 눈에서도 붉은빛이 몇 차례 번득였다.
* * *
“그 무기들을 얻으면 우린 다른 사람들과 합류해 네가 살던 그 마을로 갈 거야.”
자신의 소총을 등에 멘 한명호가 옆쪽의 정도연을 보며 말했다.
“좋아.”
정도연의 얼굴도 살짝 밝아졌다.
아래로 내려가 거리로 나선 그들은 안타나 스트리트로 방향을 꺾으려 했다. 그 순간, 한명호의 시야에 익숙한 정보상이 들어왔다.
한 골목길에 웅크린 정보상은 고개를 쏙 내민 채 바깥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그도 한명호를 발견하고 오른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한명호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좌우를 두리번거린 뒤 자신에게 신경 쓰는 이도, 의심스러운 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정보상은 골목길 안쪽으로 물러나 목소리를 잔뜩 죽이며 말했다.
“당분간 몸 좀 사려. 질서의 손이 널 찾고 있어. 엄청나게 노력한다고!”
한명호의 미간이 팩 구겨졌다.
“왜?”
정보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몰라. 난 그냥 너한테 경고해주러 온 거야. 보수도 장난 아니야! 나도 마음이 동할 정도였으니까. 전에 네가 날 도와줘서 내 아들놈이 때맞춰 치료받지 못했더라면, 난 분명 그 보수를 택했을 거야. 얼른 떠나, 다음에 다시 마주치면 그때 우리는 적일 테니까.”
‘내가 너를 도왔다는 이유로?’
한명호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그린올리브 구역, 안전 가옥 안.
숨을 한번 고른 용여홍이 말했다.
“명호가 우리 때문에 이 사건에 끌려들지는 않겠죠? 명호가 솔직하게만 말하면 아무 문제도 없잖아요. 우린 레드스톤 마켓에서 합작한 적 있고, 그러니 지인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외에 다른 관계는 없다고요. 음, 질서의 손은 분명 그 말이 거짓이 아니란 것도 확인할 수 있을 거고요.”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기론 그런데. 하……, 한명호는 아류인이잖아.”
그녀는 표정만큼이나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퍼스트 시티 주민들은 유전자 연구 및 오염으로 인한 돌연변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증오했으며, 아류인이라면 특히 더 멸시했다. 거기다 원로원이 아류인 호위대를 건립한 이후부터는 그들을 향한 멸시에 원한까지 더해졌다.
아류인이라는 정체가 발각되면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한들 죽을 때까지 고초를 당하게 될지 몰랐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특수한 능력과 건강한 신체를 바탕으로 원로원의 아류인 호위대에 영입되는 것뿐이었다.
“어쩌죠?”
용여홍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도 이젠 장목화의 답변을 통해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파악했다.
아류인에 대한 멸시는 애쉬랜드 곳곳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그중에서도 퍼스트 시티는 그 멸시가 비교적 심한 지역이었다.
검은 쥐 마을 주민들이 당한 끔찍한 일은 용여홍에게도 강력히 각인돼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로 인한 악몽을 꾸곤 할 정도였다.
장목화는 진지한 표정의 성건우를 힐긋 보더니 잠시 고민 끝에 말했다.
“확실히 위장하고 나가자. 질서의 손보다 먼저 명호를 찾아야 해!”
* * *
정보상에게 소식을 들은 한명호는 정도연과 재빨리 집으로 돌아갔다. 오가는 행인은 죄다 피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무슨 짓 저질렀었어?”
의혹 가득한 눈으로 한명호를 지켜보던 정도연이 먼저 침묵을 깼다.
한명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이런 상황이 펼쳐진 것인지 그 역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나도 나쁜 짓을 저지르고 남들을 해친 적이 있어. 그래도 그건 다른 곳에서 있던 일이야.”
한참을 생각해도 질서의 손의 추적을 받을만한 일이 떠오르진 않았다. 아류인이란 정체가 폭로된 건지도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질서의 손을 대대적으로 움직일 일은 아니었다.
‘설마, 내가 최근 접촉한 누군가가 큰일을 저지른 건가?’
창밖을 내다보던 한명호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유 고민할 시간 없어. 지금 당장 이동해야 해.”
“그래.”
정도연이 동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다짜고짜 나갈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빠르게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재료로 위장해서, 이동하는 도중 누구에게도 시선을 받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 * *
두 사람은 각자 시간 차를 두고 1층으로 내려가면서 그간 준비해놓은 물자를 차례대로 차에 옮겼다.
작업을 마친 한명호는 방문을 잠근 뒤 가지고 있던 낡은 검은색 SUV를 몰고 안타나 스트리트 반대편으로 향했다.
손님이 꽤 많은 한 목욕탕을 우회한 차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골목길로 들어와 낡은 아파트 앞에 멈췄다.
“2층.”
한명호가 간결하게 말했다.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간 정도연은 열쇠를 꺼내 적갈색 나무 문을 여는 한명호를 바라보았다.
한명호도 그녀가 궁금해한다는 걸 느끼고 알아서 입을 열었다.
“미리 마련해둔 곳이야. 애쉬랜드에서는 조심해서 나쁠 게 없지.”
정도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알아, 교토삼굴. 영리한 토끼는 굴을 세 개씩 파둔다잖아.”
한명호가 의아한 듯 뒤를 보자, 정도연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우리 마을에 감염자와 돌연변이가 아주 많았지만, 식량은 늘 충분했고 환경도 안정적이었어. 덕분에 구세계 지식이 적잖게 보존돼 있었지. ”
한명호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넌 여기서 쉬고 있어. 난 그 무기상이 이 상황을 알아차리기 전에 안타나 스트리트에 가서 무기를 가지고 올 테니까. 그래, 전에 머물던 거기로 가서 네 차를 가지고 가야겠다. 언제 또 이동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니만큼 내 차에 실린 물자를 내릴 순 없으니까.”
“같이 가.”
정도연이 매우 침착하게 말했다.
“네가 이런 모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한명호는 습관적으로 충고했다.
그러자 정도연이 웃었다.
“나처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한텐 생명보다 목표 달성이 더 중요해. 난 가까스로 찾아낸 도우미를 이렇게 잃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또 다른 도우미를 구할 시간도 없고.”
몇 초간 침묵하던 한명호가 간결하게 답했다.
“그래.”
한명호와 정도연은 위장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때, 전방의 계단을 보던 정도연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난 네가 나한테 알아서 떠나라고 할 줄 알았어. 질서의 손이 찾는 건 내가 아니라 너니까. 평소에도 그랬잖아. 늘 다른 사람부터 먼저 생각했지.”
한명호는 그녀를 힐끔 바라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건 아직까지는 누구도 내 핵심 이익을 해치려 하지 않아서야. 하지만 네 심장은 내 생명이랑 관련돼 있지. 그 무기들이 임무의 성공 여부에 긴밀하게 연관된 것처럼.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 거야. 위험을 감수해야 하더라도 가서 가져와야만 해. 날 착한 사람이라 여기지 마. 다 연기일 뿐이니까.”
앞을 보던 정도연은 간간이 곁눈질하며 거칠어 보이는 남자를 눈에 담았다.
“네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난 벌써 죽었겠지. 퍼스트 시티 정규군을 마주하는 것보다 나 하나를 처리하는 게 훨씬 쉬울 테니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약속을 지키는 게 본인 미래에 훨씬 더 도움이 돼.”
이제 아파트 밖으로 나온 한명호는 자신의 낡은 차를 향해 다가갔다.
“너도 방금 봤다시피 내가 했던 좋은 일이 좋은 보답으로 돌아왔잖아.”
정도연은 조수석에 오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데 넌 카르마를 믿는 사람같이 안 보이던데. 그 정보상의 행동을 굉장히 뜻밖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한명호는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양 차의 시동을 걸었다.
* * *
안타나 스트리트 근처.
구조팀이 빌린 차 두 대가 각기 다른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질서의 손에 맞서기 위해 그들은 이번엔 직접 렌터카 회사에 방문하지도 않았다. 이 차량 두 대는 성건우가 추리 광대 능력을 발휘해 두 유적 사냥꾼에게 부탁한 결과물이었다.
추리 광대의 효과는 시간이 흐르며 소실되지만, 애초에 그건 고려 사항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건 며칠이 지난 뒤의 얘기고, 구조팀은 그 전에 빌려온 이 차들을 버릴 작정이기 때문이었다.
장목화는 무전기를 들고 다른 차의 용여홍, 백새벽, 게네바에게 말했다.
“별일이 없다면 질서의 손과 일부 유적 사냥꾼은 분명 사냥꾼 길드에 남은 임무 서류를 바탕으로 한명호가 이 부근에 산다는 걸 파악했을 거야. 이곳에서부터 조사하려 하겠지. 그러니까 우린 여기서 단서를 찾고 있는 유적 사냥꾼인 척 차로 이동하면서 무슨 기척이 있는지만 관찰하면 돼.
그러다가 어디서 소란이 생겼다 싶으면 곧장 달려가, 명호가 다른 사람들한테 붙잡히기 전에 구해내는 거지. 음, 그동안 거리 행인들에 대한 관찰도 소홀히 하면 안 돼. 위장한 덕분에 아직 발각되지 않은 명호를 운 좋게 바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용여홍은 운전 중인 백새벽에게 이 말을 그대로 전한 뒤 다시 물었다.
- 만약 명호가 이미 이 근처를 떠났다면 우리는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하게 되는 거 아닌가요?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오히려 감사하지! 명호가 당분간은 위험하지 않으리란 뜻이니까. 좋아, 전에 말한 계획대로 각자 한 구역을 맡는 거야.
아 참, 행인을 관찰할 때 키가 작고 왜소한 여자가 있는지 주의 깊게 봐. 위장했다면 명호는 별로 티 나지 않겠지만 명호 동료는 아닐 거야. 이건 사냥꾼 길드에서도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지시를 마친 장목화가 운전 중인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안타나 스트리트에서 기다리자. 명호는 거기 나타날 확률이 제일 높아.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그녀가 싱긋 웃으며 성건우의 반응을 기다렸다.
“간단하죠. 전에 명호가 심장을 바꾸려고 엄청 어려운 임무를 맡고 그 합작파트너를 구한다는 걸 파악했잖아요. 그럼 상식적으로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는 데 필수적인 무기와 탄약, 통조림 등의 물자도 구하고 있겠죠.
만약 이런 준비를 다 마쳤다면 분명 벌써 출발했을 거예요. 병에 걸린 사람한테는 무엇보다 시간이 중요하니까요.
준비가 덜 된 상태라면 그건 인력이 아직 부족하거나 물자가 다 준비되지 않은 거겠죠. 물자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곳보다는 안타나 스트리트가 가장 적합하고요.”
장목화 역시 한명호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안타나 스트리트에 나타날 확률이 가장 크다고 표현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가설은 대담하게 세우되, 실증은 조심스러워야 하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