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마을의 일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은 돌아서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전보다 약간 빨라져 있었다.
아주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부근에서 총격 사건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한가로이 걷고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용여홍은 다른 마음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아직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차에 올라 이 격투장을 완전히 떠나야만 진정으로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열심히 걸음을 옮기는데, 두 보안요원의 무전기에서 어떤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들렸다. 이미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진 관계로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용여홍은 하마터면 그대로 굳어버릴 뻔했다.
중요한 순간 들려온 그 소리에 불안한 예감을 들었다. 용여홍은 여태까지 해왔던 모든 일이 한순간 헛수고가 되어버릴까 두려웠다.
용여홍은 당장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괜한 의심만 더 살 것이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더 나아갔을 무렵, 흑녹색 눈동자를 가진 보안요원이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잠깐!”
‘……이런.’
용여홍의 머릿속에 비참한 말로를 담은 장면들이 마구 떠올랐다.
장목화의 등 근육에도 살짝 힘이 들어갔다.
곧이어 성건우가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돌아서더니 약간 불쾌한 기색이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뭐지?”
두 보안요원이 빠르게 다가와 성건우의 왼쪽 소매를 가리켰다.
“그건 뭡니까?”
‘맹목의 고리.’
장목화가 속으로 답했다.
그녀도 상황을 대강 파악했다. 가상 세계의 주인은 당시 화장실에 있던 사람들의 데이터를 거르다가 성건우가 왼 손목에 찬, 아주 기이해 보이는 장신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성건우는 턱을 살짝 쳐들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어떤 사람 머리카락으로 짜서 만든 물건. 그게 무슨 뜻인지는 굳이 설명 안 해도 되겠지?”
뒤이어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소매를 홱 걷어, 검은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를 드러냈다.
쿵쾅쿵쾅-
장목화의 심장이 미친 듯 두근거렸지만 침착하게 연기에 심취했다.
“흥! 언젠가 그거 꼭 태워버릴 거야!”
동료와 시선을 주고받던 흑녹색 눈동자의 보안요원이 말했다.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성건우는 달갑지는 않다는 듯 맹목의 고리를 풀어 상대에게 건넸다.
각각 그것을 한 번씩 살피던 두 보안요원은 잔뜩 긴장한 용여홍 바로 앞에서 아무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을 표했다.
그 후 별 특징이 없어 보이는 보안요원이 귀에 무전기를 대고 잠시 경청하더니 다시 구조팀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제는 진짜 가보셔도 좋습니다.”
“다음에는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군.”
성건우는 불만을 드러낸 뒤 돌아섰다.
용여홍은 그제야 성건우가 이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성건우는 숙명주를 처리할 때 맹목의 고리에 담긴 힘도 심령 세계에 이전시킨 것이었다.
이 작업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랐지만, 이번 작전의 중요성과 비교해보면 그 정도 위험이야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즉 성건우가 보안요원에게 건넸던 맹목의 고리는 이미 평범한 장신구로 전락한 상태였다.
일찍이 그럴 줄 알고 있었던 장목화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맹목의 고리는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 아니었어. 이제 보니 이건 가상 세계의 주인을 제대로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아. 시력을 잃는다는 건, 어둡고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잖아.
어쩌면 이것의 능력만으로도 그를 까무러치게 할 수 있을지 몰라. 가상 세계 주인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네.’
* * *
구조팀은 하나하나 세워진 자동차들을 지나 빌린 차량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것은 용여홍이었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차는 마침내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용여홍은 감히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하고 운전에 집중했다.
그렇게 에이펙스 격투장에서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촉촉하게 다 젖은 상태였다.
하지만 용여홍도, 성건우도, 장목화도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가상 세계에서 제대로 벗어났는지 확인하려면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용여홍의 시야에 익숙한 누군가가 들어왔다.
이에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은 이미 텅 비어있었다.
한 골목길로 통하는 입구였다.
잠시 망설이던 용여홍이 레드리버어로 정중하게 말했다.
“명호를 본 것 같습니다.”
퍼스트 시티의 귀족도 한명호를 알고 있을 수 있었으니, 이러한 말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어디?”
성건우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 * *
종이가방을 쥔 한명호는 정도연과 함께 그린올리브 구역에 빌려놓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조그만 체격에 병색이 완연한 정도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거의 다 됐어. 마지막 두 가지 일만 남았지.”
“알아. 고생했어.”
단발머리에 안색이 누런 정도연이 한명호가 가져온 종이 가방을 받았다.
잠시 침묵하던 한명호가 말했다.
“밥은 내가 할게.”
“그럴 필요 없어. 네가 내 하인도 아니잖아. 내 요구는 네가 얻을 것에 비해 확실히 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엔 네게 이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맡기고 싶진 않아.”
정도연은 고개 숙여 자신의 갈색 신발을 바라보며 솔직하게 대꾸했다.
그녀가 심장의 대가로 요구한 것은 한 마을을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초봄 마을’이라고 불리는 그 마을은 애쉬랜드인의 거점이었다.
다른 곳에 비해 초봄 마을 주위의 생산량은 풍부한 편이라 주민들을 먹여 살리긴 충분했다.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주위의 수자원이 전부 어느 정도 오염돼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식량이 충분하니, 초봄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은 많은 병증으로 고통받았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 중에는 돌연변이도 수시로 나타났다.
정도연은 마을의 아이 중 그나마 건강하게 태어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로 인해 수많은 비극도 목격해야만 했다.
정도연이 거의 성인이 됐을 무렵, 길을 지나던 상인단에게 유적 사냥꾼이라는 직업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녀는 그들을 따라 마을을 떠났다. 더 좋은 거점을 찾아 고통받은 마을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처음부터 좌절되었다. 상인단은 초봄 마을로부터 멀어지자마자 얼굴색을 바꾸고 정도연을 노예로 팔아버린 것이다.
다만 다행히 큰 고통을 겪기 전, 같이 있던 노예들이 폭동을 일으킨 틈을 타 도망쳐 나온 그녀는 다시 큰 마을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은 그녀의 이상을 더 공고히 해주었다. 정도연은 그렇게 점차 날이 갈수록 진정한 유적 사냥꾼으로 거듭났다.
그러던 와중, 북안의 불모지에서 감염을 당해 그녀의 심장과 그 외 몇몇 장기에 약간의 변이가 생겼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과 달리 그녀의 변이에는 장점이 더 많았다. 전보다 지구력도, 폭발력도 강력해진 정도연은 빠르게 출중한 전사가 되어갔다.
각지를 돌아다니는 동안 초봄 마을에도 몇 차례 방문했던 그녀는 작년, 목표를 거의 달성할 수 있을 뻔했던 그때, 마을이 퍼스트 시티 사병들에게 통제돼 있다시피 한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마을에 각종 감염으로 인한 돌연변이와 유전으로 인한 돌연변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갖가지 나쁜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새로운 거점을 찾았던 정도연은 초봄 마을을 구하려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때부터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해 빠른 속도로 악화되었다.
불법 진료소에서 진찰을 받고 나서야 정도연은 전에 자신이 겪은 감염에 아무런 단점도 없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병은 줄곧 몸속에 숨어 천천히 무르익다가 이제는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절망에 빠진 정도연은 결국 장기를 팔아 도우미를 구할 생각을 떠올렸다.
사실 더 이상 초봄 마을을 전체를 구하겠다는 기대 같은 건 없었다. 그곳의 주민 몇몇만이라도 구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명호는 최근 줄곧 이를 위해 무기, 탄약, 각종 물자뿐만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도우미를 구하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쉽지는 않았다.
“난 이미 그 제안에 응했어. 이 거래가 공평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야.”
잠시 생각하던 한명호는 의도적으로 차가운 빛을 드러냈다.
“나한텐 내 생명이 너희 마을 모든 사람을 다 합친 것보다 중요하거든.”
정도연은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어쨌든 내가 한가한 건 맞잖아. 밥을 할 사람이 필요한 것도 맞고. 나도 뭘 좀 먹기는 해야지.”
한명호도 더 이상 그녀를 저지하지 않았다. 식재료가 든 종이 가방을 가지고 주방으로 향하는 정도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때, 정도연이 한명호를 돌아보며 잠시 좀 머뭇거리다 말했다.
“넌 좀 쉬어. 너무 무리하면 안 돼. 그랬다가는 병증이 더 빠르게 악화될 수도 있어. 네가 임무도 완수하기 전에 쓰러지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
‘그렇게 순순히 쓰러질 것 같아? 상황이 급해지면 너를 냅다 기절시켜 진료소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고.’
이렇게 으름장을 놓으려던 한명호는 결국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식재료부터 정리하던 정도연은 저녁 무렵 요리 세 가지를 완성해냈다.
목살 볶음을 집어 든 한명호는 문득 옆자리를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도연이 어제 먹고 남은 음식을 먹으려 하고 있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정도연은 쌀밥을 씹어 삼키며 빠르게 답했다.
“낭비하면 안 되지.”
반박하려던 한명호는 순간 최근 며칠간 겪은 비슷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는 단 한 번도 정도연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었다.
조그만 여자는 보기와 달리 고집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셌다.
이에 한명호는 그냥 밥을 먹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 * *
용여홍의 말에 장목화는 반색했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별것 아니라는 양 대충 대답했다.
“안 보이는데. 이미 다른 거리로 이동했을지도 모르지. 음, 일단 이 일부터 마무리한 뒤에 다시 찾아보자.”
자신들이 아직도 가상 세계 안에 머물러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한명호만 끌어들이는 짝이 될 터였다.
일단 한명호가 부근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니, 이 상황에서 벗어나 원상태를 회복한 후에 다시 물어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그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던 용여홍도 짧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성건우는 아쉽다는 듯 장목화 쪽의 창문을 보며 용여홍에게 말했다.
“속도 좀 더 높여.”
용여홍은 계획대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한 빌딩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의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려는 것 같았다.
아직 불명의 정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이 지하 주차장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군데군데 설치된 비상등만 켜져 있을 뿐이었다.
주위에 아무 빛도 없는 이 틈을 타 용여홍은 실수한 척 차 라이트도 껐다. 덕분에 차 안엔 어둡고 밀폐된 공간이 형성되었다.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은 다른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다.
어느새 가상 세계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뜻이었다.
구조팀은 가상 세계 주인의 폐소공포증을 이용해, 자신들이 아직 환각 속에 자리해 있는지 확인했다.
행동에 나서기 전까진 구조팀도 상대의 대가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각종 추측을 기반으로 여러 방안을 마련했을 뿐이었다.
물론 만약 상황이 추측과 다르다면 구조팀은 마커스에게 접근하지도, 그의 기억을 살피지도 못한 채 곧장 손을 들고 투항해야만 했을 터였다.
다시 라이트를 켠 용여홍은 이 틈을 타 다른 출구로 차를 몰았다.
뒤이어 가상의 미행을 떨쳐버리고 계획에 따라 차를 바꾼 세 사람은 위장도 완벽하게 제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