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화. 연기
장목화는 멀리 나가지 않고 남자 화장실 밖에서 성건우를 기다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주위를 지나는 귀족들을 관찰했다. 하지만 무전기 너머로 들리던 그 음성과 부합하는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그중 한 귀족이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던 마커스와 눈을 맞췄다.
마커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이었다.
자신 역시 밀폐되고 캄캄한 환경이 무서워 현기증을 느끼기까지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말해봤자 다른 이들의 비웃음만 살 뿐이고, 지금은 이미 멀쩡해졌으니 구태여 말을 덧붙일 이유가 없었다.
마커스와 네 경호원이 화장실을 떠나자 성건우 역시 개인적인 용무를 해결한 뒤 용여홍과 밖으로 나와 장목화와 합류했다.
* * *
귀족석으로 돌아간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은 각자 자리에 앉았다.
성건우는 휴대용 녹음기를 잘 넣고 자세를 바로 고쳐 앉은 뒤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시합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장목화 역시 그쪽에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머리는 한시도 쉬지 못하고 바쁘게 굴러가고 있었다.
‘마커스한텐 아무 문제도 없었고 전부 정상인 것처럼 보였어. 하지만 가상 세계의 주인은 많든 적든 의심을 하고 있을 거야.
공교로운 우연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법이고, 경험이 풍부한 강자는 그런 불안을 절대 가볍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만큼 그렇게 격렬한 수단으로 대응하려 하진 않겠지.
만약 내가 그 사람이라면 격투장 보안요원들에게 경기가 끝난 뒤 당시 마커스와 함께 화장실에 있던 귀족과 그들의 시종, 경호원을 막아서고 조사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하게 할 거야. 그보다 앞서 격투장에서 빠져나가는 사람은 제일 의심을 받겠지?
또 관객들이 격투장에서 퇴장하길 기다리는 동안 퍼스트 시티 관련 부서에 협조를 구해 2가지를 조사해달라고 할 거야. 당시 화장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출신과 내력, 둘째는 정전의 진정한 원인.
전자를 조사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소요돼. 사람이 적지 않으니까. 당장 우리가 가진 표만 해도 정식으로 구한 게 아니잖아. 리만한테 얻은 거지.
하지만 후자는 별로 복잡하지 않아. 퍼스트 시티 전력 부서에서 고장 지점을 확인하고 구체적 원인을 조사하는 데에는 15분도 채 걸리지 않을 거야.
즉, 우리는 반드시 15분 내로 격투장에서 벗어나야 해. 안 그럼 짐작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질 거야.’
이미 마커스의 기억을 살펴본 구조팀은 생각했던 것만큼 쉽게 풀려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퍼스트 시티에서는 구조팀을 직접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할지도 몰랐다.
한편 격투장이 정전된 것을 확인한 백새벽은 분부에 따라 몇 분을 기다린 후에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장목화의 번호를 눌렀다.
따르릉-
격투 시합 관람 중 장목화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현장이 워낙 시끄러워서인지,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상대가 잘 못 알아듣는 건지, 장목화는 자리를 떠나 귀족석 출구로 향했다.
장목화는 그렇게 통로 가장자리에서 통화를 마쳤다. 한 친구에게 급한 일이 생겨 도와줘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그녀는 성건우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성건우가 용여홍을 데리고 장목화에게로 다가갔다.
내용을 간단히 전한 장목화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가자.”
“이제 막 시작했는데⋯⋯.”
성건우는 못내 아쉽다는 듯 얼굴에 미련이 뚝뚝 흘러넘쳤다.
이 상황에서 용여홍이 느끼는 감정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나한텐 아무 대사도 주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내 연기력이 우리 작전에 제일 큰 구멍이었을 수도 있겠지.’
장목화가 두어 차례 더 채근하자, 성건우는 그제야 마지못해 응했다.
이내 용여홍이 곧장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왔다. 세 사람은 곧 통로를 따라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 * *
세 사람의 시야에 막 격투장 밖의 광경이 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옆쪽에서 보안요원처럼 보이는 남자 두 명이 다가와 세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두 분, 조사에 협조 바랍니다.”
그중 흑녹색 눈동자를 가진 장년의 남자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들의 눈에 경호원인 용여홍은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급한 일이 있는데.”
장목화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성건우는 곁에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왜 그러지? 줄 수 있는 시간은 10분뿐이네.”
흑녹색 눈동자의 남자가 정색하고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어느 가문이고, 어디에 사시죠?”
“내 이름은 상르 드라세다.”
성건우가 거만한 얼굴로 답했다.
드라세는 퍼스트 시티를 창건한 몇몇 거두 중 하나로, 오레이처럼 화폐의 단위가 되어 있었다. 후손이 아주 많은 귀족인 그는 자신의 이름을 가문의 성씨로 만들기도 했다.
조사를 받을 거라 예상했던 구조팀은 일찍이 회사에서 제공한 자료와 다른 루트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성건우와 장목화를 위한 귀족 신분을 만들어 두었었다.
분명한 가짜였지만 중요한 건 진짜처럼 그럴듯한데다,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장목화도 이름을 대자 성건우는 확실히 존재하긴 하나 그들의 소유가 아닌, 그러면서도 비교적 구석진 곳에 있어 찾기 어려운 주소까지 댔다.
답을 다 마치자 또 다른 보안요원이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이만 가보셔도 됩니다. 나중에 다른 조사가 필요하다 싶으면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그 보안요원은 린넨색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을 가졌다는 것 외에는 별 특징이 없어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음?”
성건우는 적절하게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그 보안요원이 다시 웃으며 답했다.
“두 분 같은 귀족이라면 믿을 만하니까요.”
장목화는 당연하게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상대는 방금 각성자 능력을 가지고 거짓말 탐지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구조팀은 이런 사람에 대처하기 위한 부분까지 고심했었다.
현재 장목화와 성건우는 추리 광대를 기반으로 본인 스스로를 틀림없는 귀족이라 믿고 있었다.
이 믿음과 진짜 신분과 정체성, 마커스를 살펴봤는지 등등의 부분은 조금도 모순점이 없었다.
거기다 장목화는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까지 짐작하고 있었다.
‘내력이 뚜렷한데다 귀족인 사람이라면 도망칠 순 있어도 숨을 수는 없을 거라고, 나중에 천천히 찾아가면 된다고, 이 자리에서 굳이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구조팀이 예상한 여러 상황 중, 가장 마주치지 않았으면 한 것은 말인 영역, 혹은 보리 영역의 각성자였다. 그런 상황에서의 해결법은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리자마자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반 지성교 사람이다!’
‘반 지성교가 못된 수작을 부리려 한다!’
“훌륭하군.”
성건우는 그 보안요원에게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더는 꾸물거리지 않고 장목화, 용여홍과 함께 출구로 나갔다.
바깥의 밝은 빛을 마주한 용여홍은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다가 돌연 이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어깨가 넓고 흉통이 두꺼워 꼭 벽처럼 느껴지는 남자.
장목화는 상당히 인상적인 이 사람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레드울프 구역의 치안관이자 어느 귀족의 후예인 월이었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일찍이 반고 바이오 정보원 가리발디를 구조하던 와중에 이 치안관을 만난 적이 있었다.
즉, 세 사람은 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는 셈이었다.
“왜 이쪽에 정전이 된 거지? 무슨 일이 있었나? 이쪽에서 자동차를 충전할 생각이었는데⋯⋯.”
한창 투덜거리던 월의 시선이 문득 성건우, 장목화, 용여홍에게로 향했다.
월과 마주친 건 구조팀에겐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완벽한 레드리버인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전에 마주친 적이 있는 월이 선량한 유적 사냥꾼이었던 두 사람을 몰라볼 거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물론 위장한 채 포카스 장군을 맞닥뜨린 적도 있지만, 그때 별문제가 없었던 건 상대를 직접 마주하거나 접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껏해야 눈을 마주쳤을 뿐이었고, 거리도 꽤 떨어져 있었다.
또 당시에는 주위에 포카스 장군을 잘 아는 다른 귀족들도 많았다.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이 그의 시선을 받지 않았던 건, 위치도 가장자리인 데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인물로 변장한 결과였다.
하지만 지금 귀족 구역 출입구에는 두 보안요원과 구조팀 일행 셋밖에 없었다. 월이 극도로 허술하고 부주의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들을 보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전의 만남으로 장목화는 월이 그렇게 허술하고 부주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꽤 세심하고 진지한 성격이며 경험이 많은, 훌륭한 치안관이라는 것을 파악한 바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치안관은 사람을 잘 알아보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장목화도 월이 자신들에게 집중하지 않으리라고,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리라고 감히 단정하진 못했다.
만약 그에게 발각된다면 구조팀의 이번 작전은 실패로 끝나는 것이다.
실패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퇴로가 마땅하지 않은 이 순간에 실패한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장목화는 자신들이 아직 가상 세계 안에 속해 있을 것 같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만약 성건우가 능력을 사용하려 한다면 분명 이쪽에 주의하고 있을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는 바로 그 사실을 알아차릴 터였다.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그녀는 월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 와중 자연스럽게 왼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 * *
한편 격투장에서 멀리 떨어진 한 건물 옥상에서 백새벽은 핸드폰을 끄고 다시금 오렌지 소총 스코프에 눈을 갖다 댔다.
한창 귀족석 보안 검색 구역을 관찰하는데, 돌연 위치를 바꾼 그녀가 근처 거리의 한 금속 입간판으로 총구를 돌렸다.
탕! 쾅!
요란한 소음이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백새벽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연달아 세 번이나 방아쇠를 더 당겼다.
이 소리에 놀란 행인들은 허둥지둥 곳곳에 몸을 숨겼고, 달리던 차 역시 속도를 높이거나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 * *
다시 귀족석 보안 검색 구역.
월이 출구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막 눈길을 돌렸을 그 찰나, 갑자기 또렷한 총성 한 발이 들려왔다.
쾅!
총성에 뒤따라 울려 퍼진 소리는 멀지 않은 거리에서 들려온 듯했다.
현지 치안관이자 배경도 든든하고, 능력도 있고, 계속해서 진급하기를 원하는 월은 순간 표정이 급변했다.
소리에 귀를 기울리던 그는 그 후에 이어진 총성도 놓치지 않았다.
동시에 월이 레드리버 권총을 뽑아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보네⋯⋯.”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월은 보안요원이나 구조팀에게 말을 걸어 정전의 원인을 조사하려 했던 생각은 접고, 곧바로 돌아서서 자신의 전기 자동차를 향해 달렸다.
그의 부하가 그곳에서 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요새 유난히 더 소란스럽네.”
성건우는 총성이 들려온 구역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연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만큼, 몹시도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 용여홍은 총격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한 까닭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총성이 울려 퍼진 위치를 가늠해보면 백새벽의 총격임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도저히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는 계획에 전혀 없던 일이었다.
다만, 용여홍은 동료인 백새벽을 잘 알기에 특정 구역을 멋대로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철수를 돕기 위해 발포했을 거란 걸 짐작할 순 있었다.
그리고 장목화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장목화도 사실 이런 뜻밖의 상황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비밀 신호를 설정해두지도 않았었다. 지금 그녀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건 백새벽의 기억력, 그것에 모든 걸 거는 수밖에 없었다.
백새벽은 장목화, 성건우가 월을 만났을 때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감시 중이었다. 백새벽이라면 분명 그 치안관을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생긴 것도 벽같이 생긴 사람이라 여간해선 기억을 못 하는 게 더 어려운 남자였다.
무엇보다 장목화는 동료 백새벽의 기억력과 판단력을 믿었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넘기는 척, 백새벽에게 행동에 나서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이것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 그 비밀 신호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판단하는 건 오직 백새벽의 몫이었다.
그리고 백새벽은 장목화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무턱대고 월에게 총을 쏘는 대신, 굉음을 낼 물건을 쏴 요란한 기척만 일으켰다.
‘역시, 훌륭한 동료는 팀의 목숨까지 지켜주는 법이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던 장목화는 짐짓 무서운 척 성건우에게 말했다.
“얼른 가자, 여기는 정말 안전하지가 않아.”
성건우는 바로 두 보안요원을 돌아보았다.
“가도 되나?”
흑녹색 눈동자를 가진 보안요원은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별 특징 없는 보안요원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