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깨달음
마커스가 떠나도 가상 세계엔 아무 변화도 없었다. 이를 확인한 용여홍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건우는 곧장 휴대용 녹음기를 끄려 했다. 영향을 강화해 가상 세계의 주인마저 요의를 느끼도록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너무 공교롭고 목적이 지나치게 뚜렷해 보인다면 의심을 불러일으킬 게 뻔했다.
다행히 구조팀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합리적으로 보일지도 미리 다 의논해둔 상태였다.
곁에선 장목화가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은백색 핸드폰을 들어 번호를 눌렀다. 화면에 표시된 수신자의 이름은 맥스였다.
“맥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가서 그 일을 좀 얘기하고 싶은데⋯⋯.”
이 대목에서 그녀는 통화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녹음기를 꺼달라는 듯 성건우의 팔을 살짝 쳤다.
성건우는 자연스레 분부에 따랐다.
노래가 멈추자 장목화가 말을 이었다.
“그럼 8시에 만나자. 우리한테 적어도 50분은 줘야 해.”
- 알겠다.
전화 건너편에서는 묵직한 남성의 중음이 들려왔다.
* * *
전화를 끊은 게네바는 위치 추적을 막기 위해 휴대폰을 꺼버렸다. 그리고 초읽기에 들어갔다.
조금 전 대화에서 첫 번째 숫자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감청자를 미혹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뒤의 숫자가 핵심이라는 걸 알리는 역할이었다.
50분, 이는 50초 후에 전기를 끊으라는 뜻이었다.
* * *
핸드폰을 넣고 화장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돌아본 장목화는 곧 안으로 들어가려는 마커스와 그의 경호원들을 보았다.
그녀는 다시 음악을 틀려는 성건우의 오른손을 치며 의도적으로 애교 섞인 목소리를 높였다.
“곧 격투가 시작되잖아. 얼른 화장실에 다녀오자.”
“좋아.”
일부러 휴대용 녹음기를 자리에 내버려 둔 성건우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장목화와 함께 화장실로 이어지는 통로로 향했다.
경호원인 용여홍 역시 그들의 뒤를 바짝 따랐다.
마커스와 경호원들은 이미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있었다.
원래대로면 장목화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여자 화장실로 가야 했지만,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싼 성건우가 남자 화장실 쪽을 가리키며 음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짓궂기는.”
장목화는 고개를 숙인 채 투정을 부렸다.
‘웩!’
용여홍은 이런 대사가 나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충분히 알고 있었는데도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이내 성건우와 장목화는 반쯤 뒤엉킨 듯한 자세로 문이 잠기지 않은 남자 화장실 문을 열었다.
만다라에 대한 신앙이 주류를 이룬 퍼스트 시티 귀족 사회에서는 꽤 흔한 일이었다. 그들은 남자 화장실은 물론 정원, 차고, 지붕 위에서도 사랑을 나누곤 했다.
귀족석 남자 화장실에는 다른 곳과 달리 소변기가 없었다. 습격을 걱정하는 여러 귀족이 경호원들과 함께 화장실에 들어가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모두가 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변보기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을 위한 남자 화장실은 여자 화장실과 비슷하게 칸으로 격리돼 있었다. 그 각각의 칸도 벽을 공유하지 않고 조금 간격을 둔 채 떨어져 있었다.
마커스는 이미 그중 하나의 칸에 들어가 있었고, 네 경호원은 그 밖을 지키는 중이었다.
반쯤 뒤엉킨 자세의 성건우, 장목화는 가장 구석에 있는 칸으로 향했다. 자세가 자세이니만큼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느렸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화장실에 들어온 경호원 용여홍은 습관적으로 화장실 문을 닫았다. 지금이 문을 닫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이었다.
아직 불이 켜진 화장실은 긴장된 분위기는 아니었다. 가상 세계의 주인도 정상적인 운행만 유지하고 있다면, 별도의 관여는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마커스를 보호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더라면 이 순간에도 고도로 경계하고 있었겠지만, 벌써 이 일을 한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세세한 부분은 꽤 무뎌질 시간이었다. 이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경계까지는 하지 않았다.
철컥-
화장실 문이 닫혔지만 용여홍은 마음을 완전히 놓지는 않았다. 이것이 환각인지, 가상 세계 안의 허상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현실 세계의 화장실 문은 여전히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정말 그렇다면 구조팀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터였다.
문이 닫힌 지 10초도 지나지 않은 그때였다. 장목화와 성건우가 목표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순간, 화장실 불이 갑자기 꺼져버렸다.
아무 징조도 없이, 몇 번 깜빡거리지도 않고서 바로 꺼진 것이었다.
화장실 안은 일순간 칠흑 같은 암흑에 잠식됐다. 통풍구를 통해 들어오는 가벼운 기류만 느껴질 뿐이었다.
거의 동시에 장목화는 주위 환경이 가볍고 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동안 잠수한 끝에 수면 밖으로 떠오른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가상 세계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귀족석에 딸린 남자 화장실은 그 범위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이런 환경과 반응을 통해 장목화는 가상 세계의 주인이 치른 대가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폐소공포증!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가상 세계 안에서 계속 어둡지 않고 밀폐되지 않은 화장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들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아는 그로서는 이런 현실로부터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저도 모르게 이 구역에 대한 집중력을 거둔 것이었다.
그렇게 화장실 안의 가상 세계가 사라졌다.
이 기회를 틈타 성건우는 주머니에 든 숙명주를 움켜쥐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고 절차가 복잡한 추리 광대 능력 대신 숙명통을 택한 것이다.
육신을 떠난 성건우의 의식은 곧장 목표의 심령 세계에 침입했으나 상대는 이 사실을 감지하지 못했다.
반경 30미터인 숙명통의 효력 범위는 남자 화장실을 다 뒤덮고 있었다. 또 숙명주의 청록색 빛은 성건우의 주머니 안에서만 번득이고 있어 외부의 어둠을 깨지도 않았다.
성건우의 의식이 홀연 옅은 안개에 뒤덮인, 미약한 빛으로 이루어진 기원의 바다로 향했다. 그곳엔 수없이 많은 파도가 출렁이며 각양각색의 화면을 드러내고 있었다.
성건우는 지나치게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았다. 오레이가 죽었을 때 마커스는 고작 6살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한들 오레이가 그 이야기를 어린 마커스에게 직접 전했을 리는 없었다.
그 오랜 기억을 살필 시간 역시 없었다. 성건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방면의 기억뿐이었다.
하나는 오레이가 죽은 뒤 마커스나 혹은 그의 어머니, 그러니까 본인의 딸에게 어떤 물건을 남겼는지에 관한 기억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커스의 어머니가 죽기 전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에 관한 기억이었다.
충분히 명확한 방향과 분업에 능숙한 아홉 성건우 덕분에, 성건우는 머지않아 목표한 정보를 찾아냈다.
첫째, 오레이는 마커스와 그의 어머니에게 비밀이 숨겨진 물건이나 자료를 남기지는 않았고, 그 대신 부동산과 밭 등만 상속해주었다.
둘째, 마커스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불평하지도,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품지도 말고 계속 이렇게 평범한 귀족으로 살아가. 그리고 머신 헤븐을 경계하며 소스 브레인을 믿지 말아라.
제, 제8 연구원을 조심해. 최, 최대한 네 사촌누이와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을 거다. 그, 그 애는 아주, 아주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있어.
마, 만약 피할 수 없는 위험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적에게 말해. 넌 불모지 13호 유적의 실험실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암호를 알고 있다고. 그래, 그 암호는 바로 메시아라고⋯⋯.’
마커스의 기억을 계속 뒤질 여유는 없어서, 성건우는 적당히 작업을 마무리한 뒤 숙명주의 힘을 최대치로 발휘했다.
이에 마커스는 현기증과 함께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갖가지 과거가 계속해서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러한 느낌이 성건우가 심령 세계를 침입하여 만들어낸 혼란도 자연스레 덮어버렸다.
뒤이어 성건우는 숙명주의 남은 힘을 자신의 기원의 바다에 옮겼다.
나중에 검사가 이루어지더라도 숙명주는 이제 아무런 문제도 보이지 않을 터였다. 절약은 좋은 습관이었다.
청록색 빛이 빠르게 사그라드는 동안, 장목화는 성건우가 살짝 건드리는 것을 느끼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손전등 모드로 핸드폰 플래시를 밝힌 그녀는 스위치 쪽을 비춰보면서 짐짓 놀라고 겁을 먹은 양 연기를 시작했다.
“왜 갑자기 정전이 됐지?”
“모르겠습니다.”
경호원 용여홍이 매우 협조적으로 답했다.
또한 용여홍은 스위치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기에 누구도 그가 한 짓이리라 의심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겁에 질린 장목화가 외쳤다.
“어, 얼른 문 열어!”
마커스의 네 경호원은 구조팀의 목소리를 들으며 계속 그들을 주시했다.
마커스도 현기증에서 겨우 벗어난 뒤 칸막이를 짚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탁- 탁-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안고 화장실 문을 연 용여홍은 스위치를 몇 번이나 켰다 꺼보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여전히 빛은 소식이 없었다.
용여홍은 여자 화장실로 이어진 복도를 한번 살펴보았다.
“온 도시가 정전된 모양입니다.”
복도의 등 역시도 꺼져있었다.
장목화가 핸드폰 플래시를 켜기 1초 전, 성건우는 숙명통의 힘을 잃은 구슬을 화장실 안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한편, 용여홍은 온 도시가 정전됐다고 말하자마자 남자 화장실 쪽으로 다가오는 귀족들 몇 명을 보았다.
동시에 마커스 경호원 중 하나가 든 무전기에선 약간 나이가 든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장실 문을 열어라.”
“이미 열렸습니다. 다른 귀족의 시종이 열었습니다.”
마커스의 경호원이 짧게 답했다.
지금 화장실엔 마커스 일행과 구조팀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귀족과 그들의 시종, 경호원도 있었다.
이는 장목화가 바란 환경이기도 했다. 사람이 적다면 방해 요소는 적어질지라도, 그만큼 용의자의 범위도 좁아지기 마련이었다.
잠시 후, 용여홍은 주위 세상이 전과 달라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것이 단순한 심리적 작용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커스의 경호원과 무전기 건너편 상대의 대화를 듣고 가상 세계가 다시 이 구역을 뒤덮으리라 추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생각이 그런 느낌도 불러일으킨 것인지도 몰랐다.
한편, 방금 발생한 사건은 설령 용여홍이 문을 열지 않았더라도 어둠에 잠식된 환경이 얼마 가지 않았을 거란 사실을 확신시켜주었다.
가상 세계의 주인은 무전기로 마커스 경호원에게 분부를 내릴 수 있을 뿐 아니라, 핑계를 대어 다른 귀족과 그들의 시종까지 조종할 수 있었다.
고로, 화장실 안에 있는 사람이든, 밖에 있는 사람이든 둘 중 한쪽은 어쨌든 문을 여는 데 성공했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작전의 관건은 시간 차였어. 반드시 숙명주를 이용했어야 하는 거지.’
용여홍은 정전 상황에 관한 판단을 확신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정말, 격투장은 회로 검사 같은 건 안 하는 모양이지?”
장목화가 투덜거렸다.
그녀 역시 성건우가 산 ‘배우의 자아 수양’이란 책의 애독자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고요.”
장목화에게 답한 건 화장실 안에 있는 다른 귀족이었다.
음흉한 작업을 거는 건 아니었다. 아직도 불이 들어오지 않아, 장목화의 얼굴은커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귀족은 정말로 순수하게 본인 감정을 토로한 것이었다.
장목화는 핸드폰 플래시로 성건우를 비추며 연약한 척 말했다.
“나가자, 캄캄해서 무서워.”
장목화의 애교 섞인 말투에 용여홍은 순간 그녀가 번개 창으로 검은 늪 철갑뱀을 명중시키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 거대한 변이 생물은 고작 이 어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무시무시했었다.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는 게 더 자극적이잖아.”
“치, 그럼 너 혼자 해.”
장목화는 자연스럽게 성건우의 손을 풀고 화장실 밖으로 향했다.
어깨를 으쓱한 성건우는 가상 세계의 재림에는 전혀 신경도 안 쓴다는 듯, 칸으로 들어가 바지 지퍼를 내리고 정말로 용무를 해결했다.
본디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없는 사람일수록 움츠러드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