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화. 철수 방안
에이펙스 격투장, 귀족석 보안 검사 구역.
오늘도 하인 겸 경호원이 된 용여홍은 위장한 성건우, 장목화를 따랐다.
아직 입구까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고, 사방에 아무도 없는 걸 분명히 확인하자 용여홍이 이 틈을 타 조용히 말을 건넸다.
“팀장님,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하나 있어요.”
“뭐?”
걸음을 멈춘 장목화가 하인을 꾸짖는 척 돌아보았다.
용여홍은 요리조리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작전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 빠졌어요. 실패했을 때의 철수 방안이요. 반드시 성공할 거라는 확신은 없지 않습니까?”
본디 계획은 승리보다 실패할 것부터 고려해야 하는 법이었다. 상황이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철수 방안에 따라 물러나야 했다. 허둥대서도, 당황해서도, 속수무책으로 붙잡혀서도 안 되었다.
장목화가 웃었다.
“우린 지금 심령의 복도 급에 이르러 있는 데다 환술에 능한 각성자를 마주하러 가. 게다가 주위에 수많은 귀족과 그들의 경호원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실패하고도 무사히 도망쳐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겐이 격투장에 들어올 수 있었어도 별다른 수가 없었을 거야.”
“아⋯⋯.”
순간 용여홍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거기다 성건우가 덧붙였다.
“전에 고등 무심자나 디마르코에 대적했을 때와 달리, 이번에는 우리가 밖으로 드러나 있고 가장 위험한 적은 어둠에 숨어 있어. 도우미도 없고.”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용여홍이 장목화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팀장님, 팀장님이라면 이미 방법을 생각해두셨겠죠?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모험을 강행하려 할 리 없잖아요.”
‘굳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때도 아니잖아요!’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방법은 간단해. 실패가 확정되면 곧장 양손을 머리에 얹고 꿇어앉기.”
“예?”
용여홍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한 것 같았다.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외쳐도 돼. 항복! 항복!”
그제야 용여홍도 장목화가 방금 묘사한 장면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가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팀장님, 농담하시는 거죠?”
장목화는 정색한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각종 장단을 비교해서 결정한 가장 좋은 방안이야. 힘이 적과 크게 차이 나는 상황에선 머리나 기술, 경험에 의지해 도망치는 건 너무 위험해. 성공 가능성도 매우 낮고.
사실 환술에 능한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만 아니었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았을 거야. 예컨대 귀족석 아래쪽 구조물을 미리 파괴하거나 인질을 잡아 위협을 하는 등의 방법을 쓸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럴 수가 없어. 왜냐하면 우리로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우리가 정말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성공했는지를 판별할 수가 없으니까. 저항하다가 죽거나 다치는 것보다는 항복이 제일이야. 그래도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에는 가장 낫지.”
“하, 하지만 그건 삶을 포기하겠다는 거잖아요?”
용여홍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내 성건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감옥에 들어가는 거야말로 이야기의 시작이야. 만약 우리가 포카스 장군이 시켜서 그런 짓을 했다고 진술한다면 다른 세력에서도 감히 어쩌지는 못할걸.”
“포카스 장군은 무슨 죄냐.”
장목화가 웃으며 핀잔을 줬다. 그러다 이쪽을 지나쳐 보안 검색을 거친 뒤 격투장으로 진입하는 귀족들을 보고, 그녀도 빠르게 설명을 이었다.
“우리는 퍼스트 시티에 도착한 이래, 어떤 귀족에게도 미움을 산 적이 없어. 남몰래 반 지성교를 지지하는 이들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우리를 죽이려 하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붙잡히자마자 최대한 빨리 우리가 진짜 신부를 처치했고, 반 지성교와 깊은 원한 관계라는 사실을 밝히면 돼. 그러면 유난히 나서서 우리를 죽이려 하는 이는 반 지성교 지지자로 의심받게 될 거야.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반고 바이오 사람이라는 거야. 퍼스트 시티에 붙잡힌 상황에서는 그 어떤 것도 숨길 필요가 없어.
그들한테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을 낱낱이 밝히면, 그래서 우리의 정보적 가치가 사라지면 회사에선 딴 사람을 보내 그들과 협상을 시킬 거야. 그럼 퍼스트 시티에선 특정 물건을 대가로 기꺼이 우리를 놓아줄걸?
대형 세력 사이에는 이런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 별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간첩을 체포한다면 그걸 빌미로 거래를 하려고 하지. 예를 들자면 상대측에 잡혀있는 자기 쪽 사람을 돌려보내 달라거나 하는 식으로.”
용여홍은 입이 쩍 벌어졌다. 대형 세력 간에 이런 암묵적인 규칙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는 꽤 정상적인 일이었다. 대형 세력이라면 당연하게도 상대적으로 평등한 담판을 진행할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래도 그건 회사를 배신하는 짓 아닌가요?”
용여홍의 말에, 장목화가 웃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형 세력에서까지 회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까? 지난 시간 동안 외근 직원 중 붙잡힌 이들이 한둘에 불과할까?
회사 입구가 어딨는지, 황야유랑자와 소형 세력은 전혀 모른다지만, 과연 퍼스트 시티와 화이트 기사단 같은 곳에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을까? 내부 사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가 아는 비밀도 없잖아, 안 그래?
또한 구세계 파괴 원인 조사에 있어서도 우린 오레이 후손과 접촉하려는 단계에 이르렀을 뿐이야. 퍼스트 시티가 아는 만큼도 모르고 있다고.”
용여홍은 그제야 팀장의 말뜻을 대강 이해했다. 자신들이 털어놓을 수 있는 비밀들이라고 해봤자 회사에 아무 해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기껏해야 우리는 가지고 있는 물건, 숙명주, 맹목의 고리, 오하명의 녹음 파일, 수종이의 쉬 소리를 빼앗기는 게 다라는 거야. 이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잖아.”
장목화가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용여홍은 퍼스트 시티에 붙잡히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하, 하지만⋯⋯. 퍼스트 시티 귀족 중에는 암암리에 만다라를 믿는 사람들이, 욕망 성인 교파 구성원이 적지 않잖아요. 저, 전 그들이 나쁜 짓을 할까 봐 무서운데요.”
성건우가 웃으며 되물었다.
“너한테는 오히려 감사한 일 아냐? 아, 아닐 수도 있겠네. 상대가 꼭 여자란 법은 없으니까.”
그의 묘한 말에 용여홍은 몸서리를 쳤다.
장목화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대비해야 할 상황 중에 하나지. 만약 붙잡히게 되면 우리는 곧장 포카스 장군과 합작해 반 지성교에 대적하는 일을 도왔다는 사실을 밝혀야 해. 일단 상대를 방패막이로 삼아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작은 흰둥이에게 준 편지에 해야 할 일 두 가지를 적어뒀어. 하나는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면 곧장 안전 가옥으로 돌아가 회사에 협상 전문가를 파견해 달라는 전보를 보내는 거, 다른 하나는 남겨둔 연락 방식을 통해 퍼스트 시티의 한 원로를 찾아 도움을 청하는 거야.
그는 회사의 한 구성원과 관계가 꽤 깊대. 우리 같은 인질을 멋대로 놓아줄 수는 없겠지만, 갇혀 있는 동안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줄 순 있을 거야. 어쨌든 우리를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핑계와 구실은 많으니까.”
용여홍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음이 약간 놓였다.
“하……. 팀장님, 왜 진작 말씀 안 하셨어요? 왜 굳이 편지에 쓴 거죠?”
‘구세계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닌가요?’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작은 흰둥이가 그런 말을 듣고도 얌전히 밖에 있으려고 하겠어?”
“그건 그렇네요.”
이후 입을 다문 용여홍은 장목화와 성건우를 따라 보안 검색 구역을 순조롭게 통과했다.
* * *
귀족석 안에는 이미 적잖은 사람이 와 있었다. 다만 그중 오레이의 외손자 마커스는 없었다.
장목화와 성건우는 자리를 찾아 앉은 뒤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또 성건우는 자연스럽게 휴대용 녹음설비를 꺼내 무료한 척 노래도 틀었다.
그가 튼 건 지극히 정상적인 레드리버어 노래였다. 음량도 주위 사람이 들을 수는 있지만 시끄럽게 여기지는 않을 정도로 적당했다.
이는 가상 세계의 주인이 노랫소리에 적응해 그것에 무뎌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준비였다.
흐르는 음악 속에, 성건우와 장목화는 몇 마디 한담을 나누며 부근의 귀족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이제 격투 시합까지 5분이 남아있었다.
이때, 옅은 파란색 눈동자와 약간 넙데데한 얼굴을 가진 마커스가 경호원 네 명을 대동한 채 귀족석 자신의 칸으로 향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만면에 웃음을 띤 마커스는 마주친 귀족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예를 갖췄다. 그중에는 성건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리로 향하는 그를 눈으로 좇던 장목화는 거리를 어림하며 성건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 정도 거리면 지금의 음량으로도 별문제 없겠다는 뜻이었다.
성건우는 수십 초 정도 있다가 이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음 노래로 넘겼다.
용여홍은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았다.
수종이의 속삭임이 합성된 노래가 재생된 순간부터는 정말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었다.
곧 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강아지는 멍멍. 고양이는 야옹⋯⋯.
동요 같은 가사가 약간 우스꽝스럽게 울려 퍼지고 있지만, 그 배경음에 섞인 아이의 쉬, 소리를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쉬⋯⋯ 쉬⋯⋯ 쉬⋯⋯.
일부 귀족들은 웃긴 가사에 성건우 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이 노래의 제목을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동시에 그들 중 비교적 일찍 도착해 적잖게 물을 마신 이들은 격투가 시작되기 전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분분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 강아지는 멍멍, 고양이는 야옹⋯⋯.
기묘한 음악이 이어지는 동안, 귀족들은 하나둘 화장실로 향했다.
* * *
에이펙스 격투장에서 멀리 떨어진 한 고층 빌딩 옥상에 백새벽이 있었다. 그녀는 은밀한 곳에 오렌지 소총을 설치해둔 뒤 곧장 장목화가 준 편지를 꺼냈다. 장목화가 시킨 대로 상황이 안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진 않았다.
빠르게 내용을 살피는데, 백새벽의 표정이 점점 복잡해졌다. 충격과 혼란, 그리고 약간의 웃음기를 보이기도 했다.
* * *
다시 이 동요 같은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격투장엔 귀족들이 하나둘씩 통로 내 화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대부분은 격투가 제대로 시작되기 전에 속을 깨끗이 비우고 최적의 상태로 관람을 즐기려 했다.
마커스는 이를 보고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순간, 그의 표정이 돌연 이상해졌다.
그 역시 아랫배가 부풀어 오르고, 참을 수 없는 충동이 느껴졌다.
마커스의 눈동자가 미친 듯 흔들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점심 먹은 후론 물도 안 마셨고 외출하기 전에 일부러 화장실도 갔다 왔는데, 갑자기 또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지만 이 선명한 감각은 절대로 환각이 아니었다.
번지는 의혹을 잠재울 설명이야 많았다. 세상엔 사랑과 설사처럼 예상할 수도, 참을 수도 없는 일이 있는 법. 이는 레드리버 속담이었다.
마커스는 처음엔 참아보려 했다. 하지만 요의는 갈수록 심해졌고, 혹여나 바지에 실례라도 할까 걱정될 정도였다.
‘아무래도 다녀오는 게 낫겠어. 화장실 문을 잠그지만 않으면 되잖아. 잠가도 문제 될 일은 없을 거야. 화장실 안에도 등이 있으니까. 거기다 귀족석에 군 출신의 각성자도 두세 명이나 있어. 뜻밖의 사고가 생긴다고 놀라 달아날 쓰레기들이 아니란 말이지. 나 대신 총을 맞아줄 전문 경호원도 있고.’
사람은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빠른 속도로 스스로를 설득한 마커스는 네 경호원을 데리고 화장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