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실험
가면을 벗은 성건우는 게네바와 우회로를 통해 한 안전 가옥에 도착했다.
몇 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도 돌아왔다. 이 세 명은 그 골목길 주위에 흩어져 사방을 경계하며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척이 보이면 신호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이어 성건우가 전해준 이야기를 듣고, 장목화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행위 교단이라⋯⋯. 하, 악당들이 날뛰네!”
퍼스트 시티의 현재 상황을 축약한 표현이었다. 이곳에서는 각 세력과 각 교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장목화는 팀원들과 이 일을 한 차례 얘기한 뒤, 주위를 한번 돌아봤다.
“다들 쉬어. 겐은 우리 상태를 계속해서 살펴주고. 내일 저녁에는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을 녹음하자.”
* * *
밤, 아무도 없는 방 안.
라디오에선 매력적인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 놓인 녹음설비는 얌전히 돌아가며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지직- 지직-
이따금 전류 소리도 함께 흘러나왔다.
도와 전자 제품 수리 프로그램이 끝나고 2분이 더 지난 후에, 검은색 군복 차림에 붉은 눈빛을 번득이는 게네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게네바는 녹음된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들어본 뒤, 맞은편에 자리한 다른 방으로 향했다.
“어때, 오늘은 오하명이 뭐래?”
장목화가 물었다.
게네바는 오른손을 들어 턱을 받쳤다. 저도 모르는 새 성건우의 영향을 받은 듯했다.
“전자 제품 수리 정신이 뭔지 설교하던데. 어리석은 자가 도를 들으면 크게 웃으니, 그가 비웃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 없다고도 했고. (*주: ‘도덕경’ 인용)
근데 이 녹음본이 인간한테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게네바가 간단히 설명한 내용을 듣고, 장목화가 웃었다.
“그건 우리가 실험해봐야 알 수 있겠지.”
그리고 장목화는 팀원들을 데리고 녹음설비가 놓인 곳으로 갔다.
방문을 닫은 그녀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누가 먼저 해볼래?”
장목화가 먼저 나설 순 없었다. 실험 도중에 통제 불가능한 일이 발생한다면 멀쩡한 그녀가 고압 전류를 폭발시켜 저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성건우를 한 번, 백새벽을 한 번 바라본 용여홍이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제가 할게요.”
강력한 각성자 성건우가 영향을 받으면 어마어마한 피해가 일어날 터였다. 그렇다고 이 위험한 일에 여성인 백새벽의 등을 떠밀 수도 없지 않은가.
“좋아, 조심하고.”
장목화도 마치 답이 정해져 있었다는 듯 바로 수긍했다.
곧이어 장목화, 성건우, 백새벽은 빠르게 각자 방식대로 귀를 막고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헤드폰이나 종이 뭉치로 귀를 막은 두 팀원과 달리 장목화의 방식은 가장 간단했다. 손을 들어 와우를 틀어막는 것이었다.
준비를 마친 동료들을 본 게네바가 녹음한 음성을 재생시켰다.
용여홍은 옷깃을 바로하고 단정하게 앉은 뒤,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 ⋯⋯전자 제품은 간단하면서도 정밀합니다. 여기서 간단하다는 건 그것들이 의지하는 도, 근본적인 원리 몇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정밀하다는 건 그 원리에서 발전하고 변형된 갖가지 규칙과 수많은 조합을 가리킵니다. 매우 복잡하고 어디 비할 것 없이 교묘하죠.
⋯⋯우리는 전자 제품을 수리할 때 도를 파악하거나 도를 이용해 그 규칙과 조합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어요.
⋯⋯저희 방송을 듣는 수리자에게 전자 제품 수리는 예술이자 도에 대한 실천입니다. 일반인들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들은 이게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하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거나,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죠. 그보다는 경험의 산물을 더 신봉합니다.
전자 제품과 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당신의 TV에 적잖은 문제가 있다고, 최대한 빨리 고쳐야 한다고 말하면 그들은 한 번 때리면 된다고 답하곤 합니다. 한 번으로 모자라면 두 번 때리면 된다고도 하죠.
본디 뛰어난 자,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보통 사람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어리석은 자는 도를 들으면 크게 웃습니다. 그 어리석은 자가 비웃지 않으면 그건 도라고 할 수 없죠. (*주: ‘도덕경’ 인용)
그러니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 모르는 걸 마주했을 때는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청해야 합니다. 경험으로 형성된 견해를 내려놓아야 하고, 처음부터 거부감을 품는 대신 포용적인 자세로 학습하고, 이해하고, 파악하고, 받아들이려 해야 합니다.
용여홍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쨌건 오하명은 이런 설교를 하는 데 상당히 뛰어난 편인 것 같았다.
방송이 끝났을 때,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용여홍과 게네바가 방송이 끝났음을 알리자 장목화, 성건우, 백새벽은 속속들이 귀를 막고 있던 것들을 풀었다.
“별 영향은 없는 것 같아요.”
용여홍은 먼저 감상을 밝힌 뒤 오하명이 했던 말들을 전했다.
탁!
그런데 갑자기 성건우가 웃음을 터뜨리더니, 테이블 위 스탠드를 소리 나게 껐다. 그런 뒤 용여홍에게 말했다.
“봐봐.”
능력의 시작을 알리는 성건우의 말에, 용여홍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성건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스탠드 불은 꺼졌어. 전에 양범구의 구식 컴퓨터가 고장 나서 키보드 라이트가 꺼진 것처럼. 이 스탠드는 전자 제품이고 그 구식 컴퓨터도 전자 제품이야. 후에 그 구식 컴퓨터는 두 번 때렸더니 멀쩡해졌어. 그러니까⋯⋯.”
점차 미간을 푼 용여홍은 벌떡 일어나 스탠드 앞으로 다가갔다.
탁탁탁!
용여홍은 처음 오른손으로 스탠드를 친 후, 연달아 세 번을 쳤다. 그리고 나서야 다시 인상을 구겼다. 스탠드의 스위치는 원래 꺼져있었다. 아무리 때려봤자 불이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짜증이 난 용여홍은 성건우를 홱 째려보았다.
“추리 광대 능력을 썼으니까 당연히 효과가 있던 거지!”
성건우는 턱을 매만지며 웃었다.
“난 추리 광대 능력을 발휘하는 형식으로 말한 거지, 실제로는 아무 능력도 쓴 게 없는데.”
순간 용여홍의 표정이 굳었다.
“⋯⋯정말?”
성건우도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내가 너 하나 속이는데 이렇게까지 힘들이는 거 봤어?”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영향을 받은 모양이네. 중점은 분명 ‘잘 모르는 걸 마주했을 때,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청해야 한다.’란 말일 거야. 이 말 때문에 여홍이가 과거의 모든 경험을 다 배제하고 다른 사람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 거지.”
“그럴 수도 있다니⋯⋯”
이제 정신이 든 용여홍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때, 성건우가 그를 바라보았다.
“너 나한테 시원한 콜라를 대접해주겠다고 했어. 레드울프 구역으로 가면 몇 군데 파는 데가 있을 거야.”
멍한 표정을 드러낸 용여홍이 다시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언제 그런 약속했는데?”
“아, 이미 영향에서 벗어났나 보네.”
긴 한숨을 뱉는 성건우를 보고, 용여홍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곧이어 백새벽이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제가 한번 해볼게요. 다른 말 중에도 효과를 일으키는 게 있는지 확인해야 하잖아요.”
오하명의 음성을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선 일단 그 중 어느 구절이 영향을 발휘하는지 확인해야 했다. 누군가와 싸울 때 오하명의 방송을 통째로 듣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말했다.
“아니야, 건우 시키자. 야는 지난번에도 영향을 받았으니까 녹음본 효과랑 직접적인 방송의 효과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 확인할 수 있을 거야. 또 우린 녹음본을 반복 재생하면서 그 효과가 얼마나 줄어드는지도 확인해야 해.”
‘역시 팀장님은 전문적이야. 연구원 출신다워.’
용여홍이 몰래 혀를 내둘렀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구조팀 식구들은 이제 서로의 지난날에도 꽤 익숙했다. 장목화로 말할 것 같으면, 기본적으로 귀가 좋지 않다는 것과 안전부에 들어오기 전 연구직에 있었고, 과학자를 목표로 했던 과거가 있었다.
다만 어느 방면에 있었는지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이 모두 귀를 막자, 성건우는 특정 구절을 골라 듣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잘 모르는 걸 마주했을 때는 겸허한 마음으로 가르침을 청해야 합니다⋯⋯”
그가 청취를 마치자 헤드폰을 벗은 용여홍이 한번 떠보듯 물었다.
“난 네 형이야.”
성건우는 흠칫 놀란 듯 멍해졌다가, 소리 내 웃었다.
“하하하! 그렇게 쪼끄만 네가 어떻게 우리 형이라는 거야?”
“…….”
용여홍에겐 상처만 남은 물음이었다.
그런데 성건우가 다시 표정을 진지하게 고쳤다.
“근데 돌연변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맹목적으로 믿으면 안 되니까 일단 유전자 검사부터 하고 다시 얘기하자고. 모든 것이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겠어?”
잠시 후, 여러 명의 성건우는 짧은 논쟁 끝에 녹음본에 영향을 받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상태에서 벗어났다.
이내 그가 프로다운 모습으로 말했다.
“지난번 리만이 있던 곳에서 들었을 때보다는 확실히 약하네요. 하지만 기원의 바다 안에 자리한 각성자들한테 영향을 미치긴 충분해요. 특수한 대가로 이런 영향에 면역이 된 이들이 아니라면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한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저도 아직 기원의 바다를 벗어나지 못해서 판단이 좀 어렵네요. 가능은 해도 효과는 훨씬 약할 거라는 말씀밖에는 못 드리겠어요.”
그 후로 성건우가 반복적인 실험을 했고, 이로 인해 효력의 감쇠 규칙도 대충 파악했다.
녹음본의 영향은 매번 원판보다 약 15~18퍼센트 정도 약해졌다.
즉, 한 녹음본은 최대 6, 7회만 사용 가능하고 효과는 갈수록 떨어졌다.
이제 구조팀이 가진 이 녹음본은 앞으로 1, 2회 정도만 쓸 수 있었다.
그래도 구조팀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하명은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을 매일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방송할 때마다 청취자에게 영향을 발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최대 며칠에 한 번씩은 능력을 쓸 터였다.
구조팀은 앞으로 정기적인 녹음으로 다양한 능력을 얻어낼 예정이었다.
팀장 장목화도 꽤 만족한 얼굴이었다.
“가상 세계 주인에 대적하긴 힘들 수도 있는데, 다른 방면이라도 분명 쓸모가 있을 거야. 강가를 걷다 보면 신발은 젖기 마련이잖아?
이후의 방송엔 오하명이 청취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말을 한 구절만 심어두진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구절에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한 구절, 한 구절 일일이 다 확인하는 건 체력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낭비니까 최대한 아껴 쓰고 거기에 너무 기대지 않는 게 좋겠어.”
“네.”
구조팀은 이번 녹음본의 다른 구절들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다른 문제는 없다는 걸 확인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모두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한숨을 토해낸 장목화가 자조하듯 웃었다.
“휴⋯⋯. 오하명에게 원하는 말을 시킬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네. 그 사람한테 전보를 보내는 건 지나친 모험이라고 생각하거든.”
성건우는 흠칫 놀란 듯 멍해졌다가, 소리 내 웃었다.
“하하하! 그렇게 쪼끄만 네가 어떻게 우리 형이라는 거야?”
“…….”
용여홍에겐 상처만 남은 물음이었다.
그런데 성건우가 다시 표정을 진지하게 고쳤다.
“근데 돌연변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맹목적으로 믿으면 안 되니까 일단 유전자 검사부터 하고 다시 얘기하자고. 모든 것이 허상이고 꿈인데 진지하게 임할 필요 있겠어?”
잠시 후, 여러 명의 성건우는 짧은 논쟁 끝에 녹음본에 영향을 받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상태에서 벗어났다.
이내 그가 프로다운 모습으로 말했다.
“지난번 리만이 있던 곳에서 들었을 때보다는 확실히 약하네요. 하지만 기원의 바다 안에 자리한 각성자들한테 영향을 미치긴 충분해요. 특수한 대가로 이런 영향에 면역이 된 이들이 아니라면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한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저도 아직 기원의 바다를 벗어나지 못해서 판단이 좀 어렵네요. 가능은 해도 효과는 훨씬 약할 거라는 말씀밖에는 못 드리겠어요.”
그 후로 성건우가 반복적인 실험을 했고, 이로 인해 효력의 감쇠 규칙도 대충 파악했다.
녹음본의 영향은 매번 원판보다 약 15~18퍼센트 정도 약해졌다.
즉, 한 녹음본은 최대 6, 7회만 사용 가능하고 효과는 갈수록 떨어졌다.
이제 구조팀이 가진 이 녹음본은 앞으로 1, 2회 정도만 쓸 수 있었다.
그래도 구조팀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하명은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을 매일 진행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방송할 때마다 청취자에게 영향을 발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최대 며칠에 한 번씩은 능력을 쓸 터였다.
구조팀은 앞으로 정기적인 녹음으로 다양한 능력을 얻어낼 예정이었다.
팀장 장목화도 꽤 만족한 얼굴이었다.
“가상 세계 주인에 대적하긴 힘들 수도 있는데, 다른 방면이라도 분명 쓸모가 있을 거야. 강가를 걷다 보면 신발은 젖기 마련이잖아?
이후의 방송엔 오하명이 청취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말을 한 구절만 심어두진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구절에서도 영향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한 구절, 한 구절 일일이 다 확인하는 건 체력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낭비니까 최대한 아껴 쓰고 거기에 너무 기대지 않는 게 좋겠어.”
“네.”
구조팀은 이번 녹음본의 다른 구절들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다른 문제는 없다는 걸 확인했을 때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있었다.
모두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한숨을 토해낸 장목화가 자조하듯 웃었다.
“휴⋯⋯. 오하명에게 원하는 말을 시킬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네. 그 사람한테 전보를 보내는 건 지나친 모험이라고 생각하거든.”
몇 초간 고민하던 성건우가 말했다.
“다음에 수종이한테 가르침을 청해보죠. 이두형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면 더 좋을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