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18화 (418/649)

418화. 행위예술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후속 방안으로 남겨놓자. 음, 이 방법을 못 쓸 수도 있겠지만 일단 녹음된 오하명 목소리를 틀어서 효과가 있다면 우리한테도 이득이잖아.”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음흉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적의 무언가를 이용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었다.

이는 구조팀이 어떤 의미로는 오하명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힘으로 가상 세계를 타파하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적들에게 대적하기에는 충분한 효과가 있을 것이었다.

멍해진 용여홍은 결국 이 방안도 영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자 제품에 영향을 미치는 오하명이라면 녹음된 목소리라도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곧장 일을 진행하고 싶었지만, 손목시계를 보니 이미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 시간이 끝난 시각이었다.

“내일 저녁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용여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구조팀 다섯은 이제 다른 거리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막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키는 용여홍과 거의 비슷했고, 길게 내린 검은 머리카락은 좀 덥수룩했으며, 눈동자는 청록색, 이목구비는 짙다기보단 부드러운 편이었다.

그리고 얼룩덜룩한 가죽 옷차림의 남자는 종이가방을 하나 들고 있었다.

장목화는 그를 힐긋 보자마자 시선을 거두고, 짐짓 여유로운 척 거리 가장자리 가게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그 수배범이야.”

“예?”

용여홍도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조금 전 도망쳤던 시민 집회 폭발 사건 용의자와 조금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눈동자가 녹색이고 키가 비슷하다는 것 외에 다른 공통점은 없는 듯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입가에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것이었다.

장목화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신발이 그대로야. 아까 그 남자 신발에서 석탄재가 떨어진 걸 발견했을 때, 신발을 봤어. 검은색에 끈이 없고, 매우 낡은 데다 긁힌 흔적이 나 있었어. 긁힌 흔적의 위치가 똑같아.”

용여홍의 눈이 커다래지는 사이, 백새벽은 느릿하게 한숨을 토해냈다.

“정말로 그 치안요원들을 산책시켰나 보네요.”

피식 웃은 장목화는 신난 얼굴로 성건우와 게네바를 돌아보았다.

“가서 말 걸어볼까?”

성건우도 곧장 흥분했다.

“좋아요!”

장목화는 바로 그를 무시하고, 금속 목을 움직이는 게네바에게 말했다.

“겐, 이건 너한테 맡길게.”

이에 성건우는 약간 실망했지만 금세 기력을 차리고 게네바를 한쪽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성건우는 한창 조그만 소리로 당부를 시작했다.

* * *

한 손은 주머니에, 한 손엔 종이가방을 쥔 남자가 그린올리브로 통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 종이가방엔 전에 입은 검은 트렌치코트가 들어있었다.

조금 전 구조팀을 지나친, 장목화가 수배범이라 지목한 그 남자였다.

디미스란 이름의 이 남자는 밤거리를 감상하며 여유로운 걸음을 옮겼다.

도중엔 그를 향해 다가오는 행인도 있었고, 그와 나란히 걷게 된 행인도 있었으나 그들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거나 작은 우회로를 선택하며 디미스와 멀어졌다. 이 모든 일은 부지불식간에 이뤄졌다.

잠시 후, 디미스가 모퉁이 너머 골목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한 인영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정말 급발진한 자동차와 같은 속도라, 디미스는 무슨 반응을 보일 틈도 없었다.

그렇게 디미스 옆으로 달려온 인영은 친한 친구를 대하듯 디미스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은흑색 금속으로 빛나는 손이었다.

디미스는 그제야 빠른 속도로 달려온 상대가 검푸른 군복을 입은, 로봇임을 알아차렸다. 돌아본 눈이 붉게 빛나고 있기도 했다.

입을 쩍 벌린 디미스는 살려달라고 외치며 분위기를 혼란스럽게 만든 뒤 그 틈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게네바는 디미스 어깨에 얹은 손으로 그대로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디미스는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방금 지나간 그 치안요원들이 때맞춰 돌아오려나?”

게네바의 합성음 목소리에는 약간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 성건우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대사와 말투까지, 아주 상세한 가르침이 있었다.

순간 디미스의 얼굴이 굳었다. 어느 부분에서 실수한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게네바는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매우 자연스럽고 친숙하게 디미스를 끌어왔다. 그 자세로 비정상적인 오른손도 슬쩍 가렸다.

“이야기나 하자는 거다.”

이 역시 성건우가 지도한 대사였다. 만약 게네바가 표정까지 통제할 수 있었다면 엷은 미소까지 지었을 것 같았다.

평정심을 되찾은 디미스는 공포를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게네바를 따라 옆쪽 조용한 골목길로 들어가, 아무도 없는 구석에 이르렀다.

“네가 시민 집회 폭발 사건을 일으켰나?”

게네바가 물었다.

디미스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 위장까지 다 꿰뚫어 봤으면서 그런 질문은 왜 하는데? 네 주인이나 나오라고 해.”

디미스의 반응은 게네바가 가진 인간 행동 데이터베이스엔 부합하지 않았다. 이에 게네바가 물었다.

“무섭지 않아?”

디미스가 냉정하게 되물었다.

“무서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다고?”

게네바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격투장 암살 기도 사건의 공범이기도 한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디미스가 웃었다.

“너희는 왜 그런 짓들을 하는 거지?”

계속 이어지는 질문에 디미스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의 질서를 깨부수고 혼란을 일으키려고. 지금의 퍼스트 시티는 천천히 차오르는 고인 물이나 다름없어. 계속 이대로 가면 생기도 점점 없어질 거고, 물은 모든 사람의 목까지 차오르겠지.”

그 말을 듣던 게네바가 지적했다.

“천천히 차오른다는 말과 고인 물은 논리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

잠시 멍해진 디미스가 대꾸했다.

“⋯⋯뜻만 알아들을 수 있으면 됐잖아. 아무튼, 반드시 이런 상태를 타파해야 해. 그 후에 어느 쪽으로 발전하든 지금보다는 나을 거야.”

게네바도 동조했다.

“행동과 변화야말로 이 세상의 주요 흐름이지.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우리는 시종일관 변하고 있다는 거다.”

“합작을 원하는 건가?”

디미스는 이 로봇의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을지 추측에 들어갔다.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인적 없는 이 골목길 구석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여태까지 디미스는 그 존재를 감지한 적도 없었다. 이는 상대가 본인의 의식을 숨기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상대 역시 디미스와 같은 각성자였다.

키가 큰 상대는 생동감이 넘치는 원숭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성건우는 디미스가 원숭이 가면에 주의력을 뺏긴 이때를 놓지 않았다.

“봐봐. 우린 퍼스트 시티에 큰 사건을 일으키고 싶어 해. 너희도 퍼스트 시티에 큰 사건을 일으키려 하고. 우린 팀이고, 너희도 팀이야. 그러니까⋯⋯.”

몇 차례 표정 변화를 보이던 디미스는 종국엔 격한 기쁨을 드러냈다.

“너희였구나! 왜 이렇게 급작스러운 방식으로 만나려 한 거야?”

“이쪽이 더 비밀스럽고 안전하니까.”

솔직하게 답한 성건우가 디미스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 곧바로 덧붙였다.

“너도 방금 우리 로봇을 설득했잖아.”

생글생글 웃는 성건우를 보고, 디미스가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늘 많은 변명거리를 들고 사람들을 응대했으니까.”

“⋯⋯.”

게네바는 그제야 디미스의 거짓말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각종 데이터를 토대로 분석하는 거짓말 탐지기라도 언제나 정확하지는 않은 마당에, 지능 로봇이라고 만능일 수는 없었다.

성건우도 웃으며 대꾸했다.

“사실 나도 네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지금의 퍼스트 시티엔 변화가 시급해. 어느 쪽으로 변하든, 변하지 않는 것보단 낫지. 근데, 정말 격투장 암살 기도 사건 범인이랑 잘 아는 사이야? 너는 별로 걱정도 안 하는 것 같네.”

디미스가 소리 내 웃었다.

“우리는 그냥 합작한 사이야. 심지어 그 사람이 알려준 이름이 진짜인지도 몰라. 상부에서 계획한 일이었으니까. 난 그들 분부에 따를 뿐이야.”

“상부라면 어느 조직? 조금 헷갈리네.”

성건우가 상대를 슬쩍 떠보았다.

현재 게네바는 디미스의 동정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상대가 깨어나려는 조짐이라도 보이면 곧장 그를 기절시킬 작정이었다.

그러나 디미스가 알아서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았다.

“어? 그쪽이 얘기 안 해줬나? 우린 행위 교단이야.”

엄숙하게 답한 그가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함께 조용히 구호를 외웠다.

“행위는 속마음을 보여준다. 충동이 함께 하기를.”

“행위 교단⋯⋯. 너희들이 믿는 건 어느 달지기인데?”

성건우는 회사 자료에서 확인했지만, 한번 더 신중한 확인을 거쳤다.

“5월의 감찰자.”

디미스는 다시 한번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것이 달지기를 향한 존중의 표현 방식인 듯했다.

성건우가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렇구나. 성찬은?”

디미스가 정색한 채 답했다.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조리한 각종 벌레. 혼란의 시대 이후부터는 식량이 부족한 황야유랑자와 일부 유적 사냥꾼을 제외한 누구도 그것들을 먹으려 하지 않았지. 그래서 우리 교단의 영수는 그걸 성찬으로 삼았어.”

‘다른 사람들과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건가?’

게네바가 그 원인을 분석해 보았다.

그 사이 성건우는 얼굴에 착용한 원숭이 가면에 손을 얹었다.

“머리만 떼어버리면 바로 먹을 수 있으니까. 단백질도 풍부하고.”

뒤이어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들 목표는 뭐야?”

“그건 우리들 상부에 물어야지. 난 그저 집행을 담당하는 병사일 뿐인데.”

잘 모른다라……. 성건우는 안타깝다는 눈으로 디미스를 몇 초간 묘하게 응시했다.

“넌 왜 계속 그 치안요원들에게 쫓기는 거야? 왜 의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서 주의를 끄는 거지?”

디미스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일종의 행위예술이야.”

“아, 어쩐지. 행위 교단이란 이름을 붙인 데엔 이유가 있었네.”

성찬을 듣고 그 교단에 딱히 흥미를 보이지 않던 성건우가 점차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때 게네바가 끼어들었다.

“개인적인 흥미를 위한 행동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뿐만은 아냐. 달지기를 인정하고 찬양하는, 일종의 기도 방식이기도 해.”

디미스가 솔직하게 답했다.

성건우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또 어떤 행위예술을 했었는데?”

“엄청 많지. 나중에 얘기해줄게. 여기선 행인이 지나갈 수도 있잖아.”

디미스가 신중하게 굴었다.

성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스카프로 입가를 가리고 다닌 것도 추격자들을 오해하게 하려고 일부러 그랬던 거야?”

“응, 스카프를 벗으면 나인 줄 모르거든.”

디미스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성건우가 오른손을 뻗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당분간은 우리랑 만난 거 상부에 보고하지 마. 그래야 네가 설령 배신당해도 우리한테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앞으로의 임무를 진행할 때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우리를 찾아와.”

잠시 고민하던 디미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너희도 뒷길을 남겨둬. 좋아, 너희한테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정해진 시간과 또 다른 주파수, 특정 비밀번호를 알려준 성건우는 손을 흔들며 디미스에게 작별을 고했다.

게네바 역시 그를 따라 금속 팔을 들고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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