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한마디
한편, 수면 고양이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 발코니에 엎드려 한창 햇빛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수종이 한창 맛있게 먹는 걸 지켜보던 성건우는 함께 음식을 먹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거길 떠나자마자 곧장 여기로 온 거야?”
먹느라 바쁜 수종은 입에 음식을 가득 문 채 웅얼거렸다.
“응응. 늪에서 나와서 사냥꾼들한테 퍼스트 시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란 얘기를 들었어. 그런 데라면 전기도 있을 것 같아서 바로 왔지.”
“줄곧 이 아파트에서 살았던 거야, 아니면 최근에 여기로 이사한 거야?”
장목화가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물었다.
수종은 입에 물고 있던 토마토 달걀 볶음을 꿀꺽 삼켰다.
“이사는 골치 아파, 사는 데는 안 옮길 수 있다면 안 옮기는 게 낫지. 여기는 정전되지도 않으니까.”
“그렇구나.”
장목화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그린올리브에서 무심병이 발병한 건 수종이 때문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주변에 아무 일이 없는데 그보다 더 먼 곳에 재난이 발생했을 리 없었다.
배를 반쯤 채운 수종이 예의 바르게 되물었다.
“근데 너희는 왜 여깄어?”
“사건 하나를 조사하러.”
장목화는 머신 헤븐이 오레이 행방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이유를 들며 지금 아비아, 마커스를 찾고 있는데 접근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녀는 가상 세계에 대해 중점적인 설명도 덧붙였다.
“우와! 엄청난데?”
수종은 옛날이야기를 들은 아이처럼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곤 계속해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회사 답변과 거의 비슷한 답이잖아.’
장목화는 하는 수 없이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다 목욕탕에서 한 사람을 만났어. 네 고양이 때문에 깜짝 놀랐다고 말하더라고. 그래서 너도 퍼스트 시티에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렇구나.”
수종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대꾸하며 토마토 달걀 볶음을 향한 젓가락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성건우가 덧붙였다.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널 찾았다고. 가위 말이 북안 뭇 산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거기까지 갔다 왔어. 가위 말이라도 볼 수 있을까 해서.”
“걔는 흰 늑대가 마음에 들었는지 온종일 거기만 돌아다녀. 할 일이나 제대로 하고 있나 모르겠어.”
수종이가 불만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 널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거냐?’
용여홍이 속으로만 빈정거렸다. 무심자의 왕을 마주한 상황이니만큼 감히 심기를 건들 순 없었다. 말실수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때, 수종이 고개를 틀어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용여홍의 심장은 미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가 빈정거린 걸 느끼기라도 했나?’
말도 안 되는 걱정에 그는 더 이상 속으로도 수종이를 흉보지 않았다.
그 사이 장목화가 수종의 말을 받았다.
“우리도 그 흰 늑대를 맞닥뜨린 적 있어. 인간은 조종할 수 있더라고.”
그녀는 흰 늑대와 두 번이나 마주했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하며 구조팀이 불모지 13호 유적에 들어갔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그 후 장목화는 아직도 겁에 질린 듯한 말투로 오하명의 무시무시한 능력과 웨트, 파르스, 패링턴의 자살을 언급했다.
“그 사람, 무지 강하네.”
수종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그의 정신은 오로지 눈앞에 놓인 토마토 달걀 볶음과 남은 피자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크림빵 두 개는 저녁에 먹으려고 이미 야무진 계획도 세워둔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수종이 고개를 들고 웃었다.
“만약 거기 다시 가보고 싶으면, 이두형이란 유적 사냥꾼이랑 같이 가봐.”
이 순간 장목화는 고작 일고여덟 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의 얼굴에서 교활한 빛을 보았다.
이내 성건우가 곧장 친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최근에 이두형을 만난 적 있어.”
“뭐?”
젓가락을 쥔 수종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나서야 입술을 떼고 두덜거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요 며칠 계속 초조하더라니. 게임도 잘 안 되더라.”
“그 사람이 너한테 뭘 어쩌려고 하는 건데?”
장목화가 떠보았다.
수종은 약간 억울하다는 빛으로 답했다.
“나를 잡아 돌아가려고 해.”
“돌아가려고 한다고?”
백새벽이 예리하게 그 단어를 포착했다.
그러자 두어 번 코웃음을 치던 수종은 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계속해서 음식을 먹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역시, 이두형의 내력은 심상치 않구나.’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장목화는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며 수종의 말을 곱씹었다.
‘이두형……. 설마 어느 연구원의 고급 특파원인가? 수종이를 잡아 데려가는 게 그 사람 임무인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문제가 생겨 기억을 잃고 집념만 남게 된 건가?’
“거주지 옮길래? 우리가 도와줄 수 있어.”
성건우가 의욕적으로 나섰다.
수종이는 젓가락을 멈추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필요 없어. 난 그 사람보다 숨바꼭질 더 잘해. 당분간은 날 찾지 못할 거야.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가버릴지도 모르잖아.”
‘꼬마애 주제에 왜 이렇게 엉덩이가 무거워?’
하지만 장목화도 고집을 피우는 수종에게 더 이상 강요는 하지 않았다.
드디어 식사를 마친 수종은 만족스럽다는 듯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다시 또 고개를 들린 그가 이번엔 눈을 반짝이며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게임 하자!”
성건우 역시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응했다.
“좋아! 그리고 우리, 전에 타르난에서 최신형 휴대용 컴퓨터 한 무더기를 얻었었어. 그 컴퓨터에 구세계 게임 엄청 많이 깔려 있는데, 한 대 줄까?”
뜻밖의 제안에 수종의 얼굴에는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내,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 됐어⋯⋯.”
수종은 입으론 거절하고 있지만, 두근대는 심장에 하마터면 구조팀에게 컴퓨터를 넣어달라고 책가방을 열 뻔했다.
“우리, 좋은 친구잖아. 아니야?”
성건우가 진지하게 물었다.
망설이던 수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그럼 거절하지 말아야지.”
성건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수종이 활짝 웃었다.
“그럼 다음에는 언제 올 거야?”
장목화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며칠 뒤에.”
“그때도 먹을 걸 가져올 거야?”
수종의 얼굴에 기대감이 잔뜩 묻어났다.
모처럼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구조팀의 마음도 녹아내렸다. 또한 이는 그들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그럼, 어려운 일도 아닌데.”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수종은 더 환하게 웃으며 성건우를 끌고 게임기 앞으로 갔다.
구조팀도 다른 할 일이 있기에 거의 오후 4시쯤에야 수종과 작별했다.
“또 봐!”
성건우가 못내 아쉽다는 듯 손을 휘휘 흔들며 인사했다.
“또 봐!”
수종이도 함께 손을 흔들었다.
* * *
지프로 돌아온 용여홍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무 피곤해.”
“뭐가 피곤해?”
성건우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 순간, 장목화가 울컥해 소리쳤다.
“넌 당연히 안 피곤하겠지. 게임만 했으니까! 우린 거기 부엌도 청소하고, 거실도 청소하고, 침실까지 정돈해줬다고.”
거의 보모의 일을 한 셈이었다.
성건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꾸했다.
“다음에는 같이 게임 할 수 있도록 해줄게요.”
“그래, 눈물 나게 고맙다. 하……. 오늘 방문한 효과가 톡톡한 것 같은데.”
피식 웃던 장목화는 곧 한숨을 내쉬었다.
“네, 수종이가 저희를 꽤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운전 중인 백새벽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이내 장목화가 뒷좌석의 게네바를 돌아보았다.
“혹시 수종이한테 어떤 이상한 점 같은 건 없었어?”
게네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골든그레인 구역 하레이 스트리트 9호.
구조팀은 거울 교파의 구성원, 스미스가 산다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503호⋯⋯. 뭔가 찝찝한 숫잔데.”
용여홍이 약간 두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심령의 복도 안 강소월이 있던 방이 바로 503호였다.
살짝 망설이던 장목화가 말했다.
“단순한 우연이겠지. 둘 사이엔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데?”
물론 세상에 단언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녀도 확신은 없었다.
다섯 팀원은 경계심을 높이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5층에 이르러 503호를 힐긋 보던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도 없네요.”
장목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중대형 생물 전기 신호도 안 잡혀.”
정말로 503호는 적막했다. 그곳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좀 기다려볼까요, 아니면 들어갈 방법이 있는지 단서를 찾아볼까요?”
용여홍의 말에, 성건우가 단호히 말했다.
“그건 결례지.”
“음, 우리는 거울 교파에 대해 알아보려는 거지 그쪽과 적인 건 아니니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장목화도 이번에는 성건우의 편을 들어주었다.
“저도 사실 기다리려고 했어요.”
용여홍은 조그만 목소리로 자기 변호를 했다.
이에 구조팀은 503호 앞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다림은 몇 시간이나 이어졌고, 결국 까만 밤이 먼저 찾아왔다.
* * *
저녁 8~9시, 길가에 세워둔 미니밴 안.
“이미 거처를 옮긴 건가?”
용여홍이 가로등 불빛으로 밝혀진 아파트 입구를 보며 중얼거렸다.
현재 구조팀은 교대로 저녁 식사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아직도 스미스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스미스 집 앞이 아닌 아파트 건물 밖으로 나온 건, 5명이 그 앞에 옹기종기 쪼그려 앉아 있다간 오가는 주민들을 놀라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성건우와 장목화는 아파트 건물 밖 길가에서도 스미스의 방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감지할 수 있었다.
이내 성건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거처를 안 옮긴 게 확실하네.”
장목화가 눈에 힘을 주고 성건우를 꾸중했다.
“올라가서 이웃 주민한테 물어보자. 이렇게 마냥 기다릴 순 없어.”
탐문을 맡은 건 백새벽과 용여홍이었다. 어디서든 주로 이 두 명이 움직이는 건 구조팀에서 그나마 눈에 덜 띄는 인상이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주민들의 경계심을 최대한 잠재울 필요가 있었다.
* * *
502호실.
한 여자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낯선 이들이 서 있는 걸 보고 백새벽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소리 나도록 문을 닫았다.
쾅!
“문에 달린 외시경으로 먼저 봤으면 되잖아?”
용여홍이 약간 억울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물어볼 준비까지 다 해놓았는데 대놓고 문전박대를 당한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백새벽은 502호실 문에 달린 외시경을 힐긋 바라보며 말했다.
“망가진 것 같아.”
그로부터 10여 초가 더 지났을 무렵, 문은 다시 열렸다.
이번에 현관에 선 건 한 장년의 남자였다.
그는 검은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옷은 오래돼 보였지만 기운 흔적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누구?”
남자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러자 용여홍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고, 백새벽은 503호실을 가리켰다.
“저희는 스미스의 친구들이에요. 오늘 만나러 왔는데 계속 집에 없어서요. 혹시 스미스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 해서 여쭈러 왔습니다.”
장년 남자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답했다.
“그 사람? 가끔 엄청 늦게 들어오던데, 좀 더 기다려봐.”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새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으로 내려오는 동안 용여홍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무슨 일이 있길래 가끔 늦는다는 거지?”
“봉급받은 기념으로 한껏 즐기는 걸 수도 있고, 교파 활동에 참가하는 걸 수도 있고, 임시 교사 일을 맡아 야학에서 수업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백새벽이 여러 가능성을 제시했다.
곧이어 백새벽, 용여홍은 이 정보를 장목화, 성건우, 게네바에게 전했다.
구조팀은 자정까지 더 기다려보자는 결정을 내렸다.
골든그레인 구역 치안은 그린올리브 구역보다 훨씬 나았고 길거리도 더 깨끗했다. 깊은 밤에 접어들었어도 분위기는 꽤 안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