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412화 (412/649)

412화. 추측

용여홍, 백새벽은 풍성한 수확을 얻은 웨트의 방 앞으로 왔다.

용여홍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그사이 벌써 백새벽이 오른발을 들어 올리고 자물쇠를 힘차게 걷어찼다.

쿵!

방문이 뒤로 밀려나고, 용여홍의 시야에 붉은 피 웅덩이가 잡혔다.

웨트가 그 붉은 핏속에 있었다. 안색은 이미 창백하게 질린 채, 이 세상을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웨트의 가슴팍에는 비수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비스듬한 각도로 꽂힌 걸 보면 범인은 그의 오른손이었다. 웨트 역시 자살을 시도한 것이었다.

용여홍은 저 밑바닥에서 피어오르는 한기를 느끼면서도 본능적으로 웨트의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백새벽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무전기를 들었다.

아직 숨이 남은 웨트는 용여홍을 보며 입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흐릿한 눈동자를 움직여 오른 옆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이 가리킨 곳에 테이블이 하나 있었고, 그 위에 볼펜으로 눌러놓은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용여홍은 빠르게 그 종이를 들었다.

「1번 자루는 조니의 아내에게.

2번 자루는 도노반의 부모님께.

3번 자루는 요한리스의 아들에게.

4번 자루는 이몬의 가족에게.」

간단한 분배 계획서였다.

종이를 가지고 웨트의 곁으로 돌아온 용여홍이 쪼그려 앉았다.

장목화에게 상황을 보고한 백새벽은 그를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손쓸 수 없는 상태야.”

지금 당장 웨트에게 페이카 제제를 쓴다 한들 기껏해야 죽음을 2, 3분 정도 지연시킬 터, 이미 대량의 출혈이 있던 데다 피 수혈도 불가한 상황이라 큰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또한 구조팀이 휴대 중인 페이카 제제 자체도 충분하지 않아서 매우 신중하게 사용해야 했다.

용여홍도 이젠 웨트의 죽음을 인정해야 했다. 머릿속엔 폐허에서 늘 겁 많고 신중했던 웨트의 모습이 피어올랐다.

용여홍은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번에 네가 얻은 수확물들, 네 동료의 가족들한테 전해달라는 거지?”

그 말에 흐릿한 웨트의 눈에 약간 빛이 돌았다. 아주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의 희미한 소리를 냈다.

용여홍은 가까이 고개를 숙여 귀를 갖다댄 후에야 정확한 말을 들었다.

“고⋯⋯ 마워⋯⋯.”

소리가 끊김과 동시에 웨트의 고개가 옆으로 풀썩 떨어졌다.

용여홍은 그를 몇 초간 응시하다가 긴 한숨을 뱉었다.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용여홍은 백새벽과 함께 방을 검사해보다가 웨트가 가지고 다니던 가방 안에서 작은 자루 다섯 개를 찾아냈다. 그중 네 개에는 1부터 4까지의 번호가 붙어 있었다.

자루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 특수 합금, 가지런히 접힌 기술 자료 등이 담겨 있었다. 번호가 없는 자루를 제외하고, 이 네 자루에 담긴 물건의 양은 거의 다 비슷했다. 그리고 번호가 없는 자루의 양은 제일 적었다.

용여홍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돌아와서야 이것들을 정리했나 봐. 그때만 해도 자신이 자살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겠지.”

주위를 둘러보던 백새벽은 간단하게 대꾸했다.

“단서는 없네.”

용여홍은 웨트의 시체와 그 주위에 형성된 피 웅덩이를 돌아보고는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 * *

운 좋게 살아남은 양범구, 그레이는 구조팀이 차를 세워둔 곳으로 찾아왔다. 패링턴 역시 허리띠로 목을 매 죽은 상태였다.

“왜 우린 멀쩡한데 웨트, 파르스, 패링턴만 자살한 걸까?”

용여홍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만약 구조팀에 아무 문제도 없었더라면 그는 양범구나 그레이 짓이라고 의심했을지 몰랐다.

다음 순간 성건우가 말했다.

“왜 우리는 멀쩡하다고 생각해?”

깜짝 놀라 좌우를 둘러본 용여홍은 모두의 표정이 착 가라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표정이랄 게 없는 게네바만 예외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건가? 하, 하지만 우리가 언제 영향을 받았다고? 아무 징조도 없었는데.’

용여홍은 숨을 고르며 마음속에 일어난 파란을 다독였다.

장목화는 한참 뒤에야 한숨과 함께 말했다.

“과연 불모지 13호 유적이네⋯⋯.”

그녀는 탐사를 통틀어 두 번이나 더 탐색하게 했던 첫 번째를 제외하곤 전부 괜찮았다고 생각했었다. 허점도 없었고, 기대처럼 모든 위험을 잘 피해왔으나 그건 순진한 착각이었다.

그들 여덟 명은 아니, 아홉 명은 저도 모르는 새 죽음을 향해 걷고 있었다. 웨트, 파르스, 패링턴의 죽음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더라면 지금도 남은 여섯 명 중 누군가 자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 중 그 방송국에서 1킬로미터 반경 내로 진입한 사람은 없어.”

백새벽도 의문을 표했다. 그건 회사에서 제공한 아주 정확한 수치였다.

양범구와 그레이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들 역시 언제 오하명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중 그 누구도 자살하게 하는 암시를 들은 적이 없었다.

이때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알겠다!”

양범구와 그레이가 그를 돌아보며 무의식적인 기대를 품었다.

장목화도 마찬가지였다.

‘건우가 또 무슨 범상치 않은 이유를 떠올렸나?’

어쩌면 그의 생각으로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될지도 몰랐다.

성건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일정 범위 내 존재하는, 쓸 수 있는 모든 전자 제품이 오하명의 분신이었던 거야. 탐사 동안 그는 내내 우리 곁에 있었어. 없는 곳이 없었지.”

“어쩌면⋯⋯.”

장목화는 길가 상점의 확성기에서 전류의 동정을 감지했던 걸 떠올렸다.

연이어 그레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 전자 제품을 통해 우리에게 몰래 영향을 미쳤다는 건가? 언어를 통한 유혹을 하지 않고도?”

오하명이 전에 보인 모습을 보면, 그는 도에 대한 설교와 언어를 기반으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듯했다.

고민하던 양범구가 말했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그런 방법이 더 은밀하니까. 효과도 직접적인 말로 능력을 발휘했을 때만큼 또렷하지는 않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오하명이 원하는 수준까지 축적될 수 있을 거야.”

장목화가 덧붙였다.

“언어를 통해 우리를 유혹하면서 계속해서 그 폐허에 들어오도록 한 것도 그 때문일 테고.”

“그런⋯⋯.”

용여홍은 순간 그간의 사건들이 하나로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내 백새벽은 장목화가 맨 전술 배낭을 보고 뭔가 깨달은 듯 말했다.

“그 신문도 다시 한번 유적에 들어오게 하려고 일부러 우리에게 남긴 단서였을까요? 우리 중 대부분이 받은 영향이 충분하지 않았어요. 자살하게 할 정도의 임계점에 이르지 못한 거죠. 그래서 효과를 더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던 걸까요?”

“아주 합리적인 설명이야.”

용여홍이 동조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백새벽의 의견이 꽤 그럴듯했다.

반면 게네바는 현재 외부인이 있는 관계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양범구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사실 난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어. 우리가 멀쩡한 이유 말이야.”

“뭔데?”

성건우가 호기심을 표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양범구가 엄숙하게 표정을 굳혔다.

“난 한 종교 조직 구성원이야. 그레이도 그런 것 같고.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달지기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자살하지 않은 거야.

너희도 아마 어느 달지기의 신실한 신도겠지? 처음 동굴에 들어갔을 때부터 알아봤어. 근데 웨트와 파르스는 비교적 순수한 유적 사냥꾼이야. 무엇이나 믿으면서도 사실 아무것도 믿지 않지.”

패링턴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에 아무 평가도 하지 않았지만, 거울 교파와의 관계로 볼 때 패링턴 역시 그다지 신실한 달지기 신도는 아닌 듯했다.

장목화가 웃는 사이, 성건우는 모든 달지기 비호를 받을 수 있는 그림을 꺼내 들었다.

“우리가 에이돌른, 사명, 말인, 쌍태양, 깨진 거울, 보리, 황금 저울, 작열하는 문을 믿는지를 묻는 거야?”

양범구와 그레이의 표정이 순간 변화무쌍해졌다. 이런 사람은 난생처음 본다는 눈빛이었다.

성건우는 종이를 거둬들이며 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너희가 속한 종교 조직, 성찬들이 어떻게 돼?”

양범구가 무의식적으로 답했다.

“쓸개랑 시금치를 이용한 음식들.”

성건우의 질문은 이게 끝이었다. 어떤 교파인지, 어느 달지기를 믿는지는 묻지도 않고 곧장 그레이를 돌아보았다.

양범구는 뭔가 살짝 모욕감이 들었다.

이내 그레이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외부인에게 알려주기는 쉽지 않아.”

“그래서는 신도를 모집할 수 없을 텐데.”

성건우가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그가 성공적으로 화제를 전환한 덕에 오하명의 영향에 대한 이들의 관심도 거의 다 사그라들었다.

그레이는 옷깃을 더 단단히 여미며 아무 호응도 하지 않았다.

장목화는 때맞춰 분위기를 수습했다.

“다른 가능성도 있어. 죽은 세 사람은 신문 내용을 사진으로 찍는 대신 손으로 베꼈잖아.”

그녀는 계속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고 있었다.

양범구가 바로 반박했다.

“근데 나도 돌아간 뒤엔 내용을 좀 베껴 썼어. 평소에 쉽게 살펴볼 수 있게. 만약 신문을 읽었는지가 기준이라면 그건 이해가 돼. 그렇지만 사진을 찍은 기기랑 촬영한 장소 모두 여기 캠프 안에 있었잖아? 오하명한테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그런 행동으로 영향받았을 리는 없어.”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네, 아무튼 앞으로도 조심해. 당분간은, 적어도 보름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지내는 게 좋을 거야.”

구조팀에서는 게네바가 그 역할을 담당할 것이었다.

양범구와 그레이도 그녀의 제안을 무시하지 않고 그래야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이 떠난 뒤, 장목화는 용여홍을 바라보았다.

“웨트가 모은 물자를 정해진 사람들에게 보내주고 싶다고?”

파르스의 유품은 그와 비교적 친한 양범구, 그레이가 처리하기로 했고 패링턴의 것은 캠프 안에 있는 그의 친구가 인수했다.

“네.”

용여홍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그러고 싶은 이유는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 난제를 설명했다.

“근데 웨트가 그 사람들 주소를 적어둔 건 아니에요. 남긴 물건에서도 유용한 단서는 없었고요. 어떻게 찾아야 할지 엄두도 안 나네요.”

장목화는 기억을 찬찬히 더듬었다.

“웨트는 퍼스트 시티 출신 발음을 썼어. 동료도 분명 그렇겠지. 퍼스트 시티 길드에 임무를 의뢰하자. 웨트와 동료를 아는 사람이 꽤 있을 거야.”

용여홍과의 대화를 마무리 지은 뒤, 장목화가 게네바를 쳐다보았다.

“겐, 넌 당분간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거, 말까지 잘 살펴줘. 이런 작업을 계속 이어갈지는 일단 수종이를 만난 뒤에 다시 결정하자.”

“좋아.”

게네바가 답했다.

그 후 장목화는 전 팀원을 향해 분부했다.

“교대로 휴식하자. 겐이 수고 좀 해줘. 내일 아침 캠프를 떠나는 거야.”

“네.”

용여홍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지프로 돌아갔다. 다른 팀원들 역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다행히 간밤에 구조팀은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언제나처럼 2조로 나뉘어 차에 오른 뒤 캠프 입구로 향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인영이 튀어나와 구조팀 차 앞을 가로막았다.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남자, 캠프 여관의 사장이었다.

“무슨 일이죠?”

장목화가 차창을 내리고 신중하게 물었다.

‘설마……. 양범구랑 그레이한테도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여관 사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네들, 문을 네 개나 부숴놓고 이대로 가버릴 거라고?”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서도 전진 캠프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나름의 능력과 배짱이 있다는 뜻이었다.

“⋯⋯.”

구조팀 네 팀원은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성건우만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가진 동전을 꺼냈다.

수리비를 치른 후에야 산 아래로 달리기 시작한 구조팀의 차량 두 대는 다시 퍼스트 시티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5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막 아침 운동을 마치고 여관방으로 돌아온 양범구는 갑자기 나타난 여관 사장에게 문 수리비를 요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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