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그 사람
전술 대형을 갖추고 차분히 돌아가던 와중, 장목화가 부드럽게 웃으며 패링턴을 쳐다보았다.
“너도 봤겠지만, 흰 늑대는 인간을 통제하고 그들을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어. 모두의 안전을 위해, 네가 본인이 정말 맞는지, 아니면 흰 늑대에 영향을 받은 상태인지 확인 좀 해볼게. 그냥 질문만 몇 가지 하는 거야.”
“나를 알아?”
패링턴이 장목화의 말을 듣고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장목화는 꾸준히 부드러운 투로 말했다.
“널 아는 사람을 알지. 음, 첫 번째 질문, 네 이름이 뭐야?”
“패링턴.”
“두 번째 질문, 혹시 거울을 숭배하는 교파에 대해 알고 있어?”
장목화의 말에, 양범구와 그레이도 패링턴을 돌아보았다.
“응. 너희들, 테렌스 친구야?”
패링턴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말했다. 그는 테렌스를 비롯한 소수에게만 이 일을 언급했었다. 그들 중 가장 친구가 많은 것은 테렌스였다.
“아니, 테렌스는 우리 채권자야.”
성건우가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용여홍은 순간 웃음이 살짝 터졌다.
‘그래, 빚을 떼어먹힐까 벌벌 떠는 채권자도 채권자긴 채권자지.’
패링턴은 빚이 얼마인지 그런 건 묻지 않고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런 교파에 대해서는 분명 알고 있어. 음, 그 교파의 한 교도를 알고 있거든. 제법 친한 편이지. 전에 나한테 전도하려고 하기도 했고.”
“그 사람 이름은 뭐야? 주소는?”
장목화는 계속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사방 경계도 충실히 이행했다.
“이름은 스미스, 골든그레인 구역 하레이 스트리트 9호 503호실에 살아.”
남 밑에 있는 상황인 만큼 패링턴도 남의 눈치를 보며 살 수밖에 없었다. 온정을 베풀어 친구의 정체를 숨겨주고 그럴만한 처지가 못 됐다.
그때, 성건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교파의 성찬이 뭔지는 알아?”
패링턴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성건우가 이해한다는 듯 이야기했다.
“네가 그 교파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구나.”
다시 장목화가 딴 길로 새는 것을 막았다.
“그 교파는 어느 달지기를 숭배해?”
패링턴은 재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달지기를 숭배하는 게 아니라 거울을 숭배하는 것 같았어. 나한테 ‘신세계는 거울 반대편에 있다.’, ‘네가 거울 속 인물을 바라보면 거울 속의 인물도 너를 바라본다.’ 이런 말들을 했어. 그래서 거울을 볼 때마다 좀 어색하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하더라고.”
성건우는 내내 눈을 반짝거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새로운 공염불을 배우는 것이 상당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렇게 패링턴이 모든 답을 끝내자,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눈짓을 보내며 오른손 엄지와 중지를 펼쳤다.
이 손짓은 미리 세워둔 여러 방안 중 하나였다. 상대와 친구가 되거나 그를 설득해 잠재된 위험을 제거하라는 의미였다.
여태까지 패링턴의 모습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언행도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불모지 13호 유적에서 오래 있었던 만큼 마냥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성건우는 곧장 패링턴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꼬치꼬치 캐물은 건 너무 개의치 마. 봐봐, 여긴 불모지 13호 유적이야. 다들 솔직하게 지내면서 하나로 단합해 불신을 불식시켜야만 최대한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 정도 시련이야 견딜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 패링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범구 팀도 성건우의 말에 이상한 기척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니까’란 단어가 등장한 순간, 패링턴의 표정이 돌연 일그러졌다. 마치 한 겹 먹구름에 뒤덮인 듯했다.
패링턴은 그 상태로 입술을 몇 차례 달싹이다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위험할수록 위험을 무릅써야지. 반전하는 게 도의 움직임이라⋯⋯.”
패링턴의 목소리는 거리로 울려 퍼지고, 용여홍은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심지어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총을 쏴서라도 이어질 말을 막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성건우가 더 빨랐다. 냅다 달려들어 주먹을 들어 올린 성건우는 패링턴 귀 뒤쪽에 주먹을 꽂았다.
퍽!
눈을 까뒤집으며 바닥에 쓰러진 패링턴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장목화는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얼른 자기 상태 좀 확인해봐. 여기 더 머물고 싶다거나, 장기적으로 여기 남아 물자를 수집하고 싶다거나, 방송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모험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드는지 위주로.”
용여홍은 졸아드는 심장을 안고 황급히 스스로를 살폈다.
그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아요.”
이 순간 용여홍은 당장이라도 불모지 13호 유적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백새벽도 뒤따라 답했다.
“난 모험은커녕 당장 철수하고 싶은데.”
웨트 역시 본인의 상태를 밝혔다. 연이어 양범구, 파르스, 그레이 역시 꾸물거리지 않고 자신의 상태를 한 번 확인한 뒤 모두 고개를 저었다.
“휴, 오하명의 영향이 피영향자의 말로 전파되지는 않는 모양이네.”
장목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성건우에게 말했다.
“너는 패링턴 한 번 검사해봐. 어떤 물건을 가지고 있는지.”
곧장 쪼그려 앉은 성건우는 패링턴의 주머니 등을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지폐 한 다발, 동전 한 줌부터 권총 한 자루, 가득 찬 탄창 네다섯 개, 라이터 하나, 산탄총 총알이 든 작은 자루 하나,
유통기한이 지난 압축 비스킷 여러 개, 아직 물이 꽤 남아 있는 구세계 보온병 하나, 정갈하게 접힌 신문 한 부가 나왔다.
“신문?”
찬찬히 소지품들을 훑던 장목화는 가장 뜬금없는 물건을 지적했다. 패링턴이 곤경에 처했을 때 굳이 신문을 볼 사람으론 보이지 않아서였다.
성건우에게 신문을 받아 몇 초간 자세히 살피던 장목화는 신문 가장 바깥면, 그러니까 제 1면에서 이 신문의 이름을 찾아냈다.
『파흐 포스트』
신문은 이미 누렇게 변색 됐으나 건드리자마자 찢어질 것 같진 않았다.
빠르게 바깥면 기사들만 살핀 장목화는 이것이 구세계 유물이라는 것만 알아냈다. 특별히 주의해야 할 만한 점을 찾을 순 없었다. 다만 지금 진지한 연구를 할 상황은 아니라서, 일단 그녀는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이 신문 말고 나머지는 다시 패링턴 옷에 쑤셔 넣고 이제 깨워.”
얼마 지나지 않아, 패링턴이 눈을 떴다.
멍한 눈빛은 자신이 누구에게 맞았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패링턴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장목화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아까 전에 좀 이상해졌어.”
“이상해?”
패링턴이 겁먹은 얼굴로 되물었다.
장목화는 그 물음에 답하는 대신 손에 쥔 신문을 흔들어 보였다.
“이거 기억해?”
패링턴은 미간을 팩 구긴 채 한참을 고민하다가 답했다.
“약간은. 근데 깊은 인상은 없는데. 여기 어디 있던 거 아냐?”
“너한테서 찾아낸 거야.”
성건우가 마치 귀신 이야기를 하듯 으스스한 투로 말했다.
순간 패링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리가?”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며칠이나 있었어?”
패링턴이 기억을 더듬었다.
“열흘이 좀 넘었던가⋯⋯?”
장목화는 패링턴의 눈을 곧게 응시했다.
“열흘이 넘었다면 걸어서 이동해도 벌써 이 도시를 관통해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었을 거야. 근데 넌 왜 아직도 동굴 출입구 근처에 있었던 거야?”
돌연 몸이 살짝 굳은 패링턴이 몇 초 후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런 폐허 도시라면 가치 있는 물자가 아주 많을 거라 생각했어. 이대로 떠나버리기에는 좀 아까웠지. 위험할수록 위험을 무릅써야 하니까⋯⋯.”
이 대목에서 그는 겁에 질린 얼굴로 말을 멈췄다.
장목화 역시 쿵쿵 뛰는 심장을 안고 질문을 이어 나갔다.
“네가 가지고 있는 전자 제품은 없었어. 근데 최근에 전자 제품을 사용한 적은 있었지?”
패링턴은 두려움을 간신히 억누르며 지난 일을 회상했다.
“어느 시장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식량을 찾았는데, 그때 사용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라디오 하나를 발견했었어. 마침 갖고 다니던 구세계 배터리를 넣으니까 딱 들어맞더라고. 이리저리 만져보니 진짜 사용도 가능하고.
그리고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국이라는 곳에서 진행자가 위험할수록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말했어……. 내, 내가 여기서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니⋯⋯.”
말을 잇는 동안 연달아 표정 변화를 보이던 패링턴은 이제야 뭔가 꿈에서 깨어난 듯 보였다. 점점 혼잣말처럼 넋을 잃고 중얼거리던 그가 몇 초간 감정을 가라앉힌 뒤에 덧붙였다.
“그 신문, 기억나. 아까 살려달라고 외치며 달렸을 때 어느 자동차 안에 있던 걸 챙겼었어. 나도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패링턴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혼란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내 양범구가 장목화를 보며 물었다.
“오하명이 이 사람한테 신문을 가져가게 한 이유는 뭘까?”
“돌아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어봐야지.”
장목화는 신문을 전술 배낭에 챙겨 넣었다. 지금 신문을 살피는 건 시간 낭비였고, 혹여나 신문을 읽는 데서 뭔가 또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일단 안전한 곳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
양범구도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 * *
이제 아홉 명이 된 일행은 더는 꾸물거리거나 우회하는 일 없이, 왔던 길을 따라 동굴 출입구로 향했다.
이동 중엔 취하기 쉬운 물자들은 놓치지 않고 전부 챙겼다. 특히 웨트 무리는 거리 양옆에 붙은 상점에 집중했다.
다들 상점에 들어가 마음에 든 물건을 챙기거나, 유리를 깨고 들어가 반짝이는 목표를 챙겼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일사불란이었다.
계속해서 걸어가는데, 갑자기 장목화의 시선이 옆쪽으로 향했다.
함께 시선을 돌린 용여홍은 간판이 바닥에 떨어진 한 상점을 발견했다.
“뭔가 있나요?”
백새벽이 물었다.
장목화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
“상점 입구에 스피커가 놓여 있어. 방금 무슨 기척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자신이 전류의 흐름을 감지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때,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에 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때리며 외쳤다.
“오하명이 확성기로 도와 전자 제품 수리에 관한 강연을 하려나 봐요!”
히익, 하고 숨을 들이킨 웨트가 이번에도 가장 먼저 나섰다.
“얼른 가자. 아무것도 들으면 안 돼!”
아직 전에 있던 일의 여파가 남은 패링턴은 더욱 불안해했다.
“그래, 그래.”
패링턴은 두려움을 간신히 억누르며 지난 일을 회상했다.
“어느 시장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식량을 찾았는데, 그때 사용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라디오 하나를 발견했었어. 마침 갖고 다니던 구세계 배터리를 넣으니까 딱 들어맞더라고. 이리저리 만져보니 진짜 사용도 가능하고.
그리고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국이라는 곳에서 진행자가 위험할수록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말했어……. 내, 내가 여기서 그렇게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니⋯⋯.”
말을 잇는 동안 연달아 표정 변화를 보이던 패링턴은 이제야 뭔가 꿈에서 깨어난 듯 보였다. 점점 혼잣말처럼 넋을 잃고 중얼거리던 그가 몇 초간 감정을 가라앉힌 뒤에 덧붙였다.
“그 신문, 기억나. 아까 살려달라고 외치며 달렸을 때 어느 자동차 안에 있던 걸 챙겼었어. 나도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패링턴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혼란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내 양범구가 장목화를 보며 물었다.
“오하명이 이 사람한테 신문을 가져가게 한 이유는 뭘까?”
“돌아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읽어봐야지.”
장목화는 신문을 전술 배낭에 챙겨 넣었다. 지금 신문을 살피는 건 시간 낭비였고, 혹여나 신문을 읽는 데서 뭔가 또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일단 안전한 곳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
양범구도 이의를 표하지 않았다.
* * *
이제 아홉 명이 된 일행은 더는 꾸물거리거나 우회하는 일 없이, 왔던 길을 따라 동굴 출입구로 향했다.
이동 중엔 취하기 쉬운 물자들은 놓치지 않고 전부 챙겼다. 특히 웨트 무리는 거리 양옆에 붙은 상점에 집중했다.
다들 상점에 들어가 마음에 든 물건을 챙기거나, 유리를 깨고 들어가 반짝이는 목표를 챙겼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일사불란이었다.
계속해서 걸어가는데, 갑자기 장목화의 시선이 옆쪽으로 향했다.
함께 시선을 돌린 용여홍은 간판이 바닥에 떨어진 한 상점을 발견했다.
“뭔가 있나요?”
백새벽이 물었다.
장목화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말했다.
“상점 입구에 스피커가 놓여 있어. 방금 무슨 기척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자신이 전류의 흐름을 감지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때,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에 쥔 베르세르크 돌격 소총을 때리며 외쳤다.
“오하명이 확성기로 도와 전자 제품 수리에 관한 강연을 하려나 봐요!”
히익, 하고 숨을 들이킨 웨트가 이번에도 가장 먼저 나섰다.
“얼른 가자. 아무것도 들으면 안 돼!”
아직 전에 있던 일의 여파가 남은 패링턴은 더욱 불안해했다.
“그래, 그래.”
용여홍도 동조했다.
이내 다시 전진하는데, 몇 걸음 나아간 장목화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처음에도 오하명은 게네……, 우리 로봇을 통제해 라디오 방송으로 위험할수록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반전하는 게 도의 움직임이라고 했었지? 근데 왜 우린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던 걸까?”
다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사이, 성건우가 불쑥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영향을 안 받았다뇨, 언제부터 그렇게 착각하신 거예요? 이 짧은 시간 동안 두 번이나 더 탐색한 게 정상인 것 같아요?”
순간 모두의 등줄기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근데 왜 진작 말 안 했어!”
장목화가 성건우를 노려보았다.
성건우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저도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물론 패링턴이 받은 것과는 달리 굉장히 약한 영향이었어요. 우리의 특정 경향을 살짝 강화한 것뿐이라, 자기 자신을 점검하는 것만으론 문제를 발견할 수가 없어요.”
용여홍은 성건우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뭐가 저렇게 당당해?’
곁에서 백새벽은 입술을 깨물며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오하명은 확실히 싸워 이길 수 없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