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준칙
거리를 빠져나간 순간, 장목화의 눈앞이 탁 트였다.
전방에 광장이 펼쳐져 있고 그 맞은편에 수십 층 높이의 검은색 빌딩 하나가 있었다. 빌딩 벽 일부는 부서진 상태고, 대부분은 녹색 덩굴 식물에 뒤덮여 있었다. 또 장목화의 예상처럼 이곳은 유해가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그때였다. 성건우가 검은 빌딩 전방의 땅을 가리켰다.
“저들 스타일은 좀 다른데요.”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시체 네다섯 구가 있었다. 전에 본 유해들과 달리 고도로 부패했을 뿐 아직 백골로 변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건가?”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중얼거렸다. 여기에서 ‘죽은 지 얼마 안 된’이라는 표현은 백골에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가서 보자고.”
양범구가 주도적으로 나섰다.
탁 트인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광장엔 큰 위험은 없을 것 같아서, 그레이, 웨트, 파르스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들보다 이 상황에 더 관심을 갖고 있던 구조팀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시체 근처에 이른 양범구가 눈썹을 꿈틀대며 한 시신을 가리켰다.
“저 사람 입은 거, 퍼스트 시티 공장 구역에서 생산되는 싸구려 셔츠야.”
셔츠는 그리 오래되지도 않아 보이는 데다 비밀 주머니도 여러 개 달려 있어 물건을 넣기 용이해 보였다. 딱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셔츠였다.
용여홍은 혐오감을 애써 참으며 그 시신을 살폈다. 이제야 고도로 부패한, 끔찍한 모습의 시신보다 백골이 몇 배는 더 낫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악취까지 콧속을 파고들어 구역감도 심각했다.
“기운 흔적도 없네. 산 지 1, 2년밖에 안 된 건가 봐.”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댄 채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쪼그려 앉은 장목화가 옷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셔츠에는 분명 뜯어진 부분이 있지만 그건 죽게 될 당시 생긴 것일 터였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그녀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흰 늑대한테 동굴 깊은 곳까지 끌려가 행방불명된 유적 사냥꾼들일까?”
“아마도요.”
백새벽이 숨을 꾹 참고 동조했다.
양범구 팀은 순간 멍한 얼굴이 됐다.
“실종된 유적 사냥꾼들은 이미 잡아 먹혔거나 구조된 거 아니었어?”
당연히 구조팀에게 목숨을 잃은 이들은 언급할 수 없었다.
그러자 용여홍은 실종자, 사망자, 생존자의 수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다수의 실종자가 흰 늑대를 따라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정보까지 공유했다.
웨트가 찬 숨을 들이마셨다.
“헉, 그 후에 여기 이르러서 잡아 먹힌 게 아니라 이렇게 죽은 거라고?”
아무래도 의심스러운 이야기였다.
“사인은 뭐지?”
양범구가 황급히 물었다.
턱을 만지작거리던 성건우는 장목화보다 앞서 고개를 들더니 옆쪽의 검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시신에 남은 흔적으로 보면, 저 빌딩 어딘가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
투신자살? 흰 늑대를 따라 동굴 깊은 곳에 들어간 유적 사냥꾼들은 13호 유적에 진입했고, 그중 일부는 이 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거란 말인가?
모두가 흠칫 놀랐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장목화가 성건우의 판단에 동조했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는 그녀의 얼굴엔 온통 물음표가 가득했다.
‘이 유적 사냥꾼들한테 무슨 일이 있었을까? 흰 늑대가 원한 게 뭐지?’
“누군가에 밀려 떨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 더 심층적으로 조사하고 투신 현장을 살펴보자.”
‘……그게 더 무서운데. 누가 이들을 민 거고, 민 이유는 뭐지?’
용여홍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가 밀려드는 악취에 움찔했다.
“들어가 볼까요?”
성건우가 웅장한 검은색 빌딩을 가리키며 물었다.
몇 초간 침묵하던 장목화가 답했다.
“이번에는 됐어. 미리 세워둔 준칙을 잊으면 안 되지. 지금은 주위 구역만 조사해보자.”
성급하게 심층적으로 들어가려 하지 말고 두 번째 탐색을 위한 기반만 닦는 것. 이는 탐사에 앞서 가장 먼저 세운 준칙이었다.
성건우는 못내 아쉽다는 듯 시선을 거뒀다.
이를 보고 용여홍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이번엔 고집 피우지 않아서.’
하지만 사실 용여홍도 친구 성건우가 타인의 말을 잘 듣고 계획을 잘 따르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내 양범구는 장목화가 여전히 처참한 시신들을 주시하는 것을 보고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코를 꼭 잡고 물었다.
“뭐 남아 있는 단서라도 있어?”
장목화가 답했다.
“모르겠어. 근데 우린 지금 카메라가 없어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세세한 걸 기억에 새겨두려는 거야. 나중에 좀 더 심층적인 분석을 할 수 있게.”
지금 같은 상황에는 시체를 심층적으로 살필 시간도 없었다.
장갑을 낀 장목화는 백새벽과 함께 시체의 상황을 빠르게 확인한 후, 그들이 가진 물품에 가치 있는 정보가 있을지 살폈다.
그리고 성건우는 양범구 일행을 주시했으며, 용여홍은 사방을 경계하며 혹시 당하게 될지 모를 습격에 대비했다.
그러는 동안 용여홍은 다시금 시신에서 풍기는 끔찍한 악취를 맡았다. 꼭 귀신 이야기 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이 유적 사냥꾼들은 흰 늑대에 매혹당해 동굴 끝에 자리한 폐허 도시로 들어왔으며, 모두 건물에서 투신해 죽었다. 그야말로 기이하고, 소름 끼치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들은 흰 늑대에 이끌려온 사람 중 일부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을까?
용여홍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녹색 식물에 뒤덮인 이 황량하고 고요한 도시 광장엔 알 수 없는 일이 무르익고 있는 것 같았다. 미지는 늘 알 수 없는 공포감을 안겼다.
장목화는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 빠르게 기본 검시를 완료했다. 그녀는 곧 장갑을 벗어 전용 비닐팩에 넣으며 일어났다.
“눈으로 봐서는 확실히 떨어져서 죽은 것 같아. 투신하기 전 이 사람들한테 정신이나 육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지는 알 수 없어. 휴, 이곳에서는 세세하게 해부할 수도 없으니.”
‘검시할 줄도 아나 보네.’
양범구가 흠칫 놀랐다. 그는 검시라는 단어조차 이전에 다른 폐허를 탐색하다가 찾아낸 어느 구세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물론 그들도 유적 사냥꾼이라 일상적인 모험 중에도 시신과 접촉하고 흔적을 살펴 사인을 판단하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검사는 매우 조악한 데다 그 어떤 체계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순전히 경험에만 의지한 행위였다.
시신이 총에 맞아 죽었는지, 예리한 흉기에 죽었는지, 야수 때문에 죽었는지, 혹은 격렬한 전투 도중에 죽었는지, 아니면 등 뒤의 누군가에게 습격당한 것인지 정도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장목화는 돌아가 좀 더 자세히 연구하려고 시신에서 찾은 물건들을 따로 챙겼다. 양범구 일행은 그녀를 저지하지도, 일부 수확을 나눠 가지려 하지도 않았다. 실종된 유적 사냥꾼과 황야유랑자 대부분은 고통스러운 생활을 했던 만큼 유의미하게 남아 있는 건 무기나 장기가 전부였다.
곧이어 양범구가 뻔히 보이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 사람들 총이 보이지 않네. 폐허 도시에 들어오기 전 흰 늑대 때문에 무장을 해제했거나 투신자살하기 전에 따로 다른 곳에 남겨둔 걸까?”
장목화는 고개를 들어 웅장한 검은 빌딩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들어가지는 말고, 주위만 한 번 돌아보면서 단서가 있는지 확인하자.”
“좋아.”
웨트가 가장 먼저 답했다. 그는 줄곧 기회를 노려 복수할 생각뿐이었다.
용여홍은 그런 그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레이와 파르스도 반드시 구세계의 비밀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서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들에게 구세계의 비밀은 돈을 벌고 원하는 물자를 교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는 다른 방법도 있고,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얻을 다른 수단도 있었으니, 굳이 모험할 이유가 없었다.
극소수를 제외하곤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안하고 안전한 걸 택하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런 선택을 해도 이윤에 큰 차이가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좋아.”
끝으로 검은 빌딩을 보던 양범구도 동의했다.
두 팀은 곧장 이곳을 에워싸고 옆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까악! 까악! 까악!
하늘 위 까마귀도 이동 중이었다.
이를 보고, 성건우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여기도 생물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네.”
‘이런 상황에 울리는 까마귀 울음소리……, 그 어떤 소리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들리는데.’
용여홍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때, 한창 잘 걸어가던 장목화가 멈춰 섰다.
백새벽은 장목화가 보는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조악한 솜씨로 만들어진, 거친 스타일의 가죽 부츠 한 짝을 발견했다.
진흙이 묻은 부츠는 비에 젖었다가 햇볕에 마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부근에 놓인 시신들이 신고있던 신발에 비하면 비교적 새것에 가까웠다.
용여홍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그 부츠 위쪽을 쳐다보았다.
가로수에 혀를 길게 내밀고 죽은 시신이 걸려 있었다. 극도로 과하게 부패한 시신은 바람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시신의 한쪽 발은 맨발, 반대쪽은 가죽 부츠가 신겨져 있었다.
부츠는 저기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약간 표정이 굳어진 양범구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부츠 가죽, 변이 생물의 가죽이야. 구세계 파괴전에는 없었던 거.”
즉, 가로수에 걸린 시신은 전에 실종된 어느 유적 사냥꾼이나 황야유랑자일 거란 뜻이었다.
‘저쪽에서는 투신자살, 이쪽에서는 목을 매 자살했다고……?’
용여홍은 이 한여름에 된서리를 맞은 양 오싹한 한기에 사로잡혔다.
곁에서 장목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생각이란 뜻을 밝혔다.
이내 성건우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느 변이 생물?”
양범구가 간단히 설명했다.
“각 대형 세력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일종의 변이 전기뱀장어야. 가죽은 뱀에 가깝고 생긴 건 큰 구렁이 같아. 동시에 고압 전류를 저장하고 방출할 수 있어 호수나 강 같은 곳에 매우 잘 어울리지.
대부분 애쉬랜드 혈통 유랑자들은 녀석을 용왕이라 부르고, 심지어는 제사를 지내면서 제물도 바쳐. 비교적 작은 녀석이라도 죽이긴 아주 힘들고.”
하지만 양범구는 그 변이 생물과 장목화의 능력을 연결 짓진 못했다. 장목화에겐 그저 특수한 전류 방출 장치가 숨겨져 있는 거라 생각할 뿐이었다.
성건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가로수를 올려다보았다.
“내려줘야 할까요?”
“시도는 해보자.”
장목화의 허락이 떨어지자, 성건우가 장갑을 끼고 바로 나섰다.
그동안 양범구 팀과 용여홍은 경계심을 높였다. 갑자기 시체가 벌떡 일어나거나 그 외의 다른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까 겁이 난 모양이었다.
시신은 곧 바닥에 내려졌고, 장목화는 간단한 검사를 시작했다.
양범구 팀은 주변의 차와 유해들 속에 가치 있는 물건이 있는지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목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을 매 죽었어.”
검사가 끝나자, 성건우가 길에 있던 구세계 비닐 차양을 끌어와 시신을 덮었다.
“너 꽤⋯⋯.”
양범구는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해 잠시 어물거렸다.
“정상이라고?”
“⋯⋯.”
성건우가 스스로를 평가한 말에, 양범구는 완벽히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