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99화 (399/649)

399화. 출구

간이 설비를 실은 소형 RC카 두 대가 속속들이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양범구 일행은 오래된 모델이긴 해도 제법 쓸만한 휴대용 컴퓨터를 꺼내더니, 전송된 화면을 통해 세세한 부분까지 진지하게 관찰했다.

하지만 화면은 수시로 버벅대기 일쑤였다.

장목화는 그 화면을 힐끗 보다가 결국 못 참겠다는 듯 전술 배낭에서 머신 헤븐산 최신형 휴대용 컴퓨터를 꺼냈다. 뒤이어 그녀는 그 컴퓨터를 게네바와 연결해 화면 투사까지 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양범구 일행의 표정이 좀 복잡해졌다.

“이 통로,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인공적으로 개조한 흔적이 있어.”

장목화가 컴퓨터 화면에 집중한 채 말했다.

화면 속 깊고 어두운 길은 어둠 속에 쭉 뻗어있었고 그 양쪽과 위쪽에는 가공된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폭은 그다지 넓지 않아요.”

용여홍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차로는 다닐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백새벽이 입을 열었다.

“예비용 통로일지도 몰라. 사람만 출입하는 용도로 만든 거지.”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아, 이건 통로 여러 개중에 하나일 뿐이니까.”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미 정식으로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흰 늑대가 평소 묵던 이 동굴은 인간들의 어느 프로젝트에서 기인했을 거라는 것.

다만 이것이 구세계 파괴전에 건립된 것인지, 아니면 퍼스트 시티나 다른 세력이 지난 몇 년간 비밀리에 만든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곁에서 성건우도 컴퓨터 화면을 지켜보며 RC카 조종에 한창이었다. 어찌나 신이 났는지 게네바에게 끼어들 기회도 주지 않았다.

최대 한계치까지 관찰을 마쳤지만 그곳까지는 매립된 폭약도, 다른 문제도 없었다. 두 팀은 곧 앞뒤로 서서 동굴 안으로 진입했다.

현재 이들의 차량은 동굴 밖에 남겨져 있었다. 두 팀은 서로의 차량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구조팀은 당연하게도 군용 외골격 장치와 무선 통신기 등의 가치 있는 물건은 차에 싣지 않았다. 누군가 차량 통째로 훔쳐 가기라도 한다면 때맞춰 그를 따라잡기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목화, 용여홍, 백새벽, 게네바는 각자 나무 상자를 하나씩 짊어지고, 각기 다른 무기까지 쥔 채 성건우의 뒤를 따랐다.

이를 본 양범구 일행은 잠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저 팀, 군용 외골격 장치를 세 대나 가지고 있는 거야? 어느 대형 세력에서 퍼스트 시티를 박살 내기 위해 보낸 녀석들인가? 이 동굴이 사실 저 사람들이 줄곧 노리던 목적지일까?’

어찌 됐든 구조팀의 장단에 맞춰 걸음을 옮기던 독행 사냥꾼 팀은 곧 구조팀과 함께 탐색을 마친 구역의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또 한 번의 정탐이 시작되었다.

* * *

비슷한 절차를 두 번 더 반복했을 무렵, 갈림길 하나가 나타났다.

손전등을 비춰 길을 살피던 장목화가 고개를 돌려 로엔을 쳐다보았다.

“너희들, 전에는 어느 쪽으로 갔었어?”

로엔은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왼쪽.”

역시 손전등으로 이곳저곳을 훑던 양범구가 물었다.

“여기서 찢어지는 게 어때? 시간을 아끼려면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너희가 먼저 골라.”

‘친절하기도 해라.’

용여홍은 호의를 베푸는 듯한 양범구를 보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이때 이미 동굴 깊은 곳에 진입해서인지 공기가 점점 싸늘해졌다. 더 이상 이곳을 한여름 온도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다 용여홍은 순간 무의식적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전진 캠프에 있을 때도 검은 가죽옷을 단단히 껴입고 있던 남자는 역시 몸을 떨고 있었다.

긴 팔다리, 튼실한 몸집과는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 사람, 정말로 추위를 많이 타는 모양이네.’

용여홍은 얼른 시선을 거뒀다.

지난 며칠 간의 접촉과 탐문을 통해 남자의 이름이 그레이라는 것도 이미 다 파악된 상태였다.

“좋아.”

잠시 고민하던 장목화가 양범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건우가 자원을 했다.

“제가 고를게요.”

“어느 쪽으로 가고 싶은데?”

양범구가 신중한 호기심을 빛냈다.

“하늘에, 달지기에 맡겨야지.”

씩, 웃던 성건우가 컨트롤러를 쥐지 않은 손을 주머니에 넣고 5카스 짜리 동전을 하나 꺼냈다.

장목화는 표정을 다잡으며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다.

사실 그녀 역시 성건우가 뭘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용여홍과 백새벽도 마찬가지였다.

게네바는 여러 가능성을 추론해냈으나 그중 어떤 것도 성건우답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겠다고?’

양범구 일행도 이 기이한 상황에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 바빴다.

다음 순간, 컨트롤러를 게네바에게 넘긴 성건우가 정말로 동전을 던졌다.

팅!

가벼운 소리와 함께 허공을 몇 바퀴 돌던 동전이 성건우 손에 안착했다.

“뭐가 나왔는지 볼까?”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동전을 덮은 오른손을 거뒀다.

“뒷면이니까 왼쪽!”

성건우는 말을 마친 즉시, 동전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왼쪽 길로 향했다.

구조팀원들은 약간 이상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이후 구조팀과 로엔의 손전등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양범구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정말 달지기에게 결정을 맡기다니. 어느 달지기의 신실한 신도인가?”

잠시 침묵하던 그레이는 추위에 이를 악문 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우리도 왼쪽으로 가는 건가?”

“아직은 그럴 필요 없지.”

양범구는 솔선하여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웨트와 그레이를 비롯한 넷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그 뒤를 따랐다.

* * *

왼쪽 통로 안.

성건우를 따라잡은 장목화가 그를 힐긋 노려보며 말했다.

“앞면이 나왔으면 오른쪽으로 갔을 거야?”

성건우가 웃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어요. 동전을 던지기 전에 뒷면이 어느 쪽을 뜻하는지, 앞면이 어느 쪽을 뜻하는지 얘기도 안 했었잖아요.”

‘그럴 줄 알았다.’

이미 눈치채고 있던 장목화는 못 말린다는 듯 눈동자를 굴렸다.

성건우는 그저 양범구를 비롯한 독행자들을 놀린 것일 뿐이었다.

뒤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흠칫 놀란 용여홍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는 진짜……. 달지기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 앞에서 그런 짓을 했다면 넌 꽁꽁 묶인 채 화형이라도 당했을 거다. 달지기에게 결정 맡기는 건 핑계고 그냥 네 마음대로잖아. 이게 신성 모독이 아니고 뭐야?’

그리고 내내 구조팀을 따르고 있는 로엔은 점차 이 팀의 팀원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없이 진지하고 또 조심스럽게 행동도 모자란, 이렇게나 위험한 상황에 농담할 정신이 있다니.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이내 장목화는 손전등을 쥐고 게네바의 뒤를 따라 대열을 이끌며 계속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엔이 말한 인간의 식량들이 쌓인 구역에 도착했다.

자세한 검사를 진행한 장목화는 생산 일자 등을 통해 식량들이 구세계에서 생산된 것임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진짜 구세계와 관련되어 있나 봐.”

그와 동시에 생물 전기 신호를 적잖게 느낀 그녀가 묵묵히 그 수를 헤아려 보다가 고개를 틀어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양범구 팀이네요.”

성건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수를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머지않아 또 다른 통로를 통해 양범구 일행이 느릿하게 걸어왔다.

그들도 구조팀을 봤지만, 조금도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바로 그때였다. 성건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어, 너희 왜 한 명이 줄었냐?”

순간 심장이 졸아든 양범구가 황급히 일행을 돌아보았다.

몇 번이나 거듭해 수를 세어봤지만 줄어든 사람은 없었다.

‘설마 실종된 동료가 기억에서 사라진 건가?’

양범구 일행이 혼란에 빠졌을 무렵, 성건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순간 성격 좋은 호인 양범구도 더는 참지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수습은 또 장목화가 나서서 하려는데, 성건우가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너희들한테 앞으로 기이한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고 경고해주고 싶었어. 특정한 사건을 잊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기록을 통해 중요한 정보를 남겨두는 게 좋을 거야. 이미 여기서 개과 생물의 배설물을 발견했어.”

이는 흰 늑대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양범구도 잠시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행을 돌아보았다.

“지금 상황을 간단히 기록해뒀다가 정기적으로 비교 한번 해보자.”

작업을 마친 뒤 다시금 출발한 두 팀은 때로는 나란히, 때로는 나뉘어서 나아갔다. 장목화와 게네바는 정찰용 RC카와 자체적인 칩에 의지한 결과, 이제는 지나온 길이 머릿속에 또렷이 그려졌다.

이를 통해 중복된 길을 배제한 무리는 곧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은 통로에 이르렀다.

이곳은 사람 손길이 닿은 흔적이 더욱더 선명했다.

지면에 콘크리트가 깔려 있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수시로 개과 생물의 배설물이 보였다.

게네바가 분석해보니, 배설물들은 모두 같은 생물의 것이었다.

아무래도 배설물의 주인은 흰 늑대일 가능성이 컸다.

“많이 먹는 만큼 많이 싸나 보네.”

성건우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모종의 의미가 내포된 말에 반대편에 자리해 있던 양범구 팀의 몇몇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 통로는 굉장히 길었다. 수시로 멈춰서 RC카로 전방 상황을 관찰하며 움직이다 보니 저녁이 다 되어서야 출구를 볼 수 있었다.

* * *

출구 밖은 잡초가 우거진 구세계 공원이었다.

경치가 꽤 괜찮은 인공 호수도 있었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 뜬 별들은 저 멀리 어둠에 잠긴 고층 건물들에 부딪혀 반짝이는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이곳은 역사 속 얼마나 오랫동안 묻혀 있었을지 모를 한 도시였다.

지금 용여홍은 터널을 지나 늪 1호 유적을 마주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당시 구시대 문명으로부터 받은 충격은 아직도 여운이 짙었다. 오래도록 차마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동료들을 돌아본 용여홍은 장목화가 미간을 찌푸린 채 밤하늘 별들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장목화는 현재 보조 칩에 의지한 간단한 계산으로 이곳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했다. 이내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게네바를 쳐다보았다.

“라디오 모드로 전환해줘.”

양범구 일행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고 있지만, 게네바는 바로 팀장의 분부에 따라 모드를 전환했다.

장목화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119.2 틀어줘.”

이는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국 방송의 주파수였다.

장목화는 지금 자신들이 이미 불모지 13호 유적에 진입한 것이라 추정하고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이 구세계 도시가 바로 불모지 13호 유적일 가능성이 유력했다.

장목화의 반응에 양범구 일행, 그리고 길잡이로 나선 두 생존자 모두 의아해했다. 그녀의 지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식견이 넓은 양범구는 빠르게 합리적인 추측에 들어갔다.

‘가까스로 통로를 통과해 동굴 밖으로 나와서 폐허 도시 하나를 발견했는데, 조심스럽게 사방을 관찰하고 살피는 게 아니라 방송을 듣겠다고?

이게 정상인이 보일만 한 반응인가? 혹시 이 팀에 이 시간에 반드시 어느 방송을 들어야만 하는 강박 같은 거라도 있나?

아니면 그 방송국은 이들 배후 세력이 설립한 거고, 방송을 통해 명령을 받으려는 건가? 아니면 이게 서시월이 치른 대가인가?’

한편 용여홍과 백새벽은 119.2 주파수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었다. 소리소문없이 미치는 무시무시한 영향을 직접 경험하진 않았으나 장목화와 성건우에게서 얘기를 전해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그건 퍼스트 시티 정규군이 지키는 불모지 13호 유적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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