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주요 임무
로엔에게 확실한 답을 들은 장목화는 나머지 경상자들을 슥 훑어보았다. 성건우에게 이 일을 맡겨 자신들의 빌런 이미지를 고수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경상자들이 몸을 파르르 떨며 다급히 외치기 시작했다.
“난 아무것도 몰라!”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장목화는 그 반응에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느릿하게 한숨을 뱉었다.
또한 그녀는 살아남은 인원들에게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애쉬랜드에 살면서 그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이 어딨다고. 우리 팀이 이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누군가의 복수를 두려워할 이유도 없어.’
구조팀은 이제 본격적으로 경상자들 상처를 제대로 처치했다. 전진 캠프의 의료 지원을 받을 때까지 버틸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산길은 걷기가 어려워 그들이 오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잠시 후, 전진 캠프 지원팀이 도착했다. 이들은 오자마자 바닥에 널린 시시신과 붉게 물든 흙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중 양범구와 웨트도 있었다.
장목화는 그들보다 앞서 입을 열었다.
“우리가 흰 늑대에 미혹된 사람들을 구했어.”
양범구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엄지를 치켜들었다.
멍한 표정의 웨트는 실종된 동료를 찾기 시작했지만 발견된 시신은 두 구뿐이었다. 그러다 지인 한 명을 찾았는지 바로 남은 동료들 상황을 물었다.
마찬가지로 흰 늑대에 통제당했던 유적 사냥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흰 늑대에게 잡아 먹혔어.”
그대로 표정이 굳은 웨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장을 청소하는 동안 부상자들은 무기와 휴대 용품만 챙겼을 뿐, 나머지 물건들은 전부 구조팀에게 넘겼다. 전진 캠프의 지원팀도 남은 물건들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았다. 덕분에 그 모든 게 구조팀의 전리품이 되었다.
* * *
전진 캠프로 돌아온 후엔 장목화도 치료는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팀원들을 주차장으로 소집했다.
“하……. 이제 웨트가 어떻게 도망친 건지 알겠네. 그 늑대가 한 번에 매혹할 수 있는, 혹은 통제할 수 있는 사람 수는 한계가 있어. 그래도 그 총량은 꽤 큰 것 같아. 늑대에게 복종하는 소형 군대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잠시 머뭇거리던 용여홍이 입을 열었다.
“로엔의 말을 들어보면 매혹된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로엔은 그 흰 늑대에 그렇게까지 강력한 점유욕이나 서, 성욕을 느끼지는 않았대요. 늑대의 매력에 복종심을 표한 것뿐이죠.”
성건우가 자신의 가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쩌면 일종의 심령 통제일지도 있겠네요. 안타깝게도 저는 대머리가 아니라 그에 대항할 수가 없어요.”
장목화는 성건우의 말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야. 우리 준비에 뭔가 오차가 있었어 봐.”
구조팀이 전에 추리 광대 능력으로 강화한 인지는 흰 늑대에게 홀리지 않는 것에 집중돼 있었다.
백새벽이 얼른 덧붙였다.
“어떤 생존자들은 자기들이 흰 늑대를 너무 좋아해서 늑대를 위해 일하고, 늑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고 했어요.”
“매혹과 통제를 동시에 겸비한 건가? 인간 각성자처럼 한 가지 능력만 가진 게 아닌 걸까?”
장목화가 중얼거렸다.
사실 그녀의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때, 성건우가 주먹 쥔 오른손으로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낭비가 심하네!”
정말 그런 거라면 두 종류 능력엔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장목화는 흰 늑대 상황에 대한 추측을 이어가다가 돌연 가장 큰 문제를 언급했다.
“있잖아, 그 동굴이 엄청나게 크잖아? 어쩌면 다른 출구는 수 킬로미터, 심지어 십수 킬로미터 바깥에 떨어져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 그 안에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대량으로 구비되어 있다고 했어. 혹시 연상되는 거 없어?”
‘뭐지?’
용여홍이 마땅한 답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이,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회사요.”
거의 동시에 백새벽도 답했다.
“지하 방주요.”
“맞아.”
게네바도 동조했다.
장목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동굴, 혹시 구세계가 파괴되기 전에 인간들이 준비해놓은 피난처나 비밀 기지 같은 거 아니었을까? 거기 다른 출구는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
그러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 흰 늑대, 자연적으로 나타난 변이 생물이 아니라 실험 산물인가?”
그 실험은 동굴 깊은 곳, 혹은 동굴에 난 여러 출구 중 한 곳과 연결된 비밀 기지에서 이루어졌을지 몰랐다.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성건우는 입을 쩍 벌리며 호응했다.
“아우!”
장목화는 몇 초간 멍하게 있다가 성건우가 포효한 이유를 깨달았다.
흰 늑대와 늪 1호 유적 그 비밀 실험실의 괴물. 둘은 뭔가 다른 듯하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풍겼다.
“휴, 늪 1호 유적에 근거해보면 이건 어쩌면 구세계 파괴의 비밀과 연루돼 있을지도 몰라.”
장목화는 말을 잇는 동안 점차 흥분했다.
이것이 바로 구조팀의 주요 임무이기 때문이었다.
‘팀장님, 그러니까 좀 무서운데요.’
용여홍은 흥분한 장목화를 잠시 외면했다.
게네바 역시 사명감을 느끼는지 금속 목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로엔이 다 나으면 다른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호응하려던 장목화는 순간 이곳과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느꼈다.
가무잡잡한 편인 피부에 기운 흔적이 남은 검은 긴팔 티셔츠, 짙은 파란색 컨버스 바지. 양범구였다.
구조팀 옆으로 다가온 양범구는 한담을 건네듯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수확한 그 물건들, 처리 좀 도와줄까? 보아하니 너희들한테는 쓸모가 없을 것 같던데.”
장목화가 어떤 대꾸도 하기 전, 성건우가 동정심 어린 빛을 보였다.
“너, 갈아입을 옷도 없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라면 장목화도 성건우를 타박했을 터였다. 하지만 대상은 양범구였다. 그래서 그녀 역시 미소를 지으며 양범구를 지켜만 봤다.
세상 어디에 떨어진다 한들 먹고 사는 것쯤은 걱정도 없을 독행 사냥꾼에게 옷과 먹을 것이 부족하다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잠시 멍한 표정을 드러내던 양범구가 곧 난감하다는 웃음을 보였다.
“같은 디자인의 상의랑 하의가 세 벌씩 있거든.”
성건우는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취향이 독특하네.”
‘……취향이라니! 습관이지.’
양범구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장목화도 그제야 웃으며 양범구의 첫 번째 질문에 답했다.
“그 물건들, 오레이로 바꿀 수 있으면 좋겠는데. 한 몫 톡톡히 챙겨줄게. 안 되겠다면 손 떼도 돼. 퍼스트 시티에 우리가 아는 루트도 있어서.”
구조팀이 이번에 수확한 물건들은 죽은 유적 사냥꾼들의 것으로 총기와 탄약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무기는 애쉬랜드에서 언제나 돈으로 바꿀 수 있는 물건이었다. 블랙셔츠파라면 분명 그런 물건들로 빚을 갚는 것을 환영할 터였다.
많지는 않아도 빚을 갚아야 하는 구조팀 입장에선 한 푼도 귀했다.
유일하게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무기와 탄약이 적잖게 공간을 차지해서 구조팀이 자체적으로 옮길 수 있는 양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양범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오징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오는 법이잖아. 내가 처리 도와줄게. 생존자들 말 들어보니까 흰 늑대가 동굴로 도망갔다던데. 엄청나게 큰 동굴 안에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대량으로 구비돼있고 출구도 많다고.”
장목화는 정면으로 호응하는 대신 한마디 덧붙였다.
“그중 한 출구는 이미 폭파됐어. 동굴 안의 여러 구역도 무너졌을 거야.”
뒤이어 성건우가 양범구를 보며 무슨 연기라도 하듯 말했다.
“당당한 사람은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다고. 정확하게 뭘 원하는 거야?”
그는 강조를 위해 특별히 애쉬랜드어까지 사용했다.
그러자 양범구가 웃었다.
“너희라면 이미 알아차렸겠지, 그 동굴에 적잖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란 거. 어쩌면 그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지로 연결돼 있을지 몰라. 그런 비밀을 찾는다면 늑대 자체의 가치를 뛰어넘는 어마어마한 수확이 있을걸?
하하, 동굴을 탐사하다 보면 그 변이 생물의 기이한 매력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을 테고. 그래서 말인데, 며칠 후에 몇몇 친구들이랑 함께 탐색해볼 생각인데, 너희도 함께할래?”
그는 구조팀과의 합작을 원한다는, 충분한 선의를 내보이고 있었다.
장목화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우리 역시 그럴 계획이었어. 근데 모두가 함께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우리가 원하는 건 많지 않아. 존재할지 모르는 충분한 자료를 원하는 거지. 너희한테 복사본을 나눠줄 의향도 있어.
하하, 거기 물자랑 정보는 확실히 적지 않을 거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장목화는 양범구 일행과는 합작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또 정보 공유의 문은 개방적으로 열어두겠다는 태도를 표명했다. 한마디로 선을 넘지만 않으면 갈등을 일으키진 않겠다는 의미였다.
양범구는 웃음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유적이라면 1년 반을 들여도 다 비워지지는 않을 테니까.”
양측은 이렇게 암묵적인 협약을 맺었다.
양범구는 다시 성 본채를 돌아보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생존자들을 억압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한테 있던 일은 다 비밀로 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오로지 실력으로만 모두를 복종시켰다고.”
장목화는 웃으며 작은 탄사를 내뱉었다.
“아이고, 워낙 정신이 없던 상황이라 그러는 걸 잊었네.”
양범구는 그런 그녀를 빤히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난 이미 너희를 위해 수를 써뒀어. 안 그랬으면 캠프 내 주둔군이 상황을 알아차리고 퍼스트 시티를 관여시켰을 거야. 그들의 정예팀은 너희보다 절대 약하지 않거든.”
“고마워.”
장목화가 진심으로 웃었다.
그 후로 양범구는 몇 마디 한담으로 마무리한 뒤 본채로 돌아갔다.
용여홍은 멀어지는 양범구를 눈으로 좇다가 장목화를 돌아보았다.
“팀장님, 왜 생존자들한테 경고하지 않은 건가요?”
장목화도 용여홍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런 곳에 어떤 비밀이, 어떤 위험이 숨겨져 있을지 누가 알겠어? 그러니까 저런 강력한 독행자와 퍼스트 시티 정예팀이 먼저 길을 더듬어 보게 하면 우리도 좋잖아? 결과적으론 우리도 도움받는 거지.
대형 부대는 산에 못 들어와. 목표 지점에서 어마어마한 비밀이 폭로되기 전까지는 누구도 우리 탐색을 저지할 수 없고. 휴, 안타깝게도 양범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용여홍은 매력적으로 웃는 장목화가 꼭 지하의 제왕처럼 느껴졌다.
평소답지 않게 박수를 생략한 성건우는 지금 보니 코스 술집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한쪽 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눈치도 주었다.
“저녁 먹을 시간 다 됐네.”
그 뜻을 알아차린 장목화가 고개를 들어 하늘의 색을 살폈다.
이때 또 하나의 인영이 구조팀의 차로 다가왔다.
모든 동료를 잃은 게 확실해진 웨트였다.
수염을 깔끔히 면도하고 황갈색 머리카락도 정갈히 빗어넘긴 웨트는 전보다 훨씬 말쑥해 보였다.
이내 근처에 다다른 웨트가 구조팀을 향해 진지하게 예를 갖췄다.
“고마워.”
장목화가 눈썹을 추켜 올렸다.
“네 동료 둘이 우리 손에 죽었어.”
웨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처음엔 너희가 미웠어. 그들을 가차 없이 죽여버렸다는 게 원망스러웠어. 근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너희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겠더라고. 누가 뭐래도 내 안전부터 보장하는 게 먼저잖아.
범구 말이 맞아. 정말로 그들을 두렵게 한 건 그 흰 늑대지, 너희가 아니야. 복수를 하려면 진짜 원수가 누구인지부터 확실히 해야지.”
그러자 여전히 배를 움켜쥔 성건우가 덧붙였다.
“그래, 우리 애쉬랜드인 사이에 이런 속담도 있잖아. 빚에는 빚쟁이가 있고, 원한에는 상대가 있다.”
장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너처럼 이성적이었으면 좋겠다.”
웨트는 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대신 화제를 전환했다.
“내 동료들 유품도 전리품으로 챙기지 않고 나한테 돌려줘서 고마워. 동료들 가족을 대표해서도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어.”
현장을 청소하던 당시 장목화는 살아남은 이들에게 죽은 동료의 물건을 챙기도록 시간을 주었다. 그렇게 챙길 사람이 없는 물건만 전리품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죽은 이를 동료라 거짓으로 자처할 사람도 없었다.
이내 용여홍이 끼어들었다.
“그 유품들, 주인의 가족들한테 꼭 돌려주길 바라.”
웨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내일 여길 떠나 유물들을 돌려줄 거야.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범구를 비롯한 일행들이랑 그 동굴을 같이 탐색해보려고.”
“행운을 빌어.”
장목화도 아낌없는 축복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