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앞잡이
공포와 혼란이 뒤범벅된 로엔은 아예 공황에 빠져버린 듯했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늑대는 정기적으로 한 사람씩 먹어. 내 동료 둘도 그렇게 죽었어. 근데 당시엔 아무런 감정이 없었어. 괴롭지도, 슬프지도 않았어. 그냥, 주인님이 만족했다면 그걸로 됐다는 생각만 들더라고.”
이 순간 용여홍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앞잡이.
유적 사냥꾼들이 목숨도 아끼지 않고 공격하던 모습을 생각하니, 추측엔 더더욱 힘이 생겼다.
동시에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한 용여홍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물었다.
“흰 늑대를 맞닥뜨렸을 때 네 동료는 매혹되었지만 넌 아무런 문제도 없이 돌아서서 도망쳤었다고?”
“응.”
로엔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앞에 있는 사람들은 능력 범위에 들어간 거고, 로엔은 거기서 한두 걸음 떨어져 있었던 건가?’
“그때 너 대열 맨 뒤에 있었던 거야?”
용여홍이 캐물었다.
“난 중간에 있었어.”
로엔의 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건 차으뜸의 매혹과는 분명히 달라. 잠깐만, 방금 팀장님이랑 건우도 그렇게 얘기했었잖아.’
황급히 무전기를 든 용여홍이 이 상황을 팀원들에게 알렸다.
* * *
장목화가 무전을 받던 그 시각, 그녀는 성건우와 함께 백새벽, 게네바가 설명한 그 동굴에 도착해 있었다.
매우 은밀한 곳에 자리한 이곳은 거대한 바위 몇 개와 주위 환경에 가려져 아예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만약 흰 늑대를 쫓아오지 않았더라면 게네바라도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 같았다.
“부근에 다른 출구는 없어.”
방금 막 주위를 둘러보고 온 게네바가 말했다.
뒤이어 동굴 입구를 지키고 있던 백새벽이 덧붙였다.
“늑대도 나온 적 없고요.”
그리고 백새벽은 끝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동굴 안쪽을 들여다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안에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까 무턱대고 들어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래, 너무 깊다. 일부 구역은 이미 내 탐측 범위도 벗어나 있고. 근데 이미 탐측한 부분은 모두 다 정상이다.”
게네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갑자기 대지가 진동했다.
심지어 온 산이 다 몇 번 흔들렸다.
콰르릉!
묵직하고 무시무시한 소리도 동굴 안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구조팀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동굴 천장 바위가 무너져 내리며 입구를 막아버렸다.
장목화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내 상황이 좀 안정된 것을 보고 그녀가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동굴이 완전히 무너진 건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백새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와 겐이 무작정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랬더라면 꼼짝없이 그 안에 묻혔을 터였다. 아무리 게네바 같은 똑똑한 지능인이라도 그건 치명적인 위험이었다.
장목화는 찬찬히 상황을 추정해보았다.
“그 흰 늑대가 한 짓일까? 어느 정도 생각이 있으니까 일단 다른 출구로 도망친 후에 모종의 방식으로 동굴 안에 미리 설치해둔 폭약을 터뜨린 거지. 자기가 생각하기엔 직접 해결할 수 없는 적인 겐을 처리하려고 한 건가?”
역시 생각에 잠겨있던 성건우가 말했다.
“다른 가능성도 있어요.”
“뭔데?”
성건우의 표정이 좀 슬퍼졌다.
“너무나 거만한 그 흰 늑대는 우리 때문에 출구 없는 이곳에 갇히게 돼서 미리 준비해준 폭약을 터뜨린 거죠. 인간의 장난감이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자기 자신을 이 동굴에 묻어버린 거예요.”
“거참 대단한 절개네.”
맥이 빠진 장목화는 한숨을 내쉰 뒤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자, 이제 두 조로 나눠서 다른 출구가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하자. 깊은 동굴이잖아. 어디로 통해있는지 누가 알겠어?
방금 작은 빨강이가 얘기해준 거랑 종합하면 그 흰 늑대 능력은 매혹과 비슷하긴 해도 분명히 달라. 목표의 수에 제한이 있을 가능성이 크고 사실상 앞잡이를 만드는 능력에 가까울 거야.
음, 그동안 그 유적 사냥꾼들은 늑대를 따르면서 뭘 먹고 마셨을까? 직접 사냥했나? 그렇게 많은 인원이면 매일 사냥해야 배를 불릴 수 있었을 텐데. 그 큰 기척은 어떻게 숨겼지? 양범구 같은 강력한 사냥꾼도 있는데.”
우선 장목화는 남은 앞잡이들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믿고, 용여홍에게 연락했다. 이제 다른 출구를 찾아 이동하다 보면 거리가 벌어져 무전기를 쓰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 * *
용여홍과 몇 마디 한담을 나눈 뒤 로엔이 부탁했다.
“신호탄을 쏴서 전진 캠프에 도움을 청해도 될까? 내 상태는 나름 괜찮지만, 다른 녀석들도 얼른 치료해야 할 것 같아서.”
그의 말대로 그는 운이 꽤 좋은 편이었다. 총알이 갈비뼈를 스치며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자연히 흰 늑대에게서 멀어지며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무기를 버리고 바닥에 엎드려 투항 자세를 취한 덕분이었다.
팀장의 분부를 떠올린 용여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상황이니만큼, 그는 전진 캠프의 지원자가 나쁜 마음을 먹고 있을 것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을 해치우지 못할 이유도, 그들에게서 도망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이윽고 로엔이 신호탄을 쏘아 올린 순간, 대지의 진동을 느낀 용여홍이 의아한 얼굴로 굉음이 울린 곳을 돌아보았다.
이내 진동이 가시자 그가 로엔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모르겠어.”
로엔도 못지않게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어서 용여홍은 부상자들과 시신이 널린 주위를 한번 훑어보다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 후, 용여홍이 천천히 입을 뗐다.
“너, 우리가 밉지 않아?”
로엔이 웃었다.
“응? 왜 미워? 그런 상황이면 나도 미쳐버린 적을 공격했을 거야. 그런 사람들까지 생각해주면 내가 죽는 거잖아.
하하, 살아남았다면 무조건 너희한테 감사해야 하고, 죽은 녀석들이 원망할지 어쩔지는……. 신경 쓸 문제도 아니지. 죽은 사람들의 동료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 동료는 이미 흰 늑대에게 잡아먹혔거나 산속에서 죽었거든.”
고개를 틀어 바닥 가득한 시신과 부상자들을 힐긋 살피던 용여홍은 밥의 동료도 이미 다 죽은 것을 확인했다.
이를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슬프게 여겨야 할까.
이때, 무전기로 장목화의 분부를 들은 용여홍이 곧장 로엔을 돌아봤다.
“그 흰 늑대를 따를 때 말이야, 어떻게 살았어? 그러니까 내 말은, 뭘 먹고 어떻게 생활했냐는 거야.”
기름지고 더러운 갈색 머리의 로엔이 찬찬히 기억을 더듬었다.
“늑대를 도와 사냥을 했어. 늑대가 먹고 남긴 게 우리 몫이 됐지. 근데 남는 게 많이 없었어. 매번 사냥으로 얻을 수 있는 사냥감엔 한계가 있었고, 흰 늑대를 따르는 사람은 아주 많았으니까.
보통 우리는 흰 늑대를 따라 한 동굴에 들어갔어. 거기 깊은 곳에 식량이 많더라고. 통조림, 깡통 햄, 비스킷, 무슨 튀김 등 각양각색의 구세계 음식들. 기본적으로는 다 유통 기한이 지난 것들이지만 먹을 수는 있었어. 별문제도 없었고.”
‘그 동굴 안에 구세계 인간들이 먹던 식량이 대량으로 있었다고?’
이는 매우 비정상적인, 정말로 부자연스럽고 기이한 일이었다.
용여홍은 계속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 동굴에 출구가 몇 개나 되는지 알아?”
“엄청 많아. 분명 하나는 아니야. 우리가 이용했던 것만 해도 3개인데? 뭇 산 각기 다른 곳에 나 있어. 하하, 그 동굴이 진짜 크거든. 어쩌면 산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을지도 몰라.”
용여홍은 얼른 이 정보를 팀장에게 전달했다.
원래는 나머지 두 출구가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지만, 로엔도 북안 뭇 산에 처음 온 유적 사냥꾼으로 이쪽 지형에 밝지 않았다. 직접 가보자고 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말로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곧이어 장목화, 성건우, 백새벽, 게네바가 돌아왔다. 전진 캠프 지원팀보다 더 빠른 도착이었다.
로엔을 포함한 경상자들은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한 백새벽과 검푸른 군복을 입은 게네바를 보고 모두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구조팀의 실력이 그들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실감한 탓이었다.
조금 전엔 정상이 아니었던지라 뭐 하나 제대로 관찰한 게 없었다. 무엇보다 게네바는 처음부터 흰 늑대를 쫓아 가버려서, 유적 사냥꾼들도 로봇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백새벽이 착용한 군용 외골격 장치도 큰 충격을 안겼다.
퍼스트 시티와 비교적 관계 깊은 유적 사냥꾼은 심지어 강도단이라 해도 폐기 처분된 구형 군용 외골격 장치야 종종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용여홍도 군용 외골격 장치를 착용하고 있는데, 백새벽도 군용 외골격 장치를 입고 나타났다. 그것도 구형도 아닌, 신형의 장치를.
군용 외골격 장치 두 대와 로봇 하나, 이 정도면 전진 캠프를 통째로 공격해 그곳을 가뿐히 점령할 수도 있었다.
물론 정말로 그게 목표라면 강력한 독행자 몇몇과 암묵적 약속을 맺고 모종의 협의를 달성해야 했다.
“이제 장비 벗어. 배터리 아껴야 하니까.”
지시를 내린 장목화가 로엔을 돌아보았다.
“혹시 우리한테 다른 출구로 안내해줄 생각 있어? 널 정식으로 고용할게.”
로엔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많이 있어! 당연하지!”
고용은 무슨, 무급으로 부려 먹어도 당연히 따라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다 로엔이 또 살짝 얼굴을 찡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이틀만 쉬어도 될까? 지금은 걸을 때마다 통증이 느껴져서.”
“그럼, 우리도 좀 쉬고 상황을 관찰해야 하니까.”
부드럽게 답한 장목화가 돌연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넌 방금 군용 외골격 장치 두 대, 그런 건 하나도 못 본 거야. 그렇지?”
순간 바르르 몸서리를 친 로엔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못 봤어! 하나도 못 봤어! 아무것도 못 봤어!”
사실 장목화는 이 일을 크게 개의치도 않았다. 정말로 신경이 쓰였다면 직접 경고하는 대신 성건우를 시켜 상대를 설득하게 했을 터였다.
전진 캠프에 구조팀이 군용 외골격 장치를 두 대나 가지고 있다는 비밀이 드러난들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누가 감히 그걸 훔치려 들겠는가.
설령 마음이 동한 이가 있다 한들 행동에 나서기 전, 정말로 자신에게 그만한 실력이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했다.
강력한 독행자라도 게네바를 제압할 실력이 없다면, 그까짓 탐욕 때문에 구조팀과 갈등을 빚으려 하지는 않을 터였다.
설혹 또 로봇을 제압할 수 있는 극소수의 실력자가 있다고 해도, 군용 외골격 장치를 두 대나 마련한 데다 로봇도 있는 팀에게 또 다른 비밀 병기나 강력한 뒷배가 없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했다.
그러니까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 해도 돌아오는 건 고작 다른 이들의 존경과 경외심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구조팀이 경계해야 하는 건 두 가지뿐이었다. 첫째는 마침 산에 들어와 이 소문을 들은 퍼스트 시티 정규군 정예팀이었고, 둘째는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 연합한 독행자들이었다.
전자는 경계할 수 있고 후자는 양범구를 통해 접촉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