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92화 (392/649)

392화. 억압과 방종

백새벽이 다시 반대편으로 순찰하러 떠나자, 여전히 웃통을 벗고 있던 젊은 남자가 용여홍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차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열린 차 문에 한 손을 걸치고, 다른 한 손으론 턱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네 여자친구 진짜 쿨하네.”

“뭐, 그렇지⋯⋯.”

용여홍이 대충 얼버무렸다.

젊은 남자가 계속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아프라 말이 맞아. 우리 유적 사냥꾼들은 사치스럽게 내일 같은 건 기대할 수 없잖아. 아직 살아있는 동안 최대한 많은 것들을 누려야 죽더라도 아쉬움도, 후회도 없지.”

그러다 백새벽이 이쪽으로 돌아오는 걸 보고, 남자가 바로 정색을 했다.

“이름이 뭐야? 난 밥이라고 해.”

“고지용.”

용여홍은 계속 매너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

“너희 애쉬랜드인들 이름은 정말 복잡해. 그냥 지용이라고 부르면 되지? 방금 왔다고 했지? 흰 늑대를 잡으려는 거야?”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밥이 웃으며 말했다.

“응.”

용여홍이 간결하게 답했다.

“행운을 빌어. 우리한테도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고. 우리도 그 흰 늑대를 잡으러 왔어. 걸린 보수가 어마어마하잖아. 이 임무만 완수하면 우리 중 몇몇은 더 이상 유적 사냥꾼 일을 하지 않아도 돼.

퍼스트 시티에 있는 논밭을 사서 안착하면 되겠지? 그럼 더는 굶주림과 추위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우리 부모님도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지. 내 여동생이랑 남동생도 전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고.”

기대 가득한 눈빛의 밥은 굉장히 말이 많은 성격이었다. 그렇게 절로 밥의 양친이 살아계시고 여동생, 남동생도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그러자 친근감을 느낀 용여홍은 저도 모르게 걱정을 드러냈다.

“이거 아주 위험한 임무야.”

“나도 알아. 길드와 다른 유적 사냥꾼들한테 정보를 얻었어. 근데 내 나름대로 비교하고 검증해서 이미 괜찮은 방안을 마련해뒀어.

하하, 구체적으로 어떤 방안인지는 말해줄 수 없는데 핵심 요점은 너희도 잘 알 거야. 거리를 유지하고 총으로 녀석의 숨통을 끊는 거. 내 사격술 꽤 괜찮은 편이거든.

사실 이 임무를 완수해서 대량의 논밭을 갖게 되도 난 계속 유적 사냥꾼으로 살 거야. 대신 임무를 맡지는 않고 매해 짬을 내 이런 캠프에 방문하면서, 고생하는 여자들을 몸으로 위로해주는 거지.”

자부심 넘치는 밥은 용여홍이 뭘 물을 새도 없이 알아서 자문자답하며 말을 끝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말에 용여홍이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겨, 결혼할 생각은 없어?”

“응? 뭐 하러? 많은 경험을 하는 게 좋잖아.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무엇보다 난 이런 고난의 시대에 아이를 낳고 싶지도 않아. 뭐, 앞으로 내 삶이 무사 평탄하다면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밥은 솔직하게 답했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용여홍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넌 지금도 알아서 하룻밤 사면서 잘 살잖아. 근데 왜 굳이 계속 유적 사냥꾼 노릇을 하려는 건데?”

밥이 소리 내 웃었다.

“그럼 돈이 들잖아. 음,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중요한 건! 난 상대도 함께 즐기는 관계를 좋아한다는 거야. 여기선 여자를 안는 데 돈이 안 들어. 여자도 날 즐겁게 하고, 나도 여자를 즐겁게 해줘. 상대에게 만족과 여유, 위안을 얻는 거야. 그러면서 난 상대가 날 필요로 한다는 걸 느껴.”

처음 본 사람과 언쟁할 이유도 없으니, 용여홍도 그쯤에서 말을 그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쪽에서 밥의 동료들이 다가왔다. 여자 하나, 남자 둘로 이뤄진 무리는 모두 만족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중 남자 하나는 여자와 짝인 게 분명해 보였다.

그들이 순서대로 휴식을 취하는 사이, 백새벽은 순찰 중인 용여홍과 스치는 순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적 사냥꾼 대부분이 저래. 소수의 몇몇만 그러지 않을 뿐이지.”

무의식적으로 너도 그랬느냐고 물으려던 용여홍은 백새벽이 과거 독행자처럼 로봇과 지내며 가끔만 다른 이들과 팀을 이뤄 다녔다는 말을 떠올렸다.

“이게 애쉬랜드지.”

용여홍이 백새벽에게 대꾸했다.

억압과 방종이 혼재하는 곳.

백새벽은 밥 일행 차를 힐긋 보며 덧붙였다.

“저 남자 말이 그럴듯하게 들려도, 여자 유적 사냥꾼 대부분은 돈이나 물자를 받아. 남자가 시간을 들여가면서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나 아니면 외모나 입담이나, 뭔가 마음이 통하는 것으로 감정을 쌓지 않는 이상에는.

그러니까, 사실 남자 유적 사냥꾼은 욕망을 풀기가 어렵잖아? 차라리 어느 정도 돈이나 물자를 모은 후에 위드 시티처럼 사냥꾼 길드가 설립된 거점에 가서 창녀를 찾는 게 훨씬 편할 거야.

그리고 여자 유적 사냥꾼은 자유롭기 위해 안전을 꼭 보장해둬야 해. 근데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는 사람들도 있지.

그중에 적잖은 사람이 사실 같은 팀 내의 남자랑 고정적인 관계를 발전시켜나가길 원해. 가까운 곳에 안정적인 지지자이자 믿을만한 보호자를 둔다면, 그런 방면으로의 안전 문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

“뭐?”

용여홍이 멍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사이 백새벽은 마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모든 건 생존을 위한 거야. 즐기면서 돈과 물자, 지지자를 얻는 걸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 * *

여러 정보를 얻으며 어느 정도 흰 늑대의 활동 패턴을 파악한 구조팀은 한 매복 지점을 선택했다. 사실 매복이라는 건 좋은 허울일 뿐, 그냥 스스로를 미끼 삼아 그 교활한 사냥감을 낚으려는 계획이란 소리였다.

이제 흰 늑대는 멀찍이서 조용히 우회해 구조팀 뒤로 돌아왔다가, 매혹되지 않은 사람들과 로봇을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동시에 편리와 안전을 위해 장목화는 차로 도착 가능한 장소를 택했다.

그렇게 전진 캠프를 벗어나 어느 산길에 접어든 구조팀은 밥 일행의 요란한 차를 마주쳤다.

밥은 바로 차창을 내리더니 그들을 향해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행운을 빌어! 살아남아야 해!”

“너희도!”

말을 나눈 건 용여홍이었지만, 정작 호응은 성건우가 했다. 심지어 오랜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듯 너무도 밝은 인사였다.

두 일행은 앞뒤로 서서 한참을 나아가다가 어느 갈림길에서 갈라졌다.

밥의 무리는 구조팀과 행동 방안과 목적지가 확연히 다른 모양이었다.

“최대한 빨리 흰 늑대를 처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야 저런 녀석들이 더 이상 죽지 않을 테니까.”

장목화가 운전하며 말했다. 동료를 모두 잃은 웨트를 생각하는 듯했다.

“늑대를 최대한 잘 설득해보세요. 얌전히 우리한테 잘 잡히게.”

진지한 성건우의 말에 장목화는 저항 없이 웃음이 터졌다.

“넌 늑대랑 말이 통해?”

그 말을 하기 무섭게, 장목화는 갑자기 검은 늪에서 포효에 응답하던 성건우가 떠올랐다.

“손동작을 하나 개발하긴 했는데 녀석이 알아들을지 모르겠네요.”

다행히 성건우도 이번엔 그 방법을 택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하⋯⋯.”

장목화가 느릿하게 숨을 토해냈다.

* * *

산길을 달리긴 쉽지 않았다. 구조팀은 대략 3시간이나 지나서야 예정된 매복 지점에 진입했다.

차를 숨겨놓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모습을 숨긴 팀원들은 점심 때쯤 깨끗한 개울물을 마시러 이곳을 지나친다는 흰 늑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 M-45형 신형 군용 외골격 장치는 백새벽만 입고 용여홍과 같은 은신처에서 대기했다.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때가 되어 사냥감이 달아난다면 그녀는 게네바와 함께 체포를 담당할 예정이었다.

현재 장목화와 성건우는 다른 곳에 숨어 있고, 게네바는 혼자 한 곳을 맡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 습격당했을 때 단번에 몰살당하지 않도록 다들 최대한의 거리를 두고 떨어진 상태였다.

목표는 변이 생물이지만 그래도 장목화는 전술 가이드에 나온 규정을 엄격히 준수해 배치를 철저히 했다. 동시에 개과 생물인 흰 늑대의 예리한 후각을 고려해 팀원들에게 모기 기피제를 바르지 않도록 지시했다.

미끼의 본분은 발각당하는 것이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며 어떠한 결점도 없는 상황에서 발견되어야 했다.

유적 사냥꾼이 흰 늑대가 인간의 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걸 모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사냥을 위해 숨어 있는 와중에 자극적인 냄새를 풍길 수 있겠는가. 신출내기가 아닌 이상,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물론, 진짜 신입이 감히 이런 임무를 맡을 수는 없겠지만.

장목화도 그 흰 늑대가 대체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봐도 평범한 짐승인들 그런 수작에 낚이진 않을 터였다. 모든 동물이 다 순진한 노루 같지는 않았다.

왱왱-

태양이 하늘 정중앙으로 발돋움할 때, 풀숲에선 모기가 활개를 쳤다.

용여홍은 만반의 준비를 다 해 긴 팔, 긴바지까지 입었지만 천으로 미처 가려지지 않은 곳은 조금만 방심해도 금세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잔뜩 숨죽여 웅크린 자세라 각도 잘 나오지 않아서, 용여홍은 내내 아주 조심스럽게 간지러운 곳을 긁으며 모기를 살짝 쫓아냈다.

계속된 기다림 속에 시간은 천천히 흐르고, 성건우는 맹목의 고리를 아낌없이 사용해 감지 범위를 넓혔다.

그는 지금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 숨어 있는 상황에서는 뭔가를 먹을 기회조차 없다는 게 정답이었다.

맹목의 고리는 언제까지나 사용할 순 없었다. 상응하는 심령의 복도 급 각성자가 충전해주지 않는 이상 사용 횟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이에 그는 일정 시간마다 한 번씩만 맹목의 고리를 활성화해서 생물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장목화를 도와 비교적 먼 거리의 상황을 감시했다. 그나마 뭔가 감지되지 않으면 능력이 별로 소모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때, 장목화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한 번 더 감지해봐.”

성건우는 고개 들어 작열하는 태양을 바라보며 손목에 찬, 검은 머리카락으로 만든 장신구가 불에 타오르는 듯한 빛을 내뿜도록 했다.

“여러 인간의 의식이 느껴지네요.”

그의 말로 장목화도 자신이 감지한 상황에 확신을 가졌다.

‘다른 유적 사냥꾼 팀인가? 그들도 여기로 와서 매복하려는 건가?’

그러다 장목화는 차으뜸에게 매혹당했던 때를 떠올렸다.

‘흰 늑대를 잡으려다 실종된 유적 사냥꾼이 아주 많다고 했는데.’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장목화가 무전기를 들었다.

“지금 즉시 위치 바꿔서 엄폐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백새벽, 용여홍, 게네바는 이유도 묻지 않고 매복 지점을 떠나 몸을 숨길 수 있는, 그러나 그렇게 비밀스럽지는 않은 곳을 찾았다.

지형과 주위 환경을 관찰하는 습관 덕에 구조팀은 이미 근처에 몸을 숨길만 한 곳은 다 파악한 상태였다.

그렇게 세 팀원이 단 7~8초 만에 자리를 옮긴 그때, 부근 숲속에서 한 무리가 나타났다. 남루한 옷차림에 소총, 기관단총, 유탄발사기, 개인용 바주카포 등 각종 무기를 쥔 무리였다.

용여홍은 그들을 면밀하게 살폈다. 허리가 굽거나, 표정이 일그러졌거나, 눈빛이 비정상적인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무심자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들 표정에는 통한의 빛이 짙게 어려 있었다. 마치 부모를 죽이고 가족을 빼앗은 원수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 갑자기 용여홍의 눈빛이 급변했다.

그곳에 익숙한 한 사람이 있었다.

‘밥……!’

어젯밤 모든 여자 사냥꾼을 위로해주겠다던 밥이, 그곳에 있었다.

흰 늑대를 찾아 팔자를 고쳐보겠다던 저 유적 사냥꾼과 동료들은 숲에서 나타난 영문 모를 무리에 섞여 있었다. 소총을 쥔 채 통한의 빛이 어린 표정을 드러낸 밥은 너무도 낯설어 보였다.

콰광! 콰광! 콰광!

급작스레 발사된 바주카포가 구조팀이 숨은 세 곳으로 날아들었다.

다행히 구조팀원들은 미리 엄폐물 뒤에 숨어 대비한 덕에 요란한 폭발음 속에서도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유적 사냥꾼들은 거침없이 달려들면서 난사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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