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독행자
“평범한지 아닌지는 누구랑 비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양범구는 간단히 웨트의 질문을 피한 뒤, 구조팀을 보며 웃었다.
“여기에는 길드도 없고, 공증인도 없어. 있는 것이라곤 가장 기본적인, 박약한 질서뿐이야.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든 조심해야 해.
혹시 웨트가 너희한테 흰 늑대의 행적에 관한 정보를 팔려고 했어? 하하, 이자는 분명 상심하긴 했지만, 돈 벌 기회를 놓치려 하진 않을 거야. 그건 유적 사냥꾼 대부분이 가진 본능 아닌가?
이 사람 정보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럼 나랑 웨트의 관계는 대대적으로 틀어지겠지? 난 그냥 너희한테 여기서 어떤 정보를 얻든, 어떤 말을 듣든 여러 방면으로 검증한 뒤에 믿으라고 알려주고 싶었어.”
양범구는 동향을 대하듯 굉장히 친절하게 굴었다.
“먼저 정보를 구한 건 우리 쪽이야.”
장목화가 웨트를 도우려는 듯 대꾸했다.
뒤이어 성건우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네가 전에 한 말도 여러 방면으로 검증해봐야겠네?”
그러자 말문이 막힌 양범구가 한참 뒤에야 자조하듯 웃었다.
“그렇네.”
그 모습을 보고 웨트도 웃음을 터뜨리며 눈가를 훔쳤다.
“하하! 범구, 너도 드디어 내가 평소 받던 느낌에 공감하는구나. 하……. 그래, 내가 돌아가 이불 뒤집어쓰고 우는 대신 여기 머무르며 정보를 파는 건, 그들한테 남은 가족이 있고, 그 가족들에겐 돈과 물자가 필요해서야.”
긴 한숨을 뱉는 웨트를 보고, 양범구가 정색을 했다.
“그때 넌 정신이 완전히 붕괴했었잖아. 난 네가 언제라도 미쳐버릴 줄 알았다고. 이렇게 일어설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 말에 용여홍의 마음속 웨트의 인상이 다시 또 뒤집혔다.
처음에는 웨트가 모든 동료를 잃고 운 좋게 살아남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최근 줄곧 흰 늑대에 관한 정보를 팔고 있었다는 양범구의 폭로를 들은 후에는 늙은 여우 같은 교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슬픔이야 느꼈겠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 데 더 집중한 사람이라 짐작한 것이다.
다만 누구도 그를 질책할 수는 없었다. 애쉬랜드에 사는 사람이라면 다들 생존을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용여홍은 웨트를 다시금 더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웨트를 정확히 형용할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웨트는 아주 복잡한 사람이었다. 분명 좋은 일면도 있지만 교활한 면도 있고, 때론 경계할 필요도 있었다.
양범구가 자연스레 구조팀을 돌아보며 전의 화제를 이어나갔다.
“여긴 전혀 평화롭지 못한 곳이야. 언제든 누군가 총을 뽑아 들고 너희를 죽일 수도 있어. 하하, 근데 너희 차는 어딨어? 누가 지키고 있나? 아무도 없다면 여기서 나갈 때쯤엔 이미 사라졌을지도 몰라.”
“경보기랑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뒀어.”
성건우가 솔직하게 답했다.
진짜 신부를 쫓고 있을 당시 구매한 장비들이었다. 구조팀은 그중 일부는 팔고 일부는 또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남겨두었었다.
“⋯⋯.”
양범구도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구조팀은 이미 누군가 남아서 차를 지켜야 하는 그런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자들이었다. 유적 사냥꾼 다수와 비교한다면 이들의 과학 기술 수준은 최소한 한 단계는 더 높았다.
일반적인 유적 사냥꾼들은 일부는 그런 장비를 다룰 수 있어도 살 만한 여력이 안 됐고, 일부는 아예 손을 대지도 못했다.
이번엔 장목화가 당황한 양범구를 위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우린 로봇이 있으니까. 그런 걸 걱정할 이유가 없잖아.”
“하긴.”
양범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장이 밀어준 잔을 받아 육수를 마셨다.
구조팀도 그 육수를 시켜 이 전진 캠프의 특색 있는 음식을 맛봤다.
게네바는 이미 배터리를 충전할 곳을 찾은 상태였다. 그곳에 가격이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육수는 굉장히 비렸다. 용여홍이 첫 모금을 마셔보니 그랬다. 그 후엔 약간 산미가 느껴졌다. 하지만 짙은 식물 향이 그 맛을 억눌러서 그리 역하진 않았다. 종합적으로 모든 게 한 데 섞인 육수는 맛도 다채롭고 그럭저럭 괜찮았다.
이내 고기 육수와 빵을 다 먹은 양범구가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난 이만 쉬러 간다. 곤란한 일 있으면 날 찾아와. 돈만 내면 도와줄게.”
마지막 말은 씩 웃으며 끝낸 뒤, 양범구는 그대로 퇴장했다.
곧이어 웨트가 구조팀원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랑 알고 지낸 지 오래됐어?”
“아니, 전에 다른 곳에서 한 번 마주친 게 다인데. 어떤 사람인지 알아?”
솔직하게 답한 장목화가 의도적으로 호기심 어린 표정을 드러냈다.
웨트는 2초간 침묵하다가 답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사냥꾼은 보통 여기서 팀을 이뤄야만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 홀로 움직이는 독행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지. 저 사람이 바로 그중 한 명이야. 아주 가끔만 누군가랑 함께 행동해.”
순간 용여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의식적으로 술집 문 쪽을 쳐다보는데, 전에 웨트가 독행자를 평가한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 혼자 움직이는 사람은 무서울 정도로 강한 사람이지.’
* * *
웨트에게 20오레이를 주고 정보를 산 구조팀은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왔다. 구조팀은 이곳 치안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는 따로 묻지 않았다. 그건 이미 백새벽이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여긴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치안도 없는 곳이었다.
이 전진 캠프의 질서를 유지하는 건 퍼스트 시티의 병사로, 주로 산속 변화 감시와 외부에 때맞춰 경고하는 역할이었다.
반면, 유적 사냥꾼은 대규모 총격전 정도의 소란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크게 신경 쓰는 일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지인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전진 캠프에선 도둑질, 총격, 심지어는 암살도 종종 일어났다.
앞서 웨트가 반드시 팀을 이뤄야만 한다는 게 바로 이 뜻이었다.
사실 애쉬랜드 내 여러 곳의 상황도 이와 다를 건 없었다.
구조팀은 이제 감시 카메라를 확인해보았다. 계속 몰래 지켜보던 이들이 게네바를 보고 놀라 달아나기라도 했는지, 구조팀이 차에 설치해둔 경보기가 울리는 일도 없었고, 감시 카메라에도 접근한 사람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 * *
산으로 들어오는 데 시간을 워낙 많이 들인 탓에 하늘은 이미 매우 어두워져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까마귀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언제나처럼 차에서 자면서 교대로 불침번을 서는 거야.”
장목화가 지프의 보닛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이곳 전진 캠프에도 여관이 있고 그런 여관에서는 안전한 주차장도 제공했지만, 그곳에 묵는 유적 사냥꾼은 많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가진 총과 몇 년간 알고 지낸 동료를 더 믿기 때문이기도 했고, 여관에 낼 돈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구조팀이 여관에 묵지 않는 건, 팀원들이 이러한 환경에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장목화의 바람 때문이었다.
백새벽이 전에 말했듯, 애쉬랜드의 황야 유랑자와 유적 사냥꾼들은 오늘만 살아낼 뿐 내일이 없었다. 삶은 늘 어둡고, 버거우며,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하루하루가 그러하니, 그들은 자연히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씻어낼 방법을 찾으며 과시적이고 멋대로인 성격으로 변해버렸다.
이내 주위를 둘러본 용여홍은 개조된 차들과 오토바이를 보았다. 차는 무근자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개조됐고, 오토바이는 훨씬 더 독특하고 개성이 있었다.
그러다 차츰 용여홍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차량을 목격한 탓이다.
이곳의 특이한 점을 또 꼽자면, 남녀가 마주치기만 하면 거칠 게 없다는 것이었다. 짝이 없고 마음만 들면, 또 안전만 보장되면 바로 하룻밤을 보냈다. 이 역시 다가올 내일을 잊고 쾌락에 몸을 맡기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여관 비용을 감당할 순 없고, 그렇다고 풀밭이나 숲에서 할 수도 없으니 보통 차량이나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을 택했다.
용여홍은 바로 이 순간에도 들려오는 민망한 소리와 불규칙적으로 흔들거리는 몇몇 차들을 보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게네바가 제안했다.
“밤 동안에는 내가 경계할게. 배터리도 충분하잖아.”
장목화가 정색했다.
“안돼. 각자 다 책임이 있어. 네가 매일 우릴 대신해줄 순 없잖아.”
게네바가 그 말을 분석하는 와중, 산속 모처에서 우렁찬 포효가 울렸다.
“아우우우!”
순간 용여홍과 백새벽은 늪 1호 유적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 포효는 그때만큼 무섭거나 과장돼 있진 않았다. 그에 호응하는 이도 없었다.
“흰 늑대인가?”
성건우가 흥분한 듯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은 없었다. 애초에 흰 늑대를 보고도 살아남은 이가 많지 않았고, 근거리에서 늑대의 포효를 들은 자도 없는데 구조팀이라고 저 소리를 늑대의 포효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이제 불침번 순서를 정한 구조팀은 두 조로 흩어졌다. 장목화, 성건우는 차에 들어가 눕거나 앉아서 졸았고 게네바는 절전모드로 전환했다.
용여홍과 백새벽은 각자 차 한 대씩 맡아 그 근처를 순찰하거나 상대의 등 뒤를 살피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엔 낡아 빠졌지만, 색채가 화려하고 추상적인 도안이 그려진 소형 세단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릿하게 흔들거리던 차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잠잠해졌다.
이 전진 캠프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가로등과 탐조등이 설치돼 있고 전력 공급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여기 주둔한 퍼스트 시티 정규군은 무심자와 변이 생물의 습격을 경계해야 했기에 디젤 발전기 여러 대를 구비 해뒀다.
덕분에 캠프는 깊은 밤인데도 칠흑같이 어둡지는 않았다. 가로등이 설치된 곳은 비교적 밝은 편이고 그 가장자리만 살짝 어둑할 뿐이었다.
그래서 용여홍은…… 보지 말아야 할 광경까지 보게 되었다.
민망했지만 본능적인 호기심으로 살짝씩 힐끔거리던 용여홍은 갑자기 차 뒷좌석 문을 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상의를 벗은 젊은 남자는 헐렁한 회색 긴바지를 추켜 올리며 허리띠를 매다가 용여홍을 보고 씩, 웃었다.
“우리를 위해 경계까지 서주는 착한 사람이 있었다니.”
상대의 농담에 용여홍은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
“우리 방금 막 온 거야.”
용여홍과 또래인 듯한 젊은 남자는 키는 170센티미터 정도, 갈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얼굴에는 꽤 많은 주근깨가 나 있었다.
용여홍은 상대의 키를 의식한 듯 허리와 등을 꼿꼿하게 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세단 반대편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상당히 늘씬한 여자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한 손으로 벌거벗은 가슴팍을 가린 여자는 용여홍이 더 잘 보이는 트렁크로 와 반대편 손을 걸쳤다.
젊은 여자는 피부가 살짝 거칠고 생김새는 평범한 편이었고,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면 특이하게도 머리 색이 붉다는 점이었다.
여자는 부끄러운 기색이라곤 없이 젊은 남자에게 당당히 말했다.
“좋았어.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 그때는 꼭 콘돔 가져와.”
할 말을 잃은 용여홍은 그 둘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남자가 피식 웃었다.
“사실 가지고 있었어. 그쪽이 너무 주도적으로 나서니까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지.”
여자는 더 이상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용여홍을 힐긋 바라보았다.
“애쉬랜드인? 나보다 피부가 좋아 보이네. 하하, 난 아직 애쉬랜드인이랑은 해본 적 없는데.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까 내일 이 시간에 어때?”
너무나 직접적인 제안에 용여홍은 놀라 어버버 거리기만 했다.
다행히 백새벽이 때맞춰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됐어.”
여자는 이번에 백새벽을 보고 싱긋 웃었다.
“오, 여자친구? 예쁘네. 근데 여러 가지 경험해보고 싶지 않아? 내일, 아니면 모레 죽을지도 모르는데 순간을 즐기지 않으면 기회가 없어. 다른 인종, 다른 지역 사람, 심지어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느낌은 퍽 다르거든.”
이 말을 끝으로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백새벽이 조용히 오렌지 소총을 들어 올린 채 그쪽을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어.”
여자는 한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 뒤, 차로 들어갔다. 이내 차 안에서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무기를 챙긴 여자는 밖으로 나와 캠프의 다른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