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89화 (389/649)

389화. 성건우식 교류

“듀카스가 있다고? 그럼 연줄을 좀 이용해봐야겠네.”

장목화가 다시 차에 오른 성건우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기 쉽지 않은가.

물론, 근육밖에 모르는 듀카스에게는 말을 걸기도, 도움을 청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 여기엔 성건우가 있었다.

혹시 또 추리 광대를 쓰기 어려운 상황이면 듀카스를 자극해 팔씨름을 한 번 더 청할 수도 있을 터였다.

생각을 정리한 장목화는 길게 이어진 줄을 따라 검문소로 차를 몰았다.

그렇게 길을 막은 장갑차가 지척에 가까워지고 검사를 담당하는 병사들에 둘러싸일 무렵, 장목화가 성건우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성건우는 곧장 차창을 내리고 검문소의 듀카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금 그는 검은 가발을 쓰고 있는 데다 다른 위장도 하지 않아서 듀카스가 못 알아볼 염려는 할 필요가 없었다.

이내 듀카스도 환하게 손을 흔드는 성건우를 발견하고 움찔했지만, 뭘 딱히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상대는 그 누구도 아닌 성건우가 아니던가. 듀카스가 아무리 모른 척해봤자 성건우가 그대로 물러설 리 없었다.

성건우가 손을 더 힘차게 흔들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듀카스! 듀카스!”

‘우리가 그렇게 친한 사이였어?’

약간 뻣뻣해진 듀카스의 이마에는 핏줄까지 튀어 올랐다. 저기 저 남자에게 호응해야 할지, 계속 못 들은 척을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구조팀 차량 두 대를 살펴보려던 병사들도 성건우가 장교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부르는 것을 듣고, 이대로 일을 진행해야 하는 건지 망설이고 있었다.

지금 누가 봐도 민망해진 상황이 됐지만, 성건우는 개의치 않았다. 평소에도 행동력이 강한 사람답게 급기야 차에서 내려 듀카스를 향해 걸어갔다.

병사들은 몸을 돌려 장교를 바라보며 그의 분부만 기다렸다. 듀카스는 입을 벌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표정만 일그러졌을 뿐이었다.

그렇게 병사들 사이를 여유롭게 가로지른 성건우는 검문소를 지나쳐 듀카스가 앉아있는 그 지휘 차량 옆에 이르렀다.

“오랜만이야.”

성건우는 듀카스의 어두운 낯빛은 신경 쓰지도 않고 환하게 웃었다.

듀카스가 숨을 한번 들이마신 뒤 느릿하게 토해냈다.

“그렇게 오랜만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장목화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평소 내향적이고 과묵하고 냉혹한 성격을 가진 사람에겐 성건우야말로 최강의 천적이었다. 실력이 아주 강하다면 성건우에게 한 방 먹여줄 수도 있겠지만, 성건우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약하다면…… 방법이 없었다.

“누굴 찾고 있는 거야?”

성건우가 여유롭게 물었다.

듀카스는 그를 보며 원래의 냉혹한 분위기를 드러낸 채 대꾸했다.

“네가 알 필요는 없지.”

성건우는 턱을 쓰다듬으며 장목화의 말투를 흉내 냈다.

“아까 들어보니까 전에 격투장에서 암살을 시도했던 범인의 동료를 찾는다던데. 집회에서 폭발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며?”

듀카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건우는 계속 꿋꿋이 말을 이었다.

“격투장에서 암살을 시도했던 범인이 왜곡의 그림자 신도라는 소문을 들었어. 그 달지기의 신도 중 군인이 많다는 이야기도.”

듀카스가 눈을 치켜뜬 채 웃음기 어린 성건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퍼스트 시티 군대에도 왜곡의 그림자 신도들이 있겠지? 숫자도 분명 적지 않을 거야. 거기다 원로원 특정인이 격투장 암살 기도 사건에 대해 군의 특정 계파를 의심하고 있잖아. 너희도 각자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겠지?”

듀카스는 그 말엔 답하지 않고, 빙그레 웃는 성건우에게 물었다.

“도시를 떠나려는 건가?”

성건우는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과장되게 짓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북안 뭇 산에 나타난 흰 늑대를 사냥하라는 임무를 맡았거든. 너라면 잘 알겠지만, 불모지에 들어가려면 믿을 구석이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몇 가지 중무기를 마련했는데, 이 상태로는 검사를 통과하기가 영 불편할 것 같네.”

친한 친구를 대하듯 성건우는 숨김없이 다 말해주었다.

이를 멀지 않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지아디는 멍한 표정을 드러냈다. 형제에게 저만한 인맥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모양이었다.

듀카스는 성건우를 힐긋 바라보았다.

“문제를 알아서 폭로하다니, 내가 너희를 잡아들일 건 걱정도 안 되나?”

“이 정도 거리면⋯⋯”

성건우가 의도적으로 상대와 거리를 좁히며 눈동자를 굴렸다. 지금 두 사람 사이 거리는 1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듀카스는 부드럽게 나오면 수긍해도, 강하게 나오면 반발하는 유형이었다.

성건우가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은, 이 정도 거리라면 내가 크게 소리쳤을 때 주변에 이 많은 사람이 내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란 뜻이야.”

“뭐라고 소리치려고? 살려줘?”

성건우가 히죽 웃었다.

“아니? 듀카스는 여자한테 팔씨름으로 졌다고.”

“⋯⋯.”

듀카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사이, 성건우는 상대를 한결 더 심층적으로 압박했다.

“나한텐 확성기도 있고 스피커도 있어. 혹시 이 사실을 퍼스트 시티 전역에 퍼뜨리고 싶은 건 아니지?”

듀카스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냐? 내가 겨우 그런 위협에 굴복해 너희를 풀어줄 줄 알아?”

“그럼 팔씨름 한 번 더 해보든가. 그랬는데도 지면 우리를 놔주는 거야.”

성건우는 거의 통하지 않는 벽처럼 끄떡도 없었다.

잠시 기억을 되새겨보던 듀카스의 안색이 순간 파랗게 질렸다. 지금 다시 붙어도 상대에게 이길 희망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그 어마어마한 괴력에 맞설 수가 없었다.

“나랑 붙어도 되고.”

성건우는 더욱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상대를 자극했다.

몇 초간 침묵하던 듀카스가 중얼거렸다.

“너희 같은 녀석들이면 지금 당장 나가주는 게 도시 안전에 더 도움 될 거야. 그래도 검사는 해야 해. 내가 직접 하지. 걱정하지 마, 상자를 열지는 않을 테니까. 공범이 동승 했는지만 살필 거야.”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그러자 듀카스는 후회가 밀려왔다. 바로 했던 말을 번복하고 싶었다.

그 순간, 성건우가 화제를 전환했다.

“혹시 너희가 찾는다는 그 사람, 머리카락은 갈색, 눈동자는 녹색이고 항상 스카프로 입가를 가리고 있어?”

듀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이랄 것도 없는 정보이기 때문이었다. 집회 폭발 사건 이후 치안관들은 곳곳에서 그 사람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성건우는 홀연히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어쩌면 스카프는 일부러 만들어낸 특징인지도 몰라. 입 주위에 또렷한 흔적을 가리는 데에는 다른 방법도 많잖아.”

듀카스는 아무런 호응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생각에 잠겨 들었다.

성건우가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 질문. 그 녀석이 원하는 건 뭘까? 달성하려는 목적이 뭘까?”

한참의 침묵 끝에 듀카스가 답했다.

“체포된 암살 기도자는 동쪽 군대 출신의 퇴역 장교야. 그 사람은 보수파의 모든 구성원을 죽이고, 새로운 확장을 추진하고 싶었대.”

동쪽 군의 대장은 변혁파 수장이자 새로 승급한 원로 장군 가이우스였다.

“그렇군.”

성건우는 약속했던 대로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곧이어 듀카스와 함께 차로 돌아온 성건우는 직접 차 문과 트렁크를 열어주며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모두 검사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각성자는 자신의 의식을 숨겨 동행이 제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었지만, 그건 상대가 그와 접촉하지 않았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듀카스 역시 군용 외골격 장치가 든 상자를 검사할 때 약속대로 그 뚜껑은 열지 않고, 얇은 군용 칼을 꺼내 틈새에 꽂아 몇 번 흔들어 보기만 했다.

칼끝엔 사람의 살이 닿는 듯한 느낌도, 묻어나오는 피도 없었다. 듀카스는 바로 군용 칼을 거두고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 차 두 대, 아무 문제도 없다.”

병사들은 곧장 관문을 열었다.

구조팀 차량 두 대가 다리를 빠져나가는 동안, 성건우는 차창을 열고 듀카스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듀카스는 어떠한 기쁨도, 뿌듯함도 느끼지 않았다. 성건우로 인해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일을 처리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돌아서 지휘 차량으로 향하는 듀카스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 * *

구조팀 지프 안.

장목화가 소리 내어 웃었다.

“듀카스가 그 자리에서 폭발해 너한테 주먹을 날리지 않은 것만 봐도, 감정을 통제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뜻이야.”

그녀는 혹여나 듀카스가 갑자기 폭발해 날뛸 것까지 대비하고 있었다.

이내 성건우가 상당히 놀란 얼굴을 했다.

“전 저희 사이에 이미 우정이 쌓여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장목화는 그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 천천히 정리를 시작했다.

“격투장 암살자는 동쪽 군에 소속돼 있다가 퇴역한 장교라고 했어. 퍼스트 시티의 혼란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거야.

하하, 물론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 왜곡의 그림자 교파가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일부러 그런 연관성을 가진 사람을 택했을 수도 있어.

어쨌든 난 힘겹게 보수파의 약점을 움켜쥔 가이우스가 이 시점에 누군가를 시켜 이런 짓을 하게 했을 거라곤 생각하진 않아. 또 암살자의 공범은 집회에서 폭발을 일으킨 범인이고, 그 집회는 가이우스가 소집한 거였어.”

“가이우스의 머리가 정상이 아닐 수도 있죠.”

성건우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 * *

한편, 앞차의 성건우, 장목화는 내내 이야기 중이었지만 용여홍, 백새벽, 게네바가 탄 뒤차에서는 내내 침묵만 흐르고 있었다.

이 또한 편안함에서 나오는 정적이었다.

용여홍은 진짜 동료와 함께 있을 때는 의도적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외려 아무 걱정 없는 이 침묵이 좋았다.

그렇게 그는 조용한 차 안에서 밖을 보며 사색에 잠겼다. 지금 용여홍이 바라보는 방향은 동북쪽, 불모지에 자리한 13호 유적이 있는 곳이었다.

게네바가 여러 차례에 걸쳐 감청해도, 각기 다른 곳에서 측정해도 결국 도와 전자 제품 수리 방송국이 정말로 그 폐허에 있단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용여홍은 더욱더 두려움만 커졌다.

‘이번 목적지가 산속이라 다행이야.’

그러나 용여홍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혹여나 또 입방정이 될까 싶은 걱정 때문에, 차마 혼자 하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 * *

레드리버 불모지 내 북안 뭇 산은 면적이 광활했다. 여러 종류의 변이 생물과 구세계 군사 기지, 연구 센터가 자리한 이곳은 언제나 가치 있는 사물이 발견되는 공간이었다.

수많은 도로는 다 파괴돼 수리받지도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고, 주위 환경이 굉장히 복잡해 이동이 곤란했다. 퍼스트 시티 군대도 대대적으로 진입하진 못하고 팀이나 소대 등 작은 규모로만 탐색을 진행할 뿐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유적 사냥꾼의 낙원과도 같은 곳이 되어있었다.

매해 수많은 이들이 생존을 위해 분투하는 이 뭇 산 곳곳에 어느덧 자연스럽게 각기 다른 규모의 전진 캠프가 형성돼 있었다.

뭇 산 깊은 곳에 들어가려는 유적 사냥꾼들에게 식량, 식수, 무기, 탄약, 붕대, 연료, 배터리 등의 필수품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또 돌아가는 길에 오른 유적 사냥꾼에게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휴식 공간을 제공했으며, 질병이나 가벼운 상처를 적시에 치료할 공간이 돼주기도 했다.

물론, 충분한 물자만 준다면 중상을 입은 경우에도 헬기를 타고 퍼스트 시티로 가 응급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이러한 방면의 자원은 군대와 연관돼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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