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도시 밖으로
그린올리브 구역에 진입한 지프는 휴고 여관으로 향했다. 사장 휴고에게 가위 말의 흔적을 발견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점심시간이 다 된 이때, 휴고는 여전히 맹물에 호밀빵과 삶은 콩으로 식사 중이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성건우와 장목화를 쳐다봤지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 행동에서 장목화가 뭔가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곧장 성건우의 팔을 잡고 구조팀이 빌려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테이블에 놓인 종이 한 장이 보였다. 종이는 바짝 마른 컵에 고이 눌려있었다.
장목화는 곧장 종이를 들었다. 내용은 딱 한 문장뿐이었다.
「북안 뭇 산에서 그 말을 봤다는 사람이 있다.」
북안 뭇 산? 장목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흰색 늑대를 쫓아간 거예요!”
성건우가 오른손을 주먹 쥐고 왼손바닥을 내리쳤다.
하지만 장목화는 계속 미간을 찌푸린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근데 수면 고양이는 도시에 있잖아. 수종이도 전기가 있어야 하고.”
그거야 간단하다는 듯, 성건우는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가위 말은 전에 차으뜸을 쫓으려고 무려 100킬로미터도 넘게 달렸어요.”
장목화가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하긴, 행동력 넘치는 말이긴 했지. 근데 도시에 있던 그게 어떻게 북안 뭇 산에 있는 흰 늑대의 냄새를 맡았을까?”
당시 차으뜸은 늪 1호 유적 깊은 곳에 있었다.
성건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북안 뭇 산으로 산책하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것일 수도 있죠.”
장목화도 그 외의 다른 가능성은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지⋯⋯. 근데 가위 말을 맞닥뜨리면 수종이는 찾을 수 있을까?”
“전 말이랑은 소통할 줄 모르는데요.”
성건우가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통역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자세였다.
장목화는 이제 그의 말은 듣지도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에는 정말 사냥꾼 길드에 가봐야겠다.”
* * *
그린올리브 구역, 구조팀의 안전 가옥.
전보 전송을 마친 장목화가 긴 한숨을 뱉었다.
“이제 출발준비 해도 되겠어.”
그녀는 팀이 최근 얻은 수확을 회사에 전달했다. 앞으로의 경비 신청과 가상 세계를 파훼할 단서를 얻기 위해서였다.
대형 세력이 있는데 조직을 이용하지 않는 건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반고 바이오 외근 직원들은 이제껏 오랜 시간 분명 이와 비슷한 일을 겪고 어느 정도 경험도 축적했을 터였다.
용여홍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빙빙 돈 끝에 결국 북안 뭇 산으로 가서 흰 늑대를 찾게 되네.”
지금 구조팀에게 흰 늑대를 찾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첫째, 이 작업은 최근 사냥꾼 길드에서 가장 많은 보수를 내건 임무였다. 완료하기만 하면 구조팀은 빚 대부분을 탕감할 수 있었다.
둘째, 가위 말은 흰 늑대의 활동 구역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셋째, 겨울 교파의 정보를 알고 있다는 유적 사냥꾼도 현재 북안 뭇 산에서 흰 늑대를 쫓고 있었다. 성건우는 이미 그의 이름과 나이, 외형적 특징까지 파악해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팀장 장목화는 결국 그 임무를 접수해 북안 뭇 산을 한번 둘러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구조팀은 차으뜸을 대적한 경험도 있으니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매혹이란 능력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그 능력이 전혀 통하지도 않을 든든한 팀원 게네바가 있었다.
“운명의 장난인 거지.”
성건우가 웃으며 대꾸했다.
용여홍은 이번만큼은 성건우의 말을 물고 늘어지고 싶은 충동을 이성적으로 억누른 뒤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도 미리 준비를 해둬야지. 차으뜸한테 대적했을 때처럼.”
이 말에, 장목화와 백새벽이 동시에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성건우는 바로 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간단하지, 차으뜸때보다 더. ‘사람은 할 수 없다. 적어도 해서는 안 된다.’ 이 인식만 심화하면 막을 수 있어.”
백새벽이 물었다.
“근데 추리 광대로 그게 어떻게 가능해? 추리 광대로는 결과를 왜곡시킬 수 없는데 어떻게 인식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거야?”
성건우가 다시 웃으며 답했다.
“심화 자체도 일종의 왜곡이잖아.”
뒤이어 그가 용여홍을 가리켰다.
“너부터 시작할게.”
히익, 찬 숨을 들이마신 용여홍은 조금 망설이다가 일어났다.
“좋아.”
성건우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 용여홍은 극심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그러자 성건우는 살짝 웃음이 터졌다.
“야, 그럼 안 돼. 경계해봤자 효과만 약해진다고. 설마 너 그 흰 늑대랑 우정을 나누고 싶은 건 아니지? 아니면 우정 그 이상? 나도 솔직히 변이 생물과 인간 사이에 생식 격리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안 된다면 훗날 네 아이는 라이거 같은 존재가 될걸? 그러니까⋯⋯.”
용여홍은 성건우가 평소처럼 놀리는 줄만 알고 열심히 반박할 궁리부터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얘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용여홍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낯빛도 굉장히 어두워졌다. 어떤 장면을 상상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인간이라면 자체적인 선을 갖고 있어야지!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순 없어! 그건 변태, 그야말로 변태나 하는 짓이라고!”
짝짝짝!
격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용여홍을 보고, 성건우가 박수를 보냈다.
“훌륭해! 이만 돌아가도 돼.”
“뭐? 끝났어?”
용여홍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성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 없어. 넌 원래 타고나길 도덕성이 엄청나게 강해서 자아 관리 능력도 뛰어나. 뭘 강화하고 할 게 없어.”
“그렇구나.”
용여홍은 성건우를 힐긋 살폈지만, 정말로 만족한 얼굴이었다. 그걸로 의심이 거둬지진 않았지만, 용여홍은 일단 찝찝한 상태로 돌아섰다.
용여홍은 거실로 돌아오자마자 방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은 없어보였다.
“다음.”
성건우가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방과 거실을 가르는 문가로 나왔다.
“내가 먼저 할게.”
장목화가 백새벽에게 말했다.
빠르게 방으로 들어가 나무 문을 닫은 장목화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또 작은 빨강이 놀렸지!”
성건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 심지어 아무 힘도 안 들이고요.”
장목화는 피식 웃곤 기대감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시작해.”
“급하게 굴 것 없어요. 일단 얘기나 나눠요.”
매우 여유롭게 나오는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가 눈썹을 추켜 올렸다.
“오, 말하는 동안 조건을 첨가해 추리를 완성하겠다고? 좋아, 협조할게.”
순간 성건우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전 그저 팀장님의 애정관을 검토해보려는 것뿐이에요.”
“음?”
“팀장님처럼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성분이⋯⋯.”
“풉! 야, 아부하지 말고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
웃고 있는 장목화를 보고도 성건우는 여전히 매우 진지했다.
“정말이에요. 팀장님 전에는 과학연구를 했죠? 지금은 산에서 호랑이를 사냥하고, 바다에서 용을 사로잡고요.
그런 팀장님이 누군가에게 사랑을 느끼기 위해선 반드시 말이 잘 통하고, 팀장님 마음을 넘어 영혼까지도 뒤흔들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해요.
동물은 아무래도 인간의 지혜가 없고, 인간과 얘기도 할 수 없어요. 복잡한 사고도 안 되고, 이상주의자가 되긴 더더욱 힘들죠. 그러니까⋯⋯.”
점차 표정이 누그러지는가 싶던 장목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건 맞아. 지혜가 없는 생물은 애완동물밖에 못 되겠지.”
비로소 성건우가 환하게 웃었다.
“좋아요, 이제 나가보셔도 돼요. 작은 흰둥이 불러주세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얼굴의 장목화는 다른 건 묻지도, 생각하지도 않고 바로 백새벽을 불렀다.
“난 어떻게 설득할 생각이야?”
방으로 들어온 백새벽이 초롱초롱하게 호기심을 드러냈다.
“내 생각에 넌 동물을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네 친구가 돼서 널 버리고 떠나지 않기만 한다면 말이야.”
성건우는 드물게도 진지한 평가를 내렸다.
몇 초간 침묵하던 백새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그러니까 우리는 로봇 이야기나 하자.”
성건우가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로부터 1분도 지나지 않아 백새벽이 문을 열고 나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성건우는 상당히 의욕 넘치는 모습으로 게네바를 바라보았다.
“겐, 너도 한번 시도해볼래?”
“좋아.”
게네바는 도전 정신이 강한 편이었다.
그리고 성건우는 처음으로 처절한 실패를 맛봤다.
* * *
이제 구조팀은 군용 외골격 장치를 3대나 가지게 된 까닭에 더 이상 차 한 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구조팀은 새로운 SUV를 한 대 더 빌렸다.
차 두 대가 앞뒤로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방향은 퍼스트 시티에 처음 들어온 그 길을 따라 북쪽 기슭 불모지로 이어지는 대교로 향했다.
그런데 막 다리에 올랐을 무렵, 장목화는 뭔가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도시에 진입하는 차와 사람만 검사를 받는 게 아니라, 도시에서 나가는 차와 사람도 검사를 받고 있었다.
전방엔 폐허에서 온 오래된 차량이 가득했다. 도시 방위군 병사들은 다리 끝에서 상세한 검사 후 거의 몇 분에 한 대꼴로 차를 통과시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장목화가 작게 중얼거렸다.
불모지에 들어가 변이 생물을 쫓는 작업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현재 구조팀 실력으로도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구조팀은 오늘 블랙셔츠파에 담보로 맡겨둔 기계 팔을 제외하곤 모든 장비를 다 가지고 나왔다.
지금 이런 상태로 검사를 받는다면 무려 세 대에 달하는 군용 외골격 장치는 어마어마한 파란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도시 방위군은 틀림없이 구조팀을 무시무시한 반동분자로 여길 것이었다. 그런 관제 물품에 비하면 개인용 바주카포쯤은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격투장의 암살자 동료를 찾는 걸까요? 그들 도주를 막으려고?”
성건우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럴지도.”
이내 장목화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다 어딘가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녀의 시야에 익숙한 인영 하나가 잡혔다.
검은 자연 곱슬머리에 짙은 갈색 피부, 165센티미터의 조그만 레드코스트인.
당시 구조팀에게 강도짓을 하려다 되레 협박당한 남자, 결국 구조팀이 퍼스트 시티로 무사 진입하게 도와줬던 지아디였다.
지아디는 도시 방위군 장갑차 옆에서 병사들 몇몇과 얘기 중이었다.
“가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
장목화의 지시에, 이미 그럴 마음을 먹고 있었던 듯 성건우가 상당히 상기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무시무시한 기관단총들이 곧바로 성건우를 겨냥했지만, 성건우는 일말의 두려운 기색도 없이 줄지어 선 차들 사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곧이어 지아디도 성건우를 발견하고 반색했다. 기뻐하는 걸 보면 아직 추리 광대 영향에서 벗어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아디가 황급히 옆에 있던 병사들에게 말했다.
“내 친구야, 내 친구.”
그런 뒤, 지아디가 성건우에게 다가갔다.
성건우가 그를 보며 곧장 물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난 거야?”
지아디는 무의식적으로 좌우를 한 번 살핀 뒤 입을 열었다.
“이틀 전에 격투장에서 암살 기도 사건이 발생한 거 알고 있지? 현장에서 체포된 그 범인이 공범이 있다고 자백했대.
하, 상상도 못 했겠지만, 그 공범이 글쎄, 전에 집회에서 폭발 사건을 일으킨 그 녀석이라는 거야! 거기다 들리는 말이 군대의 특정 계파와도 연관이 있는 사람이래!
그 사람이 도시 밖으로 달아날까 봐, 지금 도시에서 나가는 사람들까지도 다 검사하고 있는 거야.”
“그렇구나⋯⋯, 그러니까, 사람을 찾는 거지? 금지 물품이 아니고?”
성건우가 확실히 물었다.
“응, 근데 검사 도중 뭔가가 발견되면 당연히 체포하겠지. 도시 밖으로 나가고 싶다면 이틀만 기다려. 지금은 나도 방법이 없어. 검사가 너무 엄격하게 진행 중이라. 상부에서 파견한 장교가 지켜보고 있기도 하고.”
지아디가 몸을 틀어 장갑차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멀지 않은 곳에 방탄 처리가 된, 짙은 회색 지휘 차량이 한 대 있었다.
그 안에는 회색 군복 차림에 적갈색 짧은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매우 냉혹한 인상의 한 소령이 타고 있었다.
듀카스였다.
순간 성건우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