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87화 (387/649)

387화. 아수스

한 차례 격투가 끝난 뒤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이때, 늦게 도착한 한 귀족이 VIP 귀족석으로 들어왔다.

이곳에 자리한 많은 이들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구조팀 역시 그를 알고 있었다. 여러 정보와 자료에 필연적으로 언급되던 퍼스트 시티 집정관 겸 총사령관인 베울리스의 아들, 아수스 줄리어스였다.

검은 머리, 파란 눈의 아수스는 키도 크고, 얼굴선이 깎아놓은 조각처럼 또렷한 엄청난 미남자였다.

용여홍이 보기에 상대는 틀림없이 유전자 개량을 받았을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장신일 수는 없었다.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었다.

아수스의 키는 성건우와 비슷할 정도로 컸으며, 외모는 그보다 더 준수해 보였다.

특히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눈동자였다. 깊고 매혹적인 눈동자는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듯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검은 셔츠, 검은 바지 차림으로 한 손만 주머니에 꽂아 넣은 남자는 개인 경호원과 가문 소속 호위병을 거느린 채 본인의 자리로 향하고 있었다.

아수스는 이동하는 동안 자신에게 인사하는 귀족들에게 예의 바른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퍽 겸손해 보였다.

그 와중에 장목화는 아수스의 시선이 한 귀족의 여자 파트너와 여자 하인에게 잠시 닿았다가 떨어지는 걸 보았다.

다음 순간, 아수스의 눈길이 장목화에게 향했다.

그러자 그녀는 바로 성건우를 끌어당기며,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사이 장목화는 자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아수스의 시선을 느꼈다.

그다지 끈적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불편한 눈빛이었다.

아수스는 또다시 태연히 눈길을 돌리며 다른 귀족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렇게 잠시 소란스러웠던 귀족석이 하나둘 잠잠해지고, 무대엔 다시금 새로운 격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격투장을 나온 성건우, 장목화, 용여홍은 차에 오른 뒤에도 혹여나 있을지 모를 미행을 따돌렸다. 동시에 그들은 아직도 가상 세계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 * *

예정된 모든 절차를 마무리한 뒤 장목화, 성건우, 용여홍도 집으로 돌아왔다. 팀장은 모두가 모였을 때야 오늘 얻은 수확을 간추려 설명했다.

이내 장목화가 미소 띤 얼굴로 성건우를 바라보았다.

“그 격투사가 죽었을 때, 건우 네가 당장 달려가서 응급처치라도 할까 봐 얼마나 걱정했다고.”

조이 다음으로 무대에 오른 격투사 중, 죽은 이는 무려 두 명이었다.

성건우가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생각은 했죠. 근데 그래선 이곳 풍습과 질서를 바꿀 수가 없어요. 격투는 계속 반복될 거예요. 설령 제가 무리해서 격투장에 있던 모든 각성자, 보안요원한테 주먹질 18번으로 저항했었어도 살릴 수 있는 건 한 명뿐이고요.”

성건우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던 용여홍은 주먹질 18번이란 말을 듣자마자 그 생각을 묵묵히 거둬들였다.

“훌륭한 생각이야.”

장목화는 그런 세부적인 부분을 따지고 드는 대신 칭찬해주었다.

성건우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느니 차라리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해 분투하는 게 낫죠.”

탕탕탕!

게네바가 손뼉을 쳤다.

곧이어, 잠시 고민하고 있던 백새벽이 물었다.

“팀장님이 말씀하신 가상컴퓨터가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어요. 중요한 건 이거에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런 보호막을 뚫고 마커스, 아비아에게 접근할 수 있을까요?”

장목화는 답을 하는 대신 게네바를 바라보았다.

“겐, 무슨 제안이라도 있어?”

“각성자 관련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서 지금은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게네바가 솔직하게 답했다.

장목화도 조용히 웃었다.

“나도 난관에 봉착했어.”

이내 잠시 생각을 해보던 그녀는 성건우를 돌아보았다.

“야, 블랙셔츠파 테렌스한테 연락해서 퍼스트 시티에 깨진 거울을 숭상하는 종교 조직이 있는지 알아봐. 있다면 그들한테 관련 자료도 요청하고.”

“네!”

성건우가 잔뜩 신이 나서 대답했다.

아마도…… 테렌스의 집에서 대접받았던 그 음료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중요 문제에 대한 논의를 마친 뒤, 장목화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아수스라는 사람, 여자를 상당히 밝히는 것 같던데.”

이는 단순한 추정이 아닌, 직접적인 체험으로 얻은 답이었다.

성건우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그래요? 맞아요, 최소한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저한테는 눈길도 안 줬거든요.”

용여홍은 성건우의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 장목화와만 대화했다.

“맞아요, 여자들은 다 자세히 보던데요? 유난히 이상하지 않은 이상은.”

“진짜 예의 없네. 인간 평등에 대한 존중 같은 것도 없었어.”

성건우는 아수스가 미인만 눈독 들였다는 것에 화가 난 건지, 아니면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 건지 상당히 뾰로통했다.

장목화 역시 성건우는 아예 무시하고 용여홍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문제는 퍼스트 시티 일인자 아들이라면 원하는 대로 미인을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런 모습을 보였느냐는 거야.”

이는 구세계 어느 역사서를 읽을 때 느꼈던 의문이기도 했다.

성건우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금욕이 가훈인가 보죠.”

게네바도 원인을 분석했다.

“어쩌면 습관일 수도 있고, 어쩌면⋯⋯, 대가일 수도 있겠지.”

대가. 장목화는 생각에 잠겨 그 단어를 되뇌었다. 그러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백새벽을 힐끔 바라보았다. 여자 동료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대화에 끼지 않았던 백새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장목화도 조용히 시선을 거뒀다.

장목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아수스가 각성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일단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유전자 개량자라는 거야.”

동시에 그녀는 아수스가 각성자라면 만다라 영역일 거라 짐작했다.

이내 장목화가 모두를 한번 훑으며 미소를 그렸다.

“그래, 이 이야긴 그만두자. 우리와는 관련 없는 사람이니까. 지금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건 다음 격투가 열릴 때까지 며칠 동안 가상 세계를 피해 마커스와 접촉할 방법을 찾아내는 거야.

뭐, 지나치게 긴장할 필요 없어. 생각해봐, 지난 며칠간 퍼스트 시티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어? 무심병이 폭발적으로 발병했고, 집회에서 폭발 사건이 일어났고, 반 지성교가 음모를 꾸몄고, 욕망 성인 교파가 그 음모에 참여했고, 격투장에서 암살 기도가 있었지.

거기다 권력자들은 이미 두 파로 나뉜 상태니, 상황은 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어. 그럼 우린 그 혼란 속에서 기회를 찾으면 되는 거지.”

기회가 올 거란 얘기를 할 때 장목화는 짐짓 별 뜻 없는 척 백새벽을 향해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성건우가 적기에 끼어들었다.

“맞아요, 작은 빨강이가 퍼스트 시티에 왔잖아요.”

용여홍이 바로 인상을 썼다.

“그중 대부분은 다 내가 오기 전부터 벌써 무르익고 있었어.”

“모든 일이 무르익었다고 반드시 발생하는 건 아니지. 그대로 꺼져버리는 일도 얼마나 많은데.”

성건우는 언제나 빈틈이 없었다.

장목화도 이번엔 성건우를 말리는 대신 빙그레 웃으며 친구들의 말다툼을 지켜보았다. 덕분에 방 안의 분위기는 상당히 좋아졌고, 심지어는 백새벽의 표정도 풀어지기 시작했다.

* * *

레드울프 구역, 스턴 스트리트 25호.

검은 가발을 착용한 성건우는 역시 테렌스에게 얼음을 띄운 콜라 한 잔을 대접받았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한 입 벌컥 들이켠 그가 웃으며 물었다.

“11월의 달지기, 깨진 거울에 대해서는 들어봤지?”

테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교 조직의 일원이라면 대부분 달지기에 대한 기본 상식은 있으니까.”

“그럼 혹시 퍼스트 시티에도 깨진 거울을 숭배하는 조직이 있어?”

장목화도 얼음 띄운 콜라를 홀짝이며 물었다. 짜릿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이 음료를 가끔이라도 맛볼 수 있다는 건 확실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테렌스는 기억을 잠시 되새겨보았다.

“수면 위로 드러난 조직은 없어.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래. 근데 거울을 숭배하는 비밀 조직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있어. 그렇다고 그들이 깨진 거울을 믿는다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성물인 거울을 엄청 독특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 그 반대편에 신세계가 있고, 신세계에 들어가는 방법도 거울에 있다고 믿는 거야.”

그 말에 장목화는 격투장 곳곳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거울이 떠올랐다.

“보통 어디 출몰하는데? 그 조직 구성원으로 확신가는 사람이 있나?”

테렌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어느 유적 사냥꾼한테서 들은 얘기야. 그 사람은 지금 도시가 아니라 북안 뭇 산으로 갔어. 그 흰색 늑대를 잡겠다면서.”

‘진짜 공교로운 우연이네.’

장목화는 이제 남은 콜라를 다 마셔버렸다.

“그럼 그 사람한테 연락 좀 해봐. 돌아오면 말이야.”

마찬가지로 콜라를 마시던 테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문제없지.”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떠보듯 물었다.

“근데, 빌려 간 돈은 언제쯤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현금 대신 물자로 대신 갚아도 돼. 하하, 급한 건 아닌데 그게 우리 블랙셔츠파 자산이라서. 위에서도 그렇고 다른 녀석들도 꽤 신경을 많이 쓰더라고.”

장목화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리만과의 거래를 끝낸 이래 구조팀은 돈 버는 일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었다. 오로지 주요 임무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성건우가 수시로 기계 팔을 그리워하지 않았더라면, 장목화는 빌린 돈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을지 몰랐다.

‘빌린 돈을 착실히 갚는 대형 빌런이 어디 있겠어?’

속으로 자조하던 장목화가 빙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금방 갚을게, 금방. 열심히 돈 모으고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계획 중이지만.’

밀려드는 죄책감에 장목화는 성건우가 콜라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곧장 그를 끌고 테렌스에게 작별을 고했다.

* * *

장목화가 차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다음 격투 시합이 있기 전까지 그 유적 사냥꾼이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어. 그 사람한테 거울 교파에 관한 정보를 얻어서 가상 세계를 우회할 방법이 있는지 확인해야 해.”

보조석에서 성건우가 대꾸했다.

“저한테 방법이 하나 있어요. 그 방법이 통한다면 가장 세계 필터를 돌파할 수 있을 거예요.”

“무슨 방법인데?”

장목화는 성건우가 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할지 기대가 됐다.

성건우 또한 여느 때처럼 진지하게 답했다.

“제가 깨진 거울로 개종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죠.”

그는 한 몸 희생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사실 신룡교 성찬이 딱히 끌리지 않기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물론, 아직 거울을 숭배하는 그 비밀 교파의 성찬이 무엇인지도 모르니 희생이라는 말을 쓸 법도 했다.

“이론상으론 가능한데. 달지기의 비호를 받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장목화는 적절한 근거로 달랜 뒤,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우리, 블랙셔츠파한테 갚을 돈은 어떻게 벌지?”

그러자 성건우가 씩 웃더니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채권자가 없어지면 채무도 없어지는 거 아닌가요? 블랙셔츠파를 제거해버리면 돈을 갚을 필요도 없어요.”

장목화는 졸지에 멍한 얼굴로 실행 가능성을 고민해보았다. 대대적으로 무장한 지금의 구조팀이면 초월 영성 교단이 끼어들지 않는 한 블랙셔츠파 정도는 충분히 제거해버릴 수 있…….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빠르게 정신을 차린 장목화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야, 우리가 무슨 악마야? 나도 신용 같은 걸 생각해.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쓰레기가 아니라고! 그래, 블랙셔츠파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야 잘 알지, 그래도 정의를 행하기 전에 일단 빌린 돈부터 갚는 게 먼저야.”

“그 후에 돈은 다시 회수하고요?”

환하게 웃는 성건우를 보고, 그제야 농담이었음을 알아차린 장목화가 그를 째려본 뒤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일단, 사냥꾼 길드로 가서 접수할 만한 의뢰가 있는지 보자. 그리고 회사에도 어제 격투장에서 얻었던 수확을 보고하고, 어느 정도 경비를 더 신청해 보는 거야. 전에 받은 돈은 중요 인물을 매수하고 귀족석 표를 사는 데 썼다고 해야겠어. 우리라고 모든 일을 인정에만 의지해서 처리할 순 없잖아?”

짝짝짝!

성건우가 손뼉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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