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야여화-386화 (386/649)

386화. 안전 메커니즘

장목화는 자연스레 구세계의 온라인 게임을 떠올렸다. 온라인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는 자신의 캐릭터를 조작하면서 다른 플레이어나 아이템과 함께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 플레이어가 보거나 듣는 것 전부 게임 안에서 비롯된 것들이었지만 그의 감정 변화만은 진실이었다.

그 게임과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에 자리한 이들 대부분에게는 게임 중이라는 자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일어난 모든 걸 현실로,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으로 여기고 있었다.

게임 안에서는 아무리 큰 피해를 봐도 감정의 동요만 거칠 뿐,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현재 상황은 말하자면 검열 메커니즘이 깔린 게임과 같았다. 피, 위험한 상황, 폭력은 전부 걸러져 플레이어들이 건강한 심신과 안정적인 감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일찍이 장목화는 퍼스트 시티가 어떻게 오레이의 두 후손을 보호해왔는지, 그 어떤 세력에게도 피살당하지 않게 지켜온 건지 내내 궁금했었다.

각성자의 능력은 워낙 다양하고 비밀스럽고 기이해서, 누군가를 암살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 징조도 없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들보다 급이 더 높은 강자도 암살자를 발견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조금 전처럼 물 한 모금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게 바로 각성자였다.

장목화가 생각하기론 각성자의 암살을 예방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안전 구역을 만들어두고 낯선 이가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것뿐이었다.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도 미리 안전 구역을 확보하며 오가는 이들과 보호 대상을 분리해 두어야 했다.

하지만 아비아와 마커스는 그간 수시로 외출하고, 파티에 참석하고, 오늘은 격투까지 관람하러 왔다. 다른 사람과 일부러 거리를 두려는 모습도 보인 적이 없었다.

장목화는 이게 늘 의문이었지만 적합한 이유를 찾지는 못했다.

그리고 비로소 오늘에야 그 대략적인 이유가 짐작이 갔다.

모두가 보는 혹은 접촉했을 마커스와 아비아는 사실 가상 세계 속 허상일 뿐이었다. 그러니 누가 나쁜 의도를 품었다 해도 세 차례 전환을 거치는 동안엔 틀림없이 가상 세계 주인에게 발각되고 때맞춰 저지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재밌는 능력이네. 가상 세계 속 저 귀족이 물 마시다 사레에 들린 건, 현실과 가상 세계를 동기화하는 첫 번째 전환이 무의식적이고 본능적인 복제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그 위험한 정보를 직접 거를 순 없었던 거지.

내가 생물 전기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것도, 건우가 인간의 의식을 포착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거야. 이건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모두 다 완벽하게 복제해낸 단단한 메커니즘이야.

그 후 물 마시다 사레에 들린 사건은 현실에 반영이 안 됐어. 그래서 저 귀족한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고, 물잔도 멀쩡했던 거야.

이 과정에서 가상 세계의 주인은 잘못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어. 그러니까 데이터를 거르는 작업은 사실 그 부분에서 이뤄지는 거지.

그가 우리한테 동기화가 반영된 사건을 보여준 건, 모두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였을까? 그래, 그 후 저 귀족이 거의 죽을 뻔했던 모습은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순전한 허상일 뿐이었어.

그렇다는 건 이 환각에 대한 가상 세계 주인의 통제력이 상당히 강력하다는 뜻이야. 동시에 그는 이 위험한 정보를 추적하면서 어렵지 않게 능력을 발휘한 각성자를 특정하고 그 위치도 찾아냈어. 이 논리라면 조금 전에 발생한 상황 대부분이 다 설명돼.’

장목화는 모든 걸 차분히 되짚으며 세부적인 부분을 하나로 연결했다.

가상컴퓨터가 무엇인지 아는 용여홍도 성건우의 말뜻을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했다. 그에 따라 용여홍의 눈도 어느덧 커다래졌다. 각성자의 무시무시하고 기이한 능력을 새삼스레 실감한 것이었다.

장목화는 성건우를 바라보기만 할 뿐 추측한 것을 설명하지도, 그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녀 역시 성건우가 현 상황을 가상컴퓨터라는 비교적 전문적인 단어로 간단히 설명한 이유를 잘 알았다. 지금 구조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가상 세계에 흘러들어 감청되고 걸러질 수도 있었다.

단, 가상 세계의 주인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은 자라면 가상컴퓨터에 숨겨진 뜻을 알아차리기는 힘들 터였다.

‘이건 일종의 환각 능력이야. 아마 깨진 거울 영역에 속해있겠지. 아비아 곁에도 깨진 거울 영역 각성자가 있었어.

근데 신룡교는 주로 애쉬랜드인 밀집 구역에서 유행하는데? 회사에서 준 정보에도 퍼스트 시티에 신룡교 활동 흔적이 존재한다는 말은 없었어.

하나뿐인 현상이라면 예외로 둘 수 있겠지만 2번이나 같은 현상이 나타났다면 우연이 아니지. 혹시 그들은 깨진 거울을 숭배하는 레드리버인 교파 출신이고, 그 교파는 퍼스트 시티와 밀접한 관계인 걸까?’

지금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는 걸 알기에, 장목화는 경기를 관람하는 척하며 추측을 거듭했다.

사실 구조팀은 조금 전 해선 안 될 말을 했었지만, 또 그렇게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장목화, 성건우가 각성자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는 것, 포카스, 듀카스, 카시엘과 아는 사이라는 것, 마커스와는 초면이고, 그가 압박감을 느낄만한 삶을 산다는 풍문을 들었다는 얘기만으로도 충분히 설명 가능했다.

사실 이 조건들은 퍼스트 시티 상류 사회 구성원 대부분에게 적용됐기에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도 장목화는 오늘 발견한 이 수확만으로, 구조팀의 오늘 작전은 상당한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둥! 둥!

계속 격렬한 소리가 퍼지는 가운데, 가죽 갑옷 차림에 방패와 창을 든 기골이 장대한 격투사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새카만 쌍두 호랑이도 열린 철책 밖으로 훌쩍 뛰쳐나와선 피에 굶주린 듯한 눈으로 사냥감을 응시했다.

기골이 장대한 격투사는 곧장 쌍두 호랑이를 공격하는 대신, 무대 가장자리로 가볍게 뛰었다. 이때 둘 사이의 거리는 상당했다. 그 와중에도 남자는 시종일관 쌍두 호랑이를 마주한 채 방패로 전방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유전자 개량을 받지 않은 일반인과 대형 고양잇과 생물은 속도나 민첩성, 반사신경에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결국 1분도 채 지나기 전 거리를 대폭 좁힌 쌍두 호랑이는 비린내 나는 바람을 일으키며 앞쪽으로 몸을 날렸다.

둥! 둥! 둥!

주위만 빙글빙글 도는 격투사의 모습에 인내심 없는 관중들이 다시금 특제 팔걸이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장목화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실제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가상 세계를 만들어낸 그 심령의 복도 급 강자가 정말로 깨진 거울 영역에 속해있다면, 그자가 치른 대가는 뭘까? 빛 공포증? 물 공포증? 안면 인식 장애? 거울 공포증?’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격투장을 한 번 둘러본 그녀는 관중석 곳곳에 세워진 거대한 거울을 발견했다. 이로써 대가 한 가지는 배제되었다.

거기에 장목화는 안면 인식 장애나 길치일 가능성도 배제했다. 그런 단점이 있다면 당연히 경호를 맡기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안면 인식에 문제가 있다면 보호 대상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수 있고, 길치는 목표를 제대로 쫓을 수도 없었다.

장목화가 다시 무대 중앙에 집중한 그때, 격투사와 쌍두 호랑이의 첫 번째 충돌은 이미 끝나있었다.

격투사는 방패로 막고 창으로 위협하며 능숙하게 몸을 굴려 재차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쌍두 호랑이는 불과 두세 걸음 만에 그를 따라잡고선 새빨간 입 두 개를 동시에 벌리며 재차 격투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격투사는 방패로 맹수를 막고, 창을 앞으로 뻗는 방식을 반복했다.

남자는 쌍두 호랑이가 허공에서 공격을 피하리라 짐작하고, 방패로 바닥을 지탱한 뒤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런데 쌍두 호랑이는 자세를 바꾸지 않고 피에 굶주린 듯한 눈빛으로 목표만을 노리고 있었다.

푹-

이내 긴 창이 맹수의 옆구리를 찌른 순간, 쌍두 호랑이가 그대로 방패를 덮쳤다. 격투사로서는 감당이 안 될 엄청난 무게와 힘이었다.

결국 남자의 팔이 뒤로 밀렸고, 맹수는 이젠 방패를 넘어 남자의 가슴팍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남자는 잽싸게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그대로 창과 방패를 내던지고 반대편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분명 이는 그의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었다. 이 변이 생물은 일반 맹수보다 훨씬 더 거칠었다.

그런 강력한 존재 앞에 무기도, 방어구도 없이 맨몸으로 상대하는 인간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미끄러져 배를 노리는 방법도, 그냥 맹수한테 알아서 스스로를 바치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의 상대는 그냥 호랑이도 아닌, 변이되어 더욱 매서워진 쌍두 호랑이였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관중들의 긴장감도 더 고조됐다.

누군가는 야수에게 물어뜯길 격투사를 차마 지켜볼 자신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더러는 그 끔찍한 광경이 기대된다는 듯 눈을 번득였다.

오레이의 외손자 마커스는 후자에 속했다.

곧이어 옆으로 몸을 던진 격투사가 착지하자마자 양손으로 땅을 짚고 튕기듯 일어났다. 그리고 작은 호를 그리듯 진격하며 조금 전 쌍두 호랑이 때문에 쓰러질 뻔했던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격투사에겐 후퇴란 없었다.

그렇게 쌍두 호랑이의 추격을 피하는 데 성공한 격투사는 한 번 더 몸을 굴리며 앞서 내던진 방패와 창을 집어 들었다.

격투사의 경험과 기술, 결단, 근성을 모두 드러내는 동작들에 관중들도 점차 숨을 죽이기 시작했다.

지금 강철로 만들어진 방패는 움푹 패 있었고, 쌍두 호랑이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뒤이어 격투사와 맹수는 전의 과정을 반복했다. 호랑이는 몸을 날리고, 상대를 물어뜯고, 발톱을 휘둘렀으며, 격투사는 창으로 상대를 찌르고, 몸을 굴리고, 무기를 버렸다가 집어 들었다.

그 기골이 장대한 격투사의 이마에서도 서서히 땀이 흐르기 시작했으며, 체력도 빠른 속도로 소모되었다.

쌍두 호랑이 역시 몸 곳곳에 난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결국 이 격투는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의 싸움으로 접어들었다.

격투사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던 그때였다. 쌍두 호랑이는 너무 많은 피를 흘린 탓에 마지막으로 몸을 날린 뒤 더는 일어나지 못했다.

이 기회를 틈 타 격투사가 곧장 앞으로 몇 걸음 걸어와선 단숨에 호랑이의 급소를 찔렀다. 쌍두 호랑이는 한차례 경련하다 곧 축 늘어져 버렸다.

둥! 둥! 둥!

관중들이 다시금 팔걸이를 두드리며 격투사의 이름을 연호했다.

“조이! 조이!”

격투사는 양손을 높이 쳐들며 격투장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는 환호에 호응하는 동시에, 상품인 스스로를 전시하는 행동이었다.

그가 바라는 건 한 귀족의 눈에 들어 그의 호위병이 되는 일이었다. 그게 아니면 조이는 앞으로 이런 격투를 적어도 네다섯 차례는 더 치러야만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매번 격투를 치를 때마다 죽음의 가장자리에서 맴도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조이는 하루라도 빨리 이러한 생활을 끝내고 싶을 터였다.

‘조이’를 연호하는 사람들 속, 그를 바라보던 성건우가 한숨을 뱉었다.

“정말 안타깝네요.”

장목화와 용여홍의 기분도 썩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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