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리만과의 거래
장목화, 성건우는 계속 대화하며 라베 스트리트로 돌아갔다.
눈앞의 휴고 여관을 보니 장목화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씩, 웃으며 성건우를 쳐다보았다.
“우리한테 도우미가 있다는 걸 깜빡했네.”
성건우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
“전 아직 휴고를 친구 삼지 않았는데요?”
장목화는 그녀의 상징과 같은 웃음을 지었다.
“친구 삼을 필요 없어. 경제적인 이익을 내세워 끌어들이는 거야. 휴고의 능력이 어땠는지 기억해? 꿈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이었잖아! 그럼 가위 말에 흥미를 느끼지 않겠어? 또, 그 사람 배후에 비밀스러운 종교 조직이 있는 것 같았어. 그러니 그 종교 조직 구성원들에게서도 도움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다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성건우를 보고, 장목화가 얼른 덧붙였다.
“이건 이용이 아니다? 군자는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남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고!”
성건우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대꾸했다.
“그럼 휴고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었나 보네요.”
아니면 도구.
“⋯⋯.”
장목화도 결국 할 말을 잃었다.
다행히 성건우는 이 이야기를 물고 늘어지는 대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같은 건 서로를 끌어당기는 법이죠.”
“그게 무슨 헛소리야?”
웃으며 핀잔을 주던 장목화가 이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같은 영역의 각성자와 변이 생물은 서로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건가? 음, 근데 우린 그 사람한테 수종이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야 해. 다른 사람 힘을 빌리자고 그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실수를 저지르면 안 되니까.”
“그게 바로 친구죠! 친구여⋯⋯.”
장목화는 이 틈을 타 노래를 부르려는 성건우를 빠르게 저지했다.
* * *
잠시 후 장목화와 성건우는 여관으로 들어섰다.
프론트엔 간소한 옷차림을 한 휴고가 최근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휴고 씨, 혹시 이런 생물 본 적 있으신가요?”
장목화가 가위 말의 외형적 특징을 한 차례 묘사했다.
휴고는 바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전에도 물었잖아? 난 본 적 없다고 했고.”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지난번에는 너무 간단하게, 대충 묘사한 것 같아서 한 번 더 물어보고 싶었어요. 혹시라도 빈틈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이 변이 생물, 인간의 꿈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꿈꾸는 사이에, 소리 소문도 없이 죽이기도 하고요.”
순간 휴고의 눈빛이 살짝 굳어졌다.
장목화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저희는 일찍이 한 폐허 도시에서 그 동물을 마주친 적이 있어요.”
장목화는 가위 말이 어떻게 그 많은 유적 사냥꾼을 꿈꾸다 죽게 했는지, 구조팀이 그걸 어떻게 경험하게 됐는지, 과장도 보태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려주었다. 상세한 설명을 통해 상대의 믿음을 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말없이 얘기를 듣던 휴고는 장목화와 성건우를 몇 차례나 번갈아보았다.
“살아남은 거였군.”
그의 말투가 퍽 덤덤했다.
장목화가 조금 전 유일하게 언급하지 않았던 건 구조팀이 가위 말의 꿈을 벗어난 방법이었다.
곧이어 성건우가 신중하게 대꾸했다.
“아뇨, 저희는 이미 죽었습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건 우리 혼이에요. 아직 못다 이룬 꿈 때문에 차마 여길 떠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는 거죠.”
휴고가 어떻게 대꾸할지 몰라 침묵에 빠진 사이, 장목화가 웃으며 말했다.
“저희한텐 동료가 있잖아요.”
그녀의 말에 잘못된 부분은 없었다. 당시 구조팀이 살아남은 건 성건우가 재치 있게 발휘한 추리 광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휴고는 당연히 그 동료를 로봇 게네바라고 생각했다.
눈꺼풀을 잠시 내리깔던 휴고는 다시 정면을 보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머리를 살짝 움직였다.
장목화가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 말에게 주인이 있다는 거예요. 그 말의 주인은 고등 무심자도 여러 명이나 길들였어요. 아주 위험한 존재죠. 저희가 아는 한 어른이 말씀하시길, 그 말의 주인은 여기 있는 심령의 복도 급 강자의 수가 조금만 적어져도 이 도시를 파괴해버릴 수 있대요.”
휴고는 장목화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았다. 냉담한 표정에선 전보다 진한 진중함이 묻어나왔다. 또 그녀의 얘기를 통해 이들의 뒤에 강력한 배경이 있다는 걸 포착했다. 그들이 안다는 어른을 얘기할 때도 자연스럽고, 동등한 위치로 표현하는 느낌이 강했다.
“이만하면 된 것 같네요. 만약 그런 동물을 보셨다면 귀찮으시더라도 꼭 저희한테 알려주세요. 보수를 드릴게요.”
장목화가 이 지나치게 얕지도, 깊지도 않은 대화를 평범하게 마무리했다.
그때, 그녀가 또 갑자기 이마를 가볍게 쳤다.
“아, 깜빡할 뻔했네? 만약 저희가 그날 여관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정보를 적어 방문 틈 안으로 밀어 넣어주세요.”
휴고는 그러겠다는 답도, 그러지 않겠다는 답도 하지 않고 장목화와 성건우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여관 밖으로 나온 장목화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돌아가서 좀 쉬자. 앞으로는 사장이 언제쯤 우리에게 소식을 줄지 기다리기만 하면 돼.”
여태까지 구조팀이 했던 바다에서 바늘 찾기식 작업은 사실 방법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짓이었다.
성건우는 여관을 돌아보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수종이가 사장과 그 교파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리만과 거래를 약속한 날이 되었다.
“확인해봐.”
리만은 론달을 비롯한 부하들을 시켜 나무 상자 두 개를 옮겨왔다.
용여홍과 백새벽은 즉각 상자를 열고 문제가 없는지 진지하게 확인했다.
“AC-45형 군용 외골격 장치는 최신형은 아니지만 여러 종류의 모듈이 장착돼 있어. 심지어 헬멧의 바이저로 게임을 할 수도 있다고.
T1형 다기능 기계 팔은 우리 연합 공업 제품이야. 강점이 아주 명확한데, 그렇다고 정밀도가 떨어지는 건 아니지. 그 때문에 높은 정확성을 요구하는 작업들도 충분히 처리 가능해.
음, 들리는 말로 인체 신경과 연결되는 부분엔 반고 바이오에서 제공한 기술을 적용했대. 하하, 반고 바이오는 악명도 높고 어딘가 좀 무시무시하지만 기술 면에서는 확실히 강하잖아? 수많은 사람이 그들을 구세계 파괴의 범인 중 하나로 여기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는 법이지.”
리만의 얘기를 들으며, 구조팀은 서로 쳐다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았다.
“또 어떤 기능이 있지?”
성건우가 기계 팔로 화제 전환을 했다.
리만은 검은 기계 팔을 힐긋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에너지 모듈이 하나 장착돼 있어서 별도로 힘을 더 쓸 수 있어. 그 힘으로 주먹을 날리면 보통 사람 목 하나는 부러뜨릴 정도로 폭발력이 어마어마해. 칼날, 주사기, 제트관 등을 튀어나오게 할 수도 있고.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는 너희가 사전에 어떤 것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져.
레이저 모듈도 있어서 저장된 에너지로 꽤 강도 높은 레이저를 쏠 수도 있어. 근데 군용 외골격 장치 레이저와는 비교 불가야. 한 번에 쓸 수 있는 횟수도 얼마 안 되고. 이 기계 팔 제작에 사용된 합금 강도가 어마어마해. 일찍이 한 사람은 포탄에 그대로 적중당했는데⋯⋯.”
“이 기계 팔로 그걸 막아냈어?”
과시하던 리만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놀란 용여홍이 끼어든 탓이었다.
리만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사람이 으스러진 건 맞는데, 기계 팔은 완벽하게 보존됐어. 손상 정도도 그리 심각하진 않았고.”
‘그게 무슨 의미인데⋯⋯.’
온전한 기계 팔만 남긴 채 으스러진 사람을 상상하다가, 용여홍은 황당함에 맥이 탁 풀렸다.
그때, 성건우가 불쑥 물었다.
“통조림은 못 따?”
성실한 농부 같은 리만의 얼굴에 살짝 경련이 일었다.
“⋯⋯못 따는 건 아니지. 통조림 따개만 하나 장착하면 되지 않겠어? 무엇보다 이 기계 팔이면 억지로 잡아 뜯을 수도 있을 거야.”
“오오.”
성건우는 당장이라도 시도해 보고 싶은 듯 했다.
이내 두 물건 모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장목화는 장원과 그간 모아둔 물자를 리만에게 넘겼다. 어제 구조팀이 오래된 군용 외골격 장치를 담보로 블랙셔츠파에게 빌린 현금은 이미 리만이 알려준 계좌로 이체한 상태였다.
장원 소유권을 어떻게 이전할 것인지는 리만이 나름대로 생각해 둔 방법이 있었다. 직접 나설 필요 없이 구비한 자료만 제공하는 것이었다.
“휴, 드디어 끝났군.”
리만이 각종 물자를 챙기는 부하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그가 옷 주머니에서 알록달록한 인쇄물 한 무더기를 꺼냈다.
“자, VIP 귀족석 표. 첫 경기는 사흘 뒤야. 하하, 그때쯤이면 난 이미 퍼스트 시티를 떠났겠지.”
“훌륭해.”
장목화가 웃으며 표를 받아 들었다.
* * *
정오 무렵, 늑대소굴 밖.
구조팀 다섯이 개조된 지프 안에서 1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엔 ‘카스’란 이름의 패스트푸드점이 성황리 영업 중이었다.
구조팀이 조씨 가문을 인수한 이후, 애쉬랜드인 여자들은 패스트푸드점을 정식으로 개업했다.
영업전략은 바로 박리다매였다. 가게 이름이 퍼스트 시티 내 가장 작은 화폐단위인 ‘카스’인 것도 바로 그 이유때문이었다. 또한 믿을 만한 식재료 공급원과 대량생산에 기대, 집에서 먹는 것보다 더 싼 음식을 표방하고 있기도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패스트푸드점도 이렇게나 많은 부두 노동자와 주위 하류층 주민들을 끌어들일 순 없었을 터였다.
여자들은 구조팀의 예상보다 식당 경영에 훨씬 능숙했다. 예컨대 검은 빵값은 이 구역에서 가장 낮은 빵값과 같되, 그보다 낮지는 않았다. 심하게 공격적인 영업으로 이웃 주민들의 빵집이 망할 것을 우려한 배려였다.
또 가게에서 식사하는 고객들에겐 차가운 물 한 잔을 무료로 제공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입소문으로 인해 장사에도 탄력이 붙었다. 미리 준비해둔 요리와 빵은 1시간 안에 다 동이 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는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본전에 약간 이익을 남기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식당을 경영해서 좋은 점은 여자들이 밥을 절대 굶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지난 며칠간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늑대소굴은 명목상 아직 블랙셔츠파에 속해있다는 게 또 하나의 이점이었다.
식당 일을 돕는 블랙셔츠파의 구성원도 적지 않아서, 여자들은 그런 문제들까지도 비교적 가볍게 처리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런 상황 덕에 여자들은 사격술 훈련과 체력 단련에 더욱 힘을 쓰게 되었다.
“너무 바빠서 지쳤을 텐데 힘이 넘쳐 보이네요. 가서 인사라도 할까요?”
창밖을 보며 미소 짓던 용여홍이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장목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어. 우리는 반 지성교를 건드린 상태잖아. 이제 저 사람들이랑 최대한 접촉하지 않는 게 나아. 작은 흰둥이, 운전해. 테렌스한테 가자. 가서 군용 외골격 장치 돌려받아야지.”
앞서 성건우는 기계 팔에 대한 깊은 갈망을 표했지만, 당분간 그 물건은 구조팀에게 아무 쓸모도 없었다.